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 군인에서 상인 그리고 게이샤까지
다카사키 소지 지음, 이규수 옮김 / 역사비평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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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植民地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의 영토 확장의 결과로 얻는 영토나 또는 그 세력 범위 안에 있는 보호국에 대하여 식민을 행하는 토지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식민植民이란 단어는 국민의 한 부분을 제 나라 밖의 토지 또는 제 나라와 정치적 종속 관계를 가진 토지에 영주永住의 목적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식민지란 어떤 나라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주인 행세를 하는 땅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사전적 정의에 대한 확실한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일제 36년의 지배라는 등식에 익숙해져 있지만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조선-대한제국-은 1875년 운요호雲揚號사건 이후 일본인이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가 36년이 아니라 무려 70여년에 걸친 수탈의 역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수탈의 역사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남에서 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수탈의 역사 속에는 어떤 인간적인 교감이 있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에게나 조선인들에게나 좋은 일본인, 좋은 조선인은 어쩌면 '죽은'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적 교감이 없는 민족간의 교류는 공허한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인들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굳이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마치 나치 독일에서 독일인들이 화창한 날 뿌옇게 내리는 '회색빛 재의 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서 한반도 건너온 사람들의 부류는 낭인浪人에서부터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일본의 한국 강점에 대한 불합리성을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불평등 속에서 심화된 삶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점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이 결과 일본인들은 조선 혹은 조선인은 교화되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일본의 시각은 서구 식민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필연적 운명'이란 단어와 너무나 유사한 것이라 하겠다. 서구 유럽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을 대상으로 삼은 반면 일본은 한국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일본인들의 이런 행태는 서구 유럽이 아프리카에서 행하던 삶의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교화가 아니라 주인으로 행세하는 식민주의자의 변태적 변형이 일본인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들만의 거주지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결국 이들 일본인들의 이러한 삶은 자신들이 외친 미개한 민족의 교화라는 미사여구가 허구라는 점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수탈을 자신들의 표현방식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란 점이다.

그렇기에 이 글의 저자 역시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의 삶의 방식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무럽 오에 겐사부로의 내한 강연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였다. 오에 겐사부로는 한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일본 수상 고이즈미의 '마음의 자유'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마음의 자유라는 것은 '좀 더 소중한 것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음의 자유는 이웃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실천'을 위해 쓰여져야만 한다고 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이란 책은 바로 오에 겐사부로가 말한 모든 일본인들의 '마음의 자유'대한 방대한 자료 모음집인 것이다.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은 순전히 그들만의 몫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역시 그 반의 숙명을 언젠가는 벗어버려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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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20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자유라는 것은 '좀 더 소중한 것에 사용'하는 것이라는
오에 겐자부로의 말이 와닿네요.
잘 읽었습니다.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 등자와 쟁기가 바꾼 유럽역사
린 화이트 주니어 지음, 강일휴 옮김 / 지식의풍경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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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시니컬한 극작가 볼테르의 '역사란 죽은자가 역사가를 속이는 것'이란 말로 시작되는 이 책은 중세라는 시대를 어떤 각도에서 바라봐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중세 역사 기록의 대부분이 글을 아는 소수의 성직자-정확하게 말하면 수도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기록에는 당연히 성직자들이 바라본 세계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기록을 통해 중세의 다양한 사건과 인물을 만나지만 그것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성직자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라는 점이다. 중세란 참으로 이상한 세계인 것이다. 기사들은 정작 자신을 위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성직자들의 목소리만이 중세의 대부분을 관통하고 있다. 중세 말이 되어서야 상인, 제조업자, 기술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기술하기 시작했고, 농민은 가장 늦게 자신들의 모습을 글로 기록하였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 중세를 지배한 목소리는 성직자들을 통해 본 가상의 소리였다.

