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그린 사람들
루이스 H.홀만 / 동인(이성모)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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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Moll의 지도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세계에서 매일 벌어지는 속임수 가운데, 최근의 지도만큼 괘씸한 것도 없다. 무지하면서 잘난 체하는 자들이 새로운 지도랍시고 세상에 내놓은 수많은 지도들... 선과 악, 옭고 그름에 대한 어떤 판단이나 지식도 없는 자들이 보잘것없고 불완전한 외국지도를 마구 복사하여 출판한다. 이런 자들은 기본적으로 화려한 눈가림으로 대중들을 속이거나, 그들의 야비한 행동을 경멸하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점잖을 빼며 함부로 남용하곤 한다.>

초기의 지도학자들은 정보를 어디서 얻었을까? 선원들이었다. 선원들은 가장 멀리 육지에서 떨어져 해안선의 모양을 직접 본 인간들이었다. 이들은 운이 좋아 육지로 귀환하면 자신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특유의 과장과 함께 한잔술에 섞어 토해내곤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이었지만 그들이 직접 보았던 새로운 땅에 대한 진실은 들어 있었다. 지리학자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종이위에 미지의 세계를 그려나가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에는 자신들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그려나간 것이 아니었다. 아발론이나 예루살렘과 같은 지상의 중심에 자신들의 위치를 그려나간 것이다. 중심은 언제나 육지에 위치해 있기에 육지로부터 멀리 벗어난 곳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그래서 초기의 지도는 육지가 거대한 섬처럼 그려져있고 성서의 지식으로부터 네개의 강이 이 육지를 사등분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의 지도가 15세기경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더이상 바다 수평선 저 넘머가 낭떨어지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기 까지 이런 지도는 인간의 상상력을 차단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두려움을 넘어 수평선 너머로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들이 지도의 역사에있어서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새로운 지식은 지도에 즉각 반영되었고 지도에서는 점차 <알 수 없는 영역>이란 뜻의 라틴어인 Terra Incognita란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지식이 종이 위에 하나씩 첨가될 때마다 지도는 장식적인 목적에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진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지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아주 획기적인 생각을 하였는데 그것은 지도 위에 색을 칠하는 것이었다. 그 색은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자신들의 땅은 같은 색으로 칠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지도상의 색깔이 단일한 색으로 변해가는 그 과정이 제국주의의 발전사라고 한다면 너무 과장한 것일까.

사람들은 지도를 그려나가면서 예전의 지도와 자신들이 지금 알고 있는 지식과 다른 점이 하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지구는 육지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바다 중심의 세계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도는 육지가 지구의 3/4을 차지하는 것에서 반대로 바다가 2/3가 되도록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제 인간들은 육지를 중심으로 생각하던 사고방식을 바다를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이 결과 육지길을 틀어쥐고 있던 아랍세계가 쇠퇴하게 되고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한 서구유럽이 대두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지도의 발달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 하겠다.

어린 시절 도화지에 보물섬이나 피터팬을 읽은 뒤 나 자신만을 위한  미지의 세계를 지도로 그린 적이 있었다. 지도는 여러가지였지만 공통된 점은 꼭 하나 있었다. 내가 위치한 곳은 움푹들어간 만에 위치해 있고 그 뒤로는 깍아지른 절벽과 로빈슨 크루소에서 본 동굴이 항상 위치해있어야만 했다. 물론 지도를 그리면서도 이 세상에 그런 곳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그런곳이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조그만 책자는 내가 오래전에 잊었던 장소를 보여주고 있다. 오래전 인간들이 생각했던 그들의 지도를 보면 내가 어린 시절 상상으로 그렸던 지도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게된다. 여기에서도 또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여진 단절되었으면서도 이어진 인간 정신의 역사를 만난다는 사실이 즐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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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3-15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 때 그런 바닷가를 꿈꾸었어요. 깎아지른 절벽에 난 동굴! ^^

dohyosae 2005-03-15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은 바닷속 인어공주님, 눈물은 진주가 되고 머리결은 산호가 되었네...
 
로마제국쇠망사 8
Edward Gibbon / 대광서림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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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본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11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서이다.  시기적으로도 서기 96년부터 시작하여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구스의 1453년에 이르는 방대한 시기를 담고 있다. 대략 1천5백년간의 역사 기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역사 이외에도 로마제국과 관계있는 주변의 역사도 자세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기본의 이 저서는 서구 고대와 중세를 아우르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로마제국의 흥망을 기술한 것 이외에도 고대와 중세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특히 8권은 고대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중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봐야만 할 부분이다.

