노래하는 역사
이영희 지음 / 조선일보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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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를 볼 때마다 <역사는 상상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한국의 국수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일본을 보는 시각은 우리의 문화전달이라는 기본적인 사건을 떠나 일본이 한국이라는 등식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솔직히 이런 발상은 한일양국의 역사정립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런 발상은 해를 끼칠 뿐이다. 한가지 비슷한 예로 중국과 국교가 재개되면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관광하였다. 한국인들은 휴전선을 이용한 길이 막혀있기 때문에 중국측의 만주를 경유하여 백두산을 관광하였다. 이때 한국인들의 입에서 나온 천편일률적인 말이 <이 땅은 우리 땅이었는데...>였다한다. 이것은 중국측이 역사 문제에 있어서 방어적인 입장에서 공격적인 입장으로 전환하게 하는 아주 작은 사건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싯점에서 그 작은 파문은 고구려사의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인 것이다. 우리들이 만주를 보는 시각은 옛날의 우리땅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그 영역이 우리의 역사에서 멀어져갔는가를 생각해 봐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반성이 없다면 그 땅을 영유했던 기억 혹은 사실마저도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연장선상에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 놓여져 있는 것이다.

한일의 관계는 중세 유럽의 프랑스와 잉글랜드와의 관계와 너무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왕의 신하인 노르망디공이 잉글랜드를 점령하고 그 땅의 왕이 됨으로서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왕의 신하인 동시에 점령지의 왕이란 기묘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몸 속에 프랑스피가 흐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대의 프랑스인들은 영국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역사학자들도 영국의 역사를 프랑스의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일의 역사적 관계에서도 이런 점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확대해석하여 일본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는 등식을 주장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언어적인 측면에서 한일관계를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기본적인 전제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일본어가 백제어와 고구려어 그리고 신라어라는 고대 한반도의 언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것은 영어의 단어에 프랑스어, 노르만어, 캘트어 등등이 섞여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언어적 분석이 역사적 사실과 동거관계에 들어갈때 거기서 태어나는 역사는 사생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언어적인 것을 가지고 일본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는 주장은 어찌보면 좀 무리가 있는 발상이라 하겠다. 오히려 이 언어적인 측면만을 더욱더 깊게 파고들어가 고대 한국어와 일본어의 상관관계를 더욱더 철저하게 규명하는것이 더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사실 이령희 교수의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한일고대사의 문제는 일본에서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만큼 이령희 교수가 한일고대사의 핵심적인 문제를 건드렸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기에 언어학자들이 일본어는 한국어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변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이령희교수가 해석했던 만엽집의 일부 내용은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고민이 엿보인다 하겠다. 그래서일까 미즈노 šœ페이 교수가 한일관계를 해치는 책의 첫머리에 이령희 교수의 이 책을 올려놓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는 언어이고 역사는 역사인 것이다. 그런점에서 이 책은 언어적 측면에서 상상의 역사로 넘어가는 바로 그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오히려 순수하게 언어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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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2-21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정말 백두산과 고구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국수주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무력 점령을 비난하는지 원.

조선인 2005-02-22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더 이상 보관함이 늘어나면 안 되는데 부들부들 떨다가 품절이라는 문구에 안도해야 할 지, 울상을 지어야 할 지 갈피가 안 잡히네요.

dohyosae 2005-02-23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 아이님,
조선인님,
어제 하루 종일 컴바이러스와 싸우느라 답글을 달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령희씨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분은 오래전에 영화검열을 담당하는 분이셨거든요. 그런데 이런 상상력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숨은아이 2005-02-23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영화 검열... 그런데 바이러스는 잘 잡으셨나요?

dohyosae 2005-02-23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잘 처리됐습니다.감사합니다.
 
캔터베리 이야기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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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의 저자인 제프리 쵸서가 살다 간 시대는 정말로 중세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그가 태어날 때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3세가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년은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는 플란타지네트 왕가의 마지막 왕인 리차드 2세가 다스리던 시기였다.  쵸서는 리차드 2세가 폐위되고 일년 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막 펼쳐지는 중세의 후기를 구경하지는 못한 사람이었다.