그렇다면 수도자들이 기록한 중세의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교회사를 중심으로 중세를 바라볼 때 중요한 사건은 피핀, 샤를마뉴, 십자군운동과 같은 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역사적 순서를 밟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피핀과 샤를마뉴의 군사적 원동력이 되었던 기사계급을 가능하게 했던 기술적 측면의 역사-등자-는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사적으로 볼 때 등자가 일반화되어서야 비로서 말이 완벽한 전투기계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등자가 없는 말은 전투의 보조수단으로만 이용되었을 뿐이다.  등자의 등장은 말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누었고, 말을 가진 자는 좀더 많은 권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결과 등자는 편리함이란 기능적인 측면을 떠나 사회계급의 분화라는 정치, 경제적인 의미로 확대재생산되었던 것이다.

쟁기 역시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다. 남유럽과 북유럽의 상이한 지형으로 로마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던 가벼운 쟁기가 북부유럽에서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좀더 무거운 쟁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무거운 쟁기를 끌기 위해 소와 말이란 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들 가축에게 쟁기를 끌게하기 위해서는 마구의 개량이 필요하였다. 결국 무거운 쟁기를 사용하기 위해 시작된 기술적 개량의 역사는 쉽게 말하면 부르조아지의 탄생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는 점이다. 무거운 쟁기를 끌기 위해서는 굳이 둠즈데이 북을 펼칠 필요도 없다. 무거운 쟁기는 보통 4마리 혹은 8마리의 말이 필요하였다. 이는 일반 농민들이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쟁기를 가진 자는 그 마을의 유력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은 농사용 말과 전투용 말을 소유하는 계급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그 지역의 지배계급-기사-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쟁기뿐만이 아니라 물레방아와 맷돌까지도 자신들의 소유로 함으로서 한 지역의 경제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결국에는 정치적인 지배자의 위치에 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등자와 쟁기로 일어선 계급은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무식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글을 제대로 쓸 줄 몰랐고 예의라는 것도 알지 못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수도자들의 눈으로 볼 때 힘을 가진 야만인과 거의 진배없었다. 그러기에 수도자들의 기록에서 이들은 로마시대 이래 유지되어 왔던 화려한 문명을 깍아먹는 집단으로 매도되기 일수였다. 이 결과 중세의 무지와 야만이라는 신화가 아이러니하게도 수도자들을 통해 확산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수도자들의 이런 고정되고 편협한 시각은 전반적으로 중세의 시스템이 로마와 근대 사이에 끼어 있는 조악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근대주의자들 역시 반종교적인 입장에서 이를 마음껏 활용하였기 때문에 중세는 암흑의 시대로 혹은 등을 돌려야할 시대로 매도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세는 종교의 시대였기에 가능한 또 다른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상의 측면이라는 점이다. 종교적 상상은 신에 대한 환시-아빌라의 데레사, 갈멜산의 요한, 빙겐의 힐데가르트, 피오레의 요아킴 등등-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천년왕국과 수많은 이단(?)-과 경제적측면에서 활발하게 작동하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종교, 사회적인 측면의 중세적 상상력은 어느 정도 알 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의 상상력은 거의 알고 있지 못하다. 막연히 삼포제로 알고 있는 중세의 농업방식이라든가 수평식 물레방아가 어떻게 수직식으로 바뀌었는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 특히 물레방아의 이용은 중세의 가장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이 물레방아를 이용함으로서 중세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력과 축력을 배제한 동력을 얻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물레방아는 중세인들의 창안품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세인들은 기존의 물레방아를 자신들에게 맞게끔 끊임없이 변형시켰다. 이로인해 중세인들은 인력과 축력이 배제된 새로운 동력원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로저 베이컨의 글로 장식되어 있다. '단 한 사람이 거대한 배이 키를 잡고, 여러 사람이 노를 젓는 배보다 빨리 달리 수 있는 기계가 가능할 것이다. 가축을 사용하지 않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마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새처럼 날개를 펄럭이는 비행기를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이나 바다 밑으로 다니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로저 베이컨은 이런 상상을 1260년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중세 기술자들의 자신감이기도 했다.