고대 기독교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12년 로마의 종교로 공식 인정받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과 로마로 대표되는 세속적 권력과의 관계는 여전히 불분명한채로 남겨져있는 상태였다. 이는 고대 기독교가 아직도 확고하게 자신들의 모습을 형성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고대 로마의 기독교의 모습과 신학적인 문제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세력과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의 경쟁에서 파생되는  초세기 기독교의 문제-성상파괴운동-를 심도있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동방과 서방교회의 대분열이 당시대에 양측의 문제로 인한 갈등에서 벌어진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경쟁관계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 저항한 많은 이단종파에 대한 기술은 다른 책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특히 기본이 다루고 있는 이단종파는 네스토리우스파, 야곱파, 마론파, 아르메니아파, 콥트파, 아비시니아파와 같이 서구 기독교적 입장보다는 고대 기독교의 전통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는 제파들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발전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사적 입장에서도 아주 훌륭한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기본이 언급하고 있는 이들 종교는 지금도 꾸준히 소수이긴 하지만 명맥을 유지하면서 고대 기독교의 모습을 현재의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소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마와 가장 강력한 고대의 라이벌이었던 페르시아의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페르시아는 고대 로마의 황제에게 서신을 보낼 때도 로마와 자신을 세상을 지키는 두개의 눈으로 기술할 만큼 대등한 제국이었다. 그리고 로마는 라인강 이동으로 더이상 제국의 영역을 확대하지 못한 것이 게르만족 때문이었다면 유프라테스강 이동으로 영역을 확장하지 못한 것을 페르시아 때문이었다. 물론 페르시아는 각 시대 마다 다른 왕국의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게르만족이 야만족으로서 로마의 두려움과 경멸을 받았다면 페르시아는 로마와 대등한 문화적 역량-더 나았을지도 모른다-을 과시함으로서 로마를 두렵게 하였다.  로마가 게르만족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교화를 시키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페르시아와는 언제나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페르시아를 바라보는 로마의 시각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런 페르시아가 호르스 대제 이후 분열의 길로 접어 들어 쇠망해 가는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우리들이 중심의 역사로 배우는 교과서적인 것 이외에 주변부의 역사를 맛볼 수 있게한다. 그럼에도 기본의 영국적 시각은 가끔 책을 읽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영국적 코스모폴리탄이었던 저자의 어쩔 수 없는 편견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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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5-03-1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한자어나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듯한 조금 부자연스러운 번역만 제외한다면 정말 괜찮은 것 같습니다. 리뷰에 쓰신 것처럼 다른 책에서 접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이 나와서 흥미롭게 읽었거든요.

dohyosae 2005-03-15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입니다.데메트리오스님.
 
돈키호테 신부님
그레이엄 그린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8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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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은 자신의 소설을 노블novel과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로 나누어서 평가하였다. 노블은 순수한 소설이라면 엔터테인먼트는 외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런 작풍 때문에 1991년 사망할 때까지 해마다 노벨상 후보 명단에는 들어갔지만 결코 그 상을 탈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그레이엄 그린의 구분에 따르면 노블보다는 엔터테인먼트쪽에 가까운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다보면 작가의 종교적 깊이와 삶을 관조하는 깊은 풍모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가톨리시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저자가 한때 공산주의에도 심취했던 작가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에 대한  <오마쥬>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가 중세의 황혼이 배경이라면 이 소설은 프랑코 체제가 붕괴되고 민주화가 가속되는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돈 키호테가 늙은말 로시난테와 산초판자와 함께 라만차 지방을 가로질러 모험여행을 떠난다면 여기서는 로시난테라는 이름이 붙은 낡은 시트로엥에 공산주의자인 전직 읍장인 산쵸판자와 발렌시아에서 마드리드로의 여행을 떠난다. 발렌시아가 어떤 도시인가? 36년 내전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의 본거지였으며 최후까지 프랑코군대에게 저항했던 도시가 아닌가.

둘은 여행을 떠나면서 온간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는 인생. 신앙. 사상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둘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존재이다. 하나는 유물론자이고 다른 하나는 유심론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이런 섞일 수 없음이 문자로 형성된 것일 뿐임을 느끼게 된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삶과 인생은 그 시대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에게 있어서 사상과 신앙은 자신들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둘 사이에 너무나 명확하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여행에는 투쟁이 아닌 인간에 대한 통찰이 깊이 스며있다.