쵸서가 살아가던 시절 잉글랜드의 부는 토지에서 나오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대다수는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낙농제품을 만들어내고 가축을 길렀다. 그리고 토지에 간접적인 기반을 두고있던 직물산업이 번창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쵸서의 시대는 대역병의 시대였다. 1348-1349년, 1360-1362년, 1369년, 1375년에 유럽을 강타한 페스토로 인해 인구는 쵸서가 사망할 당시 400만에서 250만 이하로 내려갔다. 그럼에도 쵸서의 이야기에는 이런 어두운 면은 없다. 복카치오가 페스트의 창궐을 피해 시골로 도망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반면 쵸서는 성 토머스 베케트의 시신이 안치된 캔터베리 성당으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어두운 면보다는 부패한 면이 더 부각되어 있다. 그것은 페스트가 유럽의 인구를 감소시킴으로서 그동안 유럽을 압박하던 인구와 식량의 함수관계를 어느 정도 해소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땅들이 황폐한채 묵혀지고 이를 경작하고자해도 사람이 없었다. 경작하는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땅을 경작함으로서 황폐한 땅은 더욱더 방치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임금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고용하는 사람에게 더 나은 임금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물가의 하락이 지속됨으로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오히려 이전보다 향상되어가고 있었다. 이 결과 농민들은 잉여의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야심이 있는 농부들은 새로운 토지를 임차하고 여분의 현금을 대부하는 방식을 통해 투자하였다. 이 결과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지역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농부-지주계급-들이 튼튼한 석조건물을 건축할 수 있었다(옥스퍼드 영국사 참조).

쵸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바로 이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순례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잉글랜드 각지에서 온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문학작품 속에서조차 신분에 따른 엄격한 묘사를 통해 차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세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술방식이다. 하지만 그 흔한 방식은 아주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엄격함은 서민들의 작품인 패설에서는 적용되지 않지만...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당시 잉글랜드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소지주만이 등장할 뿐이다. 이는 어찌보면 당시 농민들은 농업에서 양모산업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몰락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엔클로저 운동으로 불리우는 울타리치기를 통해 농부들의 경작지가 양을 키우는 방목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것은 농업보다 수익적으로 더 컸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이제  잉글랜드는 농업국가에서 상업국가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그 상업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새로운 계급들은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이들의 그림자 뒤로 예농들의 비참함은 감추어져 있었다. 이들은 와트 타일러의 난으로 자신들의 불만을 폭발시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순례의 여정길에서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4월의 훈풍을 맞으며 캔터베리로 향하는 인간들이 쉽게 잊고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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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뵐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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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의 흑인 영가 He Never Said a Mubling Word 의 가락이 흐르는 가운데 케테는 청소를 한다. 물통에 걸레를 빨아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하얀 회벽을 닦고 닦아도 먼지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 일상의 무료함은 창문을 통해 들리는 흑인의 영가소리에 깨진다.  성체대회와 약사들의 모임이 함께 개최되는 도시의 풍경은 그야말로 성과 속이 혼합된 무대이다. 전후의 상처가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도시의 풍경은 상이군인들과 스쳐지나가듯 만나는 성당의 소녀등을 통해서 우리에게 여백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도시의 상공에는 에드벌룬이 떠있고, 치약회사의 판촉물이 모형 낙하산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콘돔의 광도 또한 성체대회의 풍경과 어울려 종교가 전후의 독일인들의 어떤 마음도 어루만져주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케테의 남편 프레드는 주교관의 전화교환수로 근무하고 있다. 그에게 성직자들의 암호와 같은 전화내용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오직 주말에 케테와 만나 즐거운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그 기다림이 외롭고 쓸쓸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기러기족들이 양산되는 오늘의 풍경과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왜 그녀는 그렇게 기를 쓰고 청소를 하는 것일까. 케테는 먼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먼지털이개로 털어내면 이 미세한 입자들은 공중으로 솟아올라 공간을 떠돌다가 청소꾼이 사라지면 살며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솟아올랐던 장소에 다시 앉아 버린다. 그리고 이 털어버리는 행위는 내일도 모레도 반복적으로 계속되지만 먼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먼지는 무엇일까. 은총일까. 아니면 일상의 반복일까.