즉 등자로 시작되어 물레방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학적 발전은 중세인들이 결코 종교적 상상력 속에서만 칩거하고 있지 않았다는 생생한 증거이면서 인간의 사고는 결코 붙잡아맬 수 있는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蛇足: 이 책을 읽으려면 무려 반이 넘는 각주各註와 씨름해야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 무수한 각주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등자와 쟁기, 물레방아라는 단순한 것이 어떻게 중세를 변화시킨 원동력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아울러 서양의 역사학회의 저력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이렇게 단순한 것에 대해 이렇게 엄청난 논문이 작성되었다는 그 자체가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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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6-05-0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마냥 화창합니다.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오.

인간아 2006-05-0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도 훌쩍 지나 여름에야 뵙습니다. 내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푸르른 소식이라 반갑습니다.

dohyosae 2006-05-08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마님도 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기를, 감사합니다.
운빈현님 언제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데르수 우잘라 -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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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러시아와 청 제국 사이에 아이훈조약을 체결하였다. 러시아는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을 통해 아무르와 연해주의 광대한 지역을 획득하였다. 이 지역은 대표적인 전인미답 지역으로 20세기 초까지도 태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 역시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지역의 상세한 지리적 정보를 알기 위해 무수한 탐험대를 파견하였다. 이들 탐험대들은 자연히 이 지역을 잘 아는 원주민들을 길 안내로 삼아 탐험을 하였다. 이 책 역시 데르수 우잘라라는 나나이족-러시아어로는 고리드족-의 이야기를 앞에 내세우고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시호테 알린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얻기 위한 탐험이었다. 그래서 이 책 곳곳에는 식생이라든가 지형의 이름이 무수히 등장한다.

데르수 우잘라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등장한다. 자연을 물질로 보는 사람과 인격으로 보는 사람이 그것이다. 문명인들은 자연을 물질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들에게는 산의 높이나 강의 깊이와 넓이가 중요한 기록으로 여겨지고, 자원의 분포를 알기 위한 암석 채취가 중요하다. 반면 자연을 인격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문명인들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때는 불경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들이 느끼는 자연의 불경이란 자연을 인격으로 보는 한에서 어렵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욕적인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자연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자연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자연에서 모든 것을 얻지만 그것은 자연이 허용하는 만큼만 취한다. 그 이상 취한다면 자연이 고통스러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러시아 이주민과 중국인 그리고 조선인들은 자연을 무참하게 파괴하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농업적 특성을 지니는 조선인들의 화전 경작은 이 지역 원주민들에게는 대재앙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은 막연히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고생했다는 사실과 겹쳐져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 자연의 모든 것을 인격으로 대하는 데르수 우잘라의 사고방식을 현대의 감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연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자연과 일치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자연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아니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고통과 기쁨을 자연이 함께 어루만져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가혹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공정하다는 점이다. 문명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용하는 한에서만 유익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뿐이다. 문명인들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자연은 야만이며 악몽이다. 하지만 데르수 우잘라에게 규율화된 문명이 더 야만스럽게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문명의 사회에는 행동을 제약하는 규칙이 존재하지만 자연에서는 행위를 제약하는 규칙은 없다. 오로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만이 존재한다.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면 자연 역시 인간에게 삶의 축복을 내릴 뿐이다. 이 단순한 법칙은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격적인 관계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은 문명이 야만을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문명이 야만을 상대로 싸운 적이 있는가? 오직 일방적인 파괴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진정한 승리일까? 데르수 우잘라는 자연에서 문명으로 다시 문명에서 자연으로 돌아갔다가 잠자는 가운데 백인들에게 살해되었다. 데르수 우잘라의 죽음이 바로 우리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문명과 자연의 투쟁의 모습인 것이다. 자연은 언제부턴가 깊은 잠 속에 빠져들어 있다. 그리고 결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지 두렵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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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사기극 - 헨젤과 그레텔의 또 다른 이야기
한스 트랙슬러 지음, 정창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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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추악한 어른들의 세계를 감추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동화에 나오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 예를 들자면 '백설공주'에서 언뜻 드러나는 아이의 유기,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보이는 아이들의 감금의 문제가 그렇다. 물론 이 외에도 동화 속을 산책하다 보면 수많은 잔인한 일들이 언어의 순화를 통해 은폐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동화의 시작을 알리는 '옛날 옛적에...'라는 관용구가 사실은 은폐의 가장 손쉬운 도구라는 점이다. 모든 진실은 이 관용구를 거치게 되면 사실성을 상실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 '옛날 옛적에...'라는 관용구의 뒷편에 뭍혀있는 진실 찾기에 도전한다. 그리고 그 진실 찾기의 대상으로 유명한 그림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을 선택한다. 그리고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 뒷편에 감추어진 진실을 차례 차례 접근해 가며 폭로한다. 그 결과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부셔버린다.