여행은 인간을 항상 자유로운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서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통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그러한 통찰을 얻게된다. 그것은 본당에서 신앙의 수호자로 머물던 것과는 좀 더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도의 여행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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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의 트라이앵글 2 -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노암 촘스키 지음, 유달승 옮김 / 이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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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근대 이후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 사이에 이어졌던 삼각무역이 생각난다. 미국의 돈이 이스라엘로 흘러들어가고 이스라엘은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과 아랍 제국을 견제하고 아랍의 석유는 미국으로 흘러간다. 노예와 럼주가 석유와 무기로 바뀌었을 뿐 그 착취의 계통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입장에서 본다면 외래인일 뿐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런 입장은 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주인과 손님의 입장이 정반대의 상황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보면 국제정치질서에서 약자는 항상 피해자의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스라엘은 실제로는 중동의 군사적 강대국이면서도 항상 거대한 아랍에 둘러싸인 약자의 입장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 한 예가 지도상의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아주 조그만 나라를 둘러싼 거대한 아랍제국의 그림지도는 항상 우리의 시선을 왜곡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런 이스라엘의 껍질이 벗겨진 것이 1982년 이스라엘이 자국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구실로 레바논을 침공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수세적 입장에서 공세적 입장으로 정책을 변환시킨 사건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70년대 후반 이후 정권을 담당해왔던 온건한 노동당 정권이 물러나고 우파적 강경정당인 리쿠르당이 정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예견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후 이스라엘은 자위적인 방어적 개념에서 자위적인 공세적 개념으로 바꾸게 된다. 이 결과 이스라엘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군사적 반경이 넓어지면 넓어질 수록 안전하여야함에도 그렇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이런 강경한 입장은 주변 아랍국의 반발을 불러 왔으며, 특히 당사자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을 야기시켰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48년 이후 많은 것을 배웠음이 드러났다. 이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폭력적인 것보다 비폭력적인 저항이 더 위협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1987년 12월 시작된 민중봉기인 인티파타는 이스라엘에게 많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봉기는 과거의 한정적인 양상에서 이스라엘이 완전히 철수하는 그날까지로 못박음으로서 자신들의 투쟁이 끝없이 계속 될 것임을 이스라엘에 경고하였다는 점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서 철수하지 않는한 양측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이라는 점이다. 사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93년 오슬로 협정을 인정함으로서 이스라엘에 아주 커다란 양보를 하였다는 점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로 인정되었을 때 지금 이스라엘의 국경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영토에 이스라엘인 거주지역과 팔레스타인 사람 거주지역이 얽혀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를 48년의 독립전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추방함으로서 해결하였다.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쫓겨난 영토에 대한 권리를 꾸준히 주장해왔고 이스라엘 역시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오슬로협정을 수락하면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땅을 포기하였다. 그 댓가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얻었던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더욱 강화하면서 오슬로 협정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약속 위반이 이 지역의 긴장의 제1차적 원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중재자인 미국은 이스라엘의 이런 약속 위반에 대하여 어떤 재제를 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강화함으로서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입장을 더욱 굳건히하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국 영토에서 포기한 재산권의 배상 형식으로 6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보상해야함에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미국 역시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 이스라엘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염원을 무참히 부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미국에서는 흑인들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되돌려보내자는 운동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이때 소수의 흑인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고, 이들을 위해 아프리카의 서부해안 지역에 <라이베리아>란 나라가 급조되었다. 그리고 이들 소수의 흑인들은  그 땅에 들어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다수 흑인들을 지배하였다. 이런 불평등이 폭발하면서 라이베리아는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 내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왜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라이베리아의 예가 떠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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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3-1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부터 봐야지 하고 찜해놨던 책인데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 있네요.

dohyosae 2005-03-1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반갑습니다. 미국의 시각과 미국의 이익이 이렇게 일치하는 경우도 드믈겁니다. 아마 자신들의 땅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지요...
 
유럽 혁명 1492~1992 - 지배와 정복의 역사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2
찰스 틸리 지음, 윤승준 옮김 / 새물결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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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간 1492년에서부터 1992년까지의 유럽 혁명사를 다룬 이 책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 2백주년이 되는 1989년 역사가들이 <혁명은 끝났다>라고 외친데 대한 반박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과연 이 시대에 있어서 혁명은 끝났는가를 되물어보며 프랑스 혁명보더 훨씬 더 시대를 내려간 한점-유럽에서 아랍인들이 물러간 시점부터 혁명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유럽의 혁명을 네덜란드형, 영국형, 프랑스형과 러시아형으로 분류하여 살펴보고 있다. 네덜란드에는 이베리아의 혁명도 함께 고찰하고 있는데 이는 합스부르그가의 신성로마제국이 이베리아와 네덜란드를 통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가 굳이 혁명을 이렇게 국가별 유형으로 나눈 이유는 혁명의 방법이나 결과가 확연하게 구별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선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네덜란드-이베리아형 혁명은 경제적 발달로 인해 발생하게된 도시화와 도시 부르조아지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네덜란드와 벨기에지역은 중세시대 플랑드르지역으로 불리었다-의 경제적 동인이 혁명을 낳게하는 원인이되었다고 보고있다. 이 결과 혁명은 부르조아지의 이익에 맞추어 발전되었다고 보고있다. 그러므로 네덜란드에서 혁명의 선두에는 항상 신흥부르조아지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권위를 부정하면서 느슨한 연방제 국가를 선호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갈라지면서 가톨릭 세력은 프랑스와 연대를 한 반면 프로테스탄트들은 프랑스적 통치체제를 거부하고 연방제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반면 이베리아는 상업의 발달이 아니라 식민지에서 착취한 부를 바탕으로 귀족세력의 세력확장으로 인민대중과의 괴리감에서 벌어진 혁명이라는 점이다. 이는 1936년의 내전에서와 같이 지속적인 대립을 통해 혁명의 분위기가 성숙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 결과 이들 나라에서는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지 못하고 귀족과 부르조아지를 중심으로 하는 계급이 항상 주도권을 잡아 왔다. 다만 이베리아는 네덜란드처럼 종교적 분열을 경험하지 못함으로서 내부의 분열을 경험하지 못하였지만, 계급간의 갈등이 촉진되었다는 점이다. 이 결과 이베리아반도에서는 항싱 혁명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점이다.