케테는 남편인 프레드와 주말의 만남을 통해서 이미 두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임신을 한 것에 대해 불안해 한다. 그 임신은 그녀를 나른하게하면서 감상적으로 변하게 한다. 하지만 그녀는 감상에 젖어들 시간이 없다. 두 아이와 힘든 생활이 그녀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나는 행위는 기쁨이어야하지만 그 둘은 만나서 돈에 대한 걱정을 먼저한다. 이는 이들의 미래가 희망보다는 불안이 더 가까이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 라인강의 기적은 보이지 않고 동과 서로 갈라진 반쪽의 폐허위에는 절망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기 대문이다. 그 불안의 모습에 투영된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십자가에 못박혀 아무말도 하지 않는 그분의 모습과 유사한지도 모른다.

아내와 남편의 눈을 통해 번갈아가며 보여지는 도시의 풍경은 결코 산뜻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13장으로 끝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희망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13이란 숫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케테와 프레드 자신의 문제일 뿐이다. 전후 독일의 모습이 암울하게 그려져 있었도 그로스나 오토 딕스의 세계와는 다른 우울함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십자가의 예수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해서 악에 굴복한 것이 아니듯 전후 독일인들이 삶의 고달픔속에 매달려있다하더라도 희망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케테와 프레드의 침묵속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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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의 진실
빅또르 세르쥬 지음,김주한, 황동하 옮김 / 풀무질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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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혁명을 <지배권의 강제 이전>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사회구조와 행동상의 변화를 통해 어떤 미래를 갖게될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또 틸리 교수는 혁명을 개기 일식과 같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병목현상과 같은 교통지체현상과 유사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혁명이란 자연의 법칙 처럼 과학적 지식에 의해 예견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곳에서 발생할 지 모르는 병목현상과 같다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 혁명은 맑스와 엥겔스가 예언한 예언서-자본론-의 내용과 하나도 닮은 점이 없는 혁명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유럽에서 혁명의 최우선 순위 국가로 독일을 꼽고 있었다. 왕성한 노동운동과 도시 근로자들의 높은 의식화로 표현되는 원동력으로 인해 최초의 공산주의적 평등혁명은 독일에서 일어날 것이고 이 선구적 혁명은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 퍼져나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러시아처럼 공업발전이 늦은 후진국은 혁명 발생 순위에서 뒤로 미뤄졌다. 그만큼 러시아 혁명은 맑스와 엥겔스도 예측하지 못한 세계사 속에서 갑자기 발생한 병목현상이었던 셈이다.

러시아 혁명의 순수성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보통 혁명의 1년째를 언급한다. 하지만 그 시절-1918년-은 정말로 어려운 시기였다. 백군과 적군으로 갈려 내전이 시작되었고, 어제까지 인민의 어버이로 추앙받던 황제는 인민의 적으로 매도되어 감옥에 갇힌 시국이었다. 그리고 서구 열강들은 러시아에 압력을 가함으로서 모든 것이 궁핍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시절을 러시아혁명의 절정으로 보고있다. 이 시기에는 미래에 대한 모든 청사진이 제시된 시기였다. 부의 공정한 분배와 인간의 평등이란 문제는 이제 러시아에서 최초로 완성될 것처럼 여겨졌다. 아이들은 무상으로 교육받고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여성을 위해 국가는 탁아소를 운영하고 교회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민의 의지가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고 해서 밤중에 체포되어 뒷통수에 총알이 박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러시아는 사방의 적들이 자신을 압박할 때 더욱더 일치단결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희망에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정말로 이 시기는 러시아의 무한한 가능성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던 시절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러시아 혁명의 가능성이 해체되고 스탈린 주의로 흐르게 된 것을 독일혁명의 실패와 러시아 노동자들의 파멸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1919년 1월 15일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우익에 의해 살해됨으로서 러시아는 혁명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될뻔한 한쪽 날개를 잃게 되었다. 독일의 혁명을 진압한 연합국은 러시아의 혁명마저도 질식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러시아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봉쇄함으로서 1919년 1월부터 러시아에는 공식적인 수입품은 하나도 들어갈 수없었다. 오직 이 봉쇄를 뚫은 것은 소수의 밀수품 뿐이었다.