저자는 이 고정관념을 부수기 위해 역사적인 실체와 고고학적 사실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선다. 하지만 그의 접근방식은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림형제가 동화의 내용을 채록할 시기에도 이야기에 대한 진실성은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진실이 왜곡. 변형된 것은 그림 형제가 채록한 이야기를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뭍혀버린 진실은 그림 동화 속의 내용을 말 그대로 동화로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림 형제가 채록한 이야기를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사소한 진실을 남겨두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즉 그림 형제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무시해도 될 성질의 것이었지만 후대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들어가는 열쇠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책의 원 제목은 'Die Wahrheit uber Hansel und Gretel'이다.  번역서의 '황홀한 사기극'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 번역제목과 원서의 제목도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는 사실이다. 원서의 제목은 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 저 편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면, 번역서의 제목은 그림 형제의 의도를 이야기하고 있는것 처럼 보여진다.

어찌되었든 이 책은 우리들에게 고정관념이 붕괴되는 그 지점을 보여준다.  바로 사고의  '그라운드 제로'를는알려준다. 이곳은 과거의 모든 기억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면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 공허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시각을 통해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점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동화 고고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그라운드 제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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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에 도전한다
캐서린 A.맥키넌 지음 / 개마고원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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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미국에서는 앞으로 영화산업계에 큰 파장을 가져올 영화가 한 편 상영된다. 제목은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린다 러브레이스Linda Lovelace의 성은 매우 의미심상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영화는 그동안 막연한 가능성만을 보여주었던 포르노  영화를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작자들은 가장 적은 제작비로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이 영화 이후 포르노 영화는 산업이 되었다. 게다가 80년대 비디오의 등장은 포르노를 8밀리 영사기로 돌려야하는 번거로움까지 제거함으로서 극장에서 안방으로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다. 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이제 포르노는 신기한 것이 아니라 아주 흔하게 널려있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아니 남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포르노에 열광하는 것일까? 도대체 포르노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포르노에 대해 현학적인 말을 많이 했지만 성행위의 직접적인 실현을 보여주는 화면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만큼 포르노가 겉과 안의 모습이 다른 것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포르노를 반대하는 자들은 곧잘 폭력 영화의 예를 든다. 폭력성이 짙은 영화를 보고 자란 아이는 폭성력을 지닌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포르노를 보며 자란 아이들은 결국 성폭행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포르노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이다. 포르노처럼 하찮은 쓰레기를 규제한다면 그 어떤 것도 규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모든 표현의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쓰레기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두 상반된 견해는 포르노를 이해하는데 아주 피상적인 지식만을 제공할 뿐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포르노는 그렇게 간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포르노는 이런 고답적인 논쟁의 위치에서 바라본다면 허위와 위선의 맛만을 볼 뿐이다. 포르노는 이런 상태보다 더 아래에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불평등한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르노의 주 시청 대상이 남자들이라는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남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포르노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비록 화면에서이지만 그것은 포르노를 처음 접한 성적 초년병들에게는 깊은 각인을 새겨준다. 이런 불평등의 잔상은 심층 깊숙한 곳에 자리잡게되고 평소에는 결코 돌출되지 않다가 이성이 느슨해지는 순간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들은 영화로 표현된 것을 그대로 흉내냈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이 아니라 영화의 화면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머리를 뉴욕 타임스 1992년 8월 17일자의 기사로 시작한다. 여기서 저자는 길거리에서 한 여자가 칼에 찔려 죽어가는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십 수명이  '죽여, 죽여버려'라고 소리쳤는데 이들을 살인방조와 교사혐의로 수배 추적중이라는 기사였다. 저자는 이 상황을 대낮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강간사건으로 바꿔 우리에게 보여준다. 만약 강간범을 둘러 싸고 있던 십 수명의 군중들이 '따먹어, 따먹어'라고 외쳤다면 이들은 강간에 가담한 사람이 아닐까? 혹자들은 단지 말일 뿐only wards이라고 항변하겠지만 죽이라고 외친것과 따먹으라고 외친것의 차이는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포르노를 보는 것은 그 영화에 나온 모든 상황을 긍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 아닐까.

