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이야기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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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의 저자인 제프리 쵸서가 살다 간 시대는 정말로 중세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그가 태어날 때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3세가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년은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는 플란타지네트 왕가의 마지막 왕인 리차드 2세가 다스리던 시기였다.  쵸서는 리차드 2세가 폐위되고 일년 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막 펼쳐지는 중세의 후기를 구경하지는 못한 사람이었다.

쵸서가 살아가던 시절 잉글랜드의 부는 토지에서 나오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대다수는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낙농제품을 만들어내고 가축을 길렀다. 그리고 토지에 간접적인 기반을 두고있던 직물산업이 번창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쵸서의 시대는 대역병의 시대였다. 1348-1349년, 1360-1362년, 1369년, 1375년에 유럽을 강타한 페스토로 인해 인구는 쵸서가 사망할 당시 400만에서 250만 이하로 내려갔다. 그럼에도 쵸서의 이야기에는 이런 어두운 면은 없다. 복카치오가 페스트의 창궐을 피해 시골로 도망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반면 쵸서는 성 토머스 베케트의 시신이 안치된 캔터베리 성당으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어두운 면보다는 부패한 면이 더 부각되어 있다. 그것은 페스트가 유럽의 인구를 감소시킴으로서 그동안 유럽을 압박하던 인구와 식량의 함수관계를 어느 정도 해소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땅들이 황폐한채 묵혀지고 이를 경작하고자해도 사람이 없었다. 경작하는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땅을 경작함으로서 황폐한 땅은 더욱더 방치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임금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고용하는 사람에게 더 나은 임금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물가의 하락이 지속됨으로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오히려 이전보다 향상되어가고 있었다. 이 결과 농민들은 잉여의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야심이 있는 농부들은 새로운 토지를 임차하고 여분의 현금을 대부하는 방식을 통해 투자하였다. 이 결과 잉글랜드 남부와 동부지역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농부-지주계급-들이 튼튼한 석조건물을 건축할 수 있었다(옥스퍼드 영국사 참조).

쵸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바로 이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순례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잉글랜드 각지에서 온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문학작품 속에서조차 신분에 따른 엄격한 묘사를 통해 차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세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술방식이다. 하지만 그 흔한 방식은 아주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엄격함은 서민들의 작품인 패설에서는 적용되지 않지만...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당시 잉글랜드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소지주만이 등장할 뿐이다. 이는 어찌보면 당시 농민들은 농업에서 양모산업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몰락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엔클로저 운동으로 불리우는 울타리치기를 통해 농부들의 경작지가 양을 키우는 방목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것은 농업보다 수익적으로 더 컸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이제  잉글랜드는 농업국가에서 상업국가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그 상업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새로운 계급들은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이들의 그림자 뒤로 예농들의 비참함은 감추어져 있었다. 이들은 와트 타일러의 난으로 자신들의 불만을 폭발시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순례의 여정길에서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4월의 훈풍을 맞으며 캔터베리로 향하는 인간들이 쉽게 잊고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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