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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수 우잘라 -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1858년 러시아와 청 제국 사이에 아이훈조약을 체결하였다. 러시아는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을 통해 아무르와 연해주의 광대한 지역을 획득하였다. 이 지역은 대표적인 전인미답 지역으로 20세기 초까지도 태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 역시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지역의 상세한 지리적 정보를 알기 위해 무수한 탐험대를 파견하였다. 이들 탐험대들은 자연히 이 지역을 잘 아는 원주민들을 길 안내로 삼아 탐험을 하였다. 이 책 역시 데르수 우잘라라는 나나이족-러시아어로는 고리드족-의 이야기를 앞에 내세우고 있지만 본질적인 것은 시호테 알린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얻기 위한 탐험이었다. 그래서 이 책 곳곳에는 식생이라든가 지형의 이름이 무수히 등장한다.
데르수 우잘라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등장한다. 자연을 물질로 보는 사람과 인격으로 보는 사람이 그것이다. 문명인들은 자연을 물질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들에게는 산의 높이나 강의 깊이와 넓이가 중요한 기록으로 여겨지고, 자원의 분포를 알기 위한 암석 채취가 중요하다. 반면 자연을 인격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문명인들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때는 불경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들이 느끼는 자연의 불경이란 자연을 인격으로 보는 한에서 어렵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욕적인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자연을 인격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자연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자연에서 모든 것을 얻지만 그것은 자연이 허용하는 만큼만 취한다. 그 이상 취한다면 자연이 고통스러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러시아 이주민과 중국인 그리고 조선인들은 자연을 무참하게 파괴하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농업적 특성을 지니는 조선인들의 화전 경작은 이 지역 원주민들에게는 대재앙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은 막연히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고생했다는 사실과 겹쳐져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 자연의 모든 것을 인격으로 대하는 데르수 우잘라의 사고방식을 현대의 감각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연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자연과 일치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자연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아니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고통과 기쁨을 자연이 함께 어루만져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은 가혹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공정하다는 점이다. 문명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용하는 한에서만 유익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뿐이다. 문명인들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자연은 야만이며 악몽이다. 하지만 데르수 우잘라에게 규율화된 문명이 더 야만스럽게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문명의 사회에는 행동을 제약하는 규칙이 존재하지만 자연에서는 행위를 제약하는 규칙은 없다. 오로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만이 존재한다.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면 자연 역시 인간에게 삶의 축복을 내릴 뿐이다. 이 단순한 법칙은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격적인 관계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은 문명이 야만을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문명이 야만을 상대로 싸운 적이 있는가? 오직 일방적인 파괴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진정한 승리일까? 데르수 우잘라는 자연에서 문명으로 다시 문명에서 자연으로 돌아갔다가 잠자는 가운데 백인들에게 살해되었다. 데르수 우잘라의 죽음이 바로 우리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문명과 자연의 투쟁의 모습인 것이다. 자연은 언제부턴가 깊은 잠 속에 빠져들어 있다. 그리고 결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지 두렵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