린다 러브레이스는 <목구멍 깊숙이>라는 영화를 찍은 한참 뒤에 글로리아 스타이넘 과의 대담에서 그때의 경험이 좋지 않았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녀는 모든 것이 열려있는 공간에서 성행위를 한다는 그 자체가 정말로 수치스러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기구를 이용한 촬영에서는 인간적인 모욕을 느꼈으며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였다. 과연 한 인간의 인격성이 마멸되어가는 과정을 찍어대는 것이 진정한  "표현의 자유"일까? 

포르노는 일종의 법률처럼 되어 가고 있다. 포르노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이 실제로 여성들에게 강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사실 수백 년 간 여성의 삶은 포르노의 삶이었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을 여성들이 말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다를 뿐인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남성적 이데올로기가 "진실을 희생시켜 추상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곡해는 인종적인 편견과 법률적인 것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포르노는 남녀의 불평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에 대한 이런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법률 속의 남녀 평등은 하나의 문장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포르노의 문제는 불평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는한 포르노는 여전히 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존재하게 될 것이다.

가끔 섹스 중에 그와 나는 힘 겨루기를 한다. 힘으로 치자면 물론 그에게 당할 재간이 없지만 그래도 쉽게 ‘뒤집어’지지 않으려고 등으로 모든 힘을 모은다. 나는 정상위, 그러니까 얼굴을 마주보며 키스도 할 수 있는 그런 자세가 가장 안정적이고 좋다. 그의 등도 힘껏 안을 수 있고. 하지만 남편은 처음엔 ‘정상’적으로 잘 나가다가 은근슬쩍 뒤집으려고 한다. 뒤로 하고 싶은 거다. 그의 말로는 뒤로 하면 그의 성감대라는 페니스 시작 부근의 언저리가 엉덩이에 강하게 마찰되어 쉽게 ‘오르는’데다가 그의 양손이 내 가슴을 안을 수 있어 좋다고. 그러나 나는 뒤집히기가 싫다. 뒤집혀 그에게 엉덩이를 허락하고 있노라면 나는 거대한 구멍 같다. 그의 열정을 위한 구멍. 무언가를 느끼고 못 느끼고를 떠나서 그 자세 자체가 비굴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체력적으로 그 자세는 매우 힘들다. 힘든 내색을 하면 그는 다시 뒤집어주는 아량을 베풀지만, 불판 위의 고기도 한 번씩만 뒤집혀야 육즙이 살아있다는데 그렇게 몇 번 뒤집히다보면 하기 싫다. 아예 뒤집어 뒤로 시작하자고 할 때는 말한다. 죽어도 그건 싫다고. (이 마지막 글은 GQ KOREA.COM  '즐겁고 달콤한 섹스 스터디' 가운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문제가 되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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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2005-12-1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의 다큐가 곧 개봉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늘 그렇듯, 알찬 정보, 깊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겨울 몸 건강히 잘 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