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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 군인에서 상인 그리고 게이샤까지
다카사키 소지 지음, 이규수 옮김 / 역사비평사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식민지植民地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의 영토 확장의 결과로 얻는 영토나 또는 그 세력 범위 안에 있는 보호국에 대하여 식민을 행하는 토지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식민植民이란 단어는 국민의 한 부분을 제 나라 밖의 토지 또는 제 나라와 정치적 종속 관계를 가진 토지에 영주永住의 목적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식민지란 어떤 나라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주인 행세를 하는 땅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사전적 정의에 대한 확실한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일제 36년의 지배라는 등식에 익숙해져 있지만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조선-대한제국-은 1875년 운요호雲揚號사건 이후 일본인이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가 36년이 아니라 무려 70여년에 걸친 수탈의 역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수탈의 역사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남에서 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수탈의 역사 속에는 어떤 인간적인 교감이 있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에게나 조선인들에게나 좋은 일본인, 좋은 조선인은 어쩌면 '죽은'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적 교감이 없는 민족간의 교류는 공허한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인들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굳이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마치 나치 독일에서 독일인들이 화창한 날 뿌옇게 내리는 '회색빛 재의 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서 한반도 건너온 사람들의 부류는 낭인浪人에서부터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일본의 한국 강점에 대한 불합리성을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불평등 속에서 심화된 삶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점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이 결과 일본인들은 조선 혹은 조선인은 교화되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일본의 시각은 서구 식민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필연적 운명'이란 단어와 너무나 유사한 것이라 하겠다. 서구 유럽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을 대상으로 삼은 반면 일본은 한국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일본인들의 이런 행태는 서구 유럽이 아프리카에서 행하던 삶의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교화가 아니라 주인으로 행세하는 식민주의자의 변태적 변형이 일본인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들만의 거주지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결국 이들 일본인들의 이러한 삶은 자신들이 외친 미개한 민족의 교화라는 미사여구가 허구라는 점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수탈을 자신들의 표현방식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란 점이다.
그렇기에 이 글의 저자 역시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의 삶의 방식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무럽 오에 겐사부로의 내한 강연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였다. 오에 겐사부로는 한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일본 수상 고이즈미의 '마음의 자유'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마음의 자유라는 것은 '좀 더 소중한 것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음의 자유는 이웃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실천'을 위해 쓰여져야만 한다고 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이란 책은 바로 오에 겐사부로가 말한 모든 일본인들의 '마음의 자유'대한 방대한 자료 모음집인 것이다.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은 순전히 그들만의 몫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역시 그 반의 숙명을 언젠가는 벗어버려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