영국형 혁명은 귀족계급에 의한 왕권의 견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영국은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왕의 중앙집권적 속성과 귀족들의 지방분권적 속성이 충돌하면서 위기상황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왕과 귀족들의 투쟁은 종교적인 문제로까지 비화되어 영국이 자신들만의 종교인 성공회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 귀족계급들은 혁명의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다른 혁명과는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변화보다는 혁명을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수단으로 활용한 느낌이 든다. 이런 영국의 혁명에는 항상 귀족과 젠트리계급의 연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느슨한 왕권을 목표로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앞에서 단결했으며 혁명의 위험성 또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결과 영국은 혁명의 위험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기 위한 정치제도를 확립하게 되는데 그것이 의회민주주의인 것이다. 즉 영국은 이후 혁명적 상황보다는 의회적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 내고 있다. 이 결과 영국에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에서는 혁명적 상황이 거의 사라졌다. 다만 영토와 종교의 갈등이 심화되어 있는 아일랜드만이 혁명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프랑스의 경우 혁명은 왕권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거의 불식되었다고 보았다. 즉 프랑스는 절대주의 왕권을 확립하면서 어느 유럽 국가보다도 안정적인 형태의 정치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생한 것은 왕권과 고등법원의 불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왕이 공표한 법률이라도 고등법원에 등재가 되어야만 합법적인 법률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고등법원이 가끔 왕의 법률을 심사하고 등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서 문제를 야기하였던 것이다. 프랑스는 왕권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지방의 영주계급들에 의한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부빈 전투 이후 왕권이 강화되면서 귀족계급보다 왕의 관리계급에 의한 지배가 확대되었다. 이 결과 왕은 영국처럼 의회의 도움보다는 자신의 관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 결과 왕의 정책을 실행하는 관리들의 부패문제가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세금을 많이 걷는다든가 강제 징발과 징집과 같은 문제는 항상 농민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여기에 지식인들이 가세하면서 내전의 양상을 띠고 혹은 혁명적 상황까지 연출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의 소요사태는 전국적인 것보다는 국지적인 것이 많았기 때문에 왕권은 이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이런 진행과정은 프랑스 혁명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중의 봉기에 지식인 집단이 가세하고 왕이 물러나고 과격파와 온건파의 투쟁을 거치면서도 군사적 집단이 혁명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다는 점은 프랑스식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이랄 수 있다.

러시아식 혁명은 나폴레옹 전쟁 이전까지는 왕조적 내부의 문제였다. 왕권의 후견인과 피후견인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이 빈번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05년 이후에는 계급적 혁명이 휩쓸었다는 점이다. 이 계급적 혁명이 러시아 혁명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해되고 있다. 노동자와 지배계급 사이에서 벌어진 이 혁명은 주변의 민족적 혁명으로까지 발전하게 됨으로서 90년대 이후 혁명 이후 강제로 러시아에 통합된 국가들이 어떤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가를 예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시절 권력을 가진 집단은 내부 단속과 외부에 대한 자신들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한 권력에 유도된 혁명이란 점이다. 그리고 공산당과 비공산당원간의 계급적 양상도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러시아의 혁명은 구소련 붕괴 이후 동유럽에서 발생하는 혁명의 어떤 예형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혁명의 상황을 비교분석하면서 하나의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정말로 유럽에서는 혁명이 끝났는가? 그 대답은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유럽의 민족적 혁명이란 이제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문화적 다원주의로 인해 전국이 하나의 이해에 공감하는일은 결코 없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역과 인종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방분권적인 형태를 강화시켜나가는 유럽에서 혁명은 이제 쇠퇴해 나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즉 브리튼 혁명은 일어나지 않지만 스코틀란드의 혁명이나 웨일즈의 혁명은 가능하고 또 프랑스 혁명은 불가능하지만 부르타뉴혁명이나 부르고뉴 혁명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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