연합국의 이 봉쇄로 인해 러시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노동자 계급이 몰락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운명의 손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연합국은 러시아의 혁명을 붕괴시키려다 오히려 더욱더 위험한 인물을 러시아의 중심부로 이동하게 하였으니 말이다. 당시 러시아는 봉쇄와 내전으로 인해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트로츠키는 움츠리기 작전으로 대항했고, 건설에 매진해야할 노동자 계급이 대량으로 군대로 차출될 수 밖에 없었다. 이 결과 공업과 농업부문에서 급격한 상황 악화가 초래되었고 대기근이 러시아를 휩쓸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혁명의 민주적 절차 대신 소수의 집단지도체제로 바뀌면서 혁명의 순수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결과론적이지만 이 변화는 실패작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만약...> 이 단어가 역사에도 적용이 된다면 러시아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 책의 저자인 빅토르 세르쥬는 러시아가 스탈린 주의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 것은 전시 공산주의체제에서 각 분야로 확산된 통제의 규율이 문제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이 전통은 그후 러시아의 한 특징으로 자리잡으면서 건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창조성과 에너지를 억압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것이 러시아의 비극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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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중국인의 생사관 서울대학교동양사학강의총서 9
마이클 로이 지음 / 지식산업사 / 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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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영국인-이 고대 중국의 생사관을 저술했다는 그 자체가 무척 재미있게 느껴진다. 저자인 마이클 로이는 중국고대의 완성을 미신의 세계에서 사상의 세계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오래전부터 무속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이미지들이 시간의 과정을 통해 경전화하여 완성되어 하나의 틀을 갖추게되면서 고대적 환경이 완성됐다고 보았다. 저자는 사상의 경전화가 중국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고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의 관점은 중국 고대인들이 심취했던 4가지 사상-유가.도가. 묵가. 법가-이 중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 서술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서 잘 드러난다(이는 저자가 책의 많은 부분에서 현실적 감각이 뛰어난 왕충의 논형을 많이 언급하고 있는것을 주목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 . 그리고 가장 법률적인 강제력이 강했던 중국 최초의 秦제국과 漢제국 그리고 중간의 新왕조의 특성을 통해서 어떻게 중국 고대의 다양한 사상이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여기서 주의해서 볼 것은 사상의 통합에 황제권의 강화가 아주 크게 일조했다는 점이다. 중국의 역대왕조들이 진제국과 신왕조를 폐덕의 왕조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중국적인 왕조의 질서는 이 두 왕조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 두 왕조가 표방한  법치주의적 관점과 이상주의적 관점은 후대 왕조들이 역성혁명을 성공한 주체들이 주장했던 것이고 결코 포기되지 않았다. 이 둘은 매우 이질적인 것임에도 왕조의 지배자들에 의해 교묘하게 융합되어 하나의 통치체제로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즉 왕조는 통치질서를 위해서 진제국의 법치를 강조했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융합을 위해서는 신왕조의 덕치주의적인 관점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법치주의적인 사상이 중국의 고대 초기에 선호되었던 사상이었지만 진 제국의 멸망으로 법 이상의 그 어떤 것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 부족한 부분은 결국 신왕조에서 잠시 채용했던 덕치주의적 관념으로 채워넣을 수 있었다. 이는 유학에 근본을 둔 것으로 법치에서 유학으로 사상전환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렇게 법가. 묵가. 도가와 같은 법과 민중적인 사상은 유가라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 흡수되면서 중국의 백가쟁명이 판을 치던 고대는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즉 법치주의적 제도의 완성을 위해서는 경전을 덕치주의적 제도의 완성을 위해서는 예의 확산을 노렸다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앞으로의 중국은 도덕과 법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 아니었을까...

마이클 로이는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와 천체관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 변화의 주기가 어떻게 유학적인 시스템에 맞추어 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단순한 우주에서 5행사상과 10간 12지, 24행도를 받아들임으로서 규칙의 우주로 이해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우주의 생성. 순환. 소멸의 주기가 어떻게 오행의 개념에 맞추어 변해가며 그리고 왕조의 변화 역시 이 법칙에 맞춤으로서 우주의 질서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속에서 순환하고 있음을 말함으로서 모든 변화를 설명하려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황제권이 완성되고 이를 위해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유교의 질서체제를 본받는것을 의미한다. 유교는 예를 중시하는 것으로 예는 어떤 의미에서 질서로 볼 수 있다. 즉 왕권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질서가 세워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배층을 祭禮와 지배이념을 만들고 이를 위해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여  제국을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상하 질서가 완성된 제국은 이제 천하의 인간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성문화하기 위해 경전을 완성함으로서 중국의 고대 세계는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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