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에 도전한다
캐서린 A.맥키넌 지음 / 개마고원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1972년 미국에서는 앞으로 영화산업계에 큰 파장을 가져올 영화가 한 편 상영된다. 제목은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린다 러브레이스Linda Lovelace의 성은 매우 의미심상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영화는 그동안 막연한 가능성만을 보여주었던 포르노  영화를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작자들은 가장 적은 제작비로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이 영화 이후 포르노 영화는 산업이 되었다. 게다가 80년대 비디오의 등장은 포르노를 8밀리 영사기로 돌려야하는 번거로움까지 제거함으로서 극장에서 안방으로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다. 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이제 포르노는 신기한 것이 아니라 아주 흔하게 널려있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아니 남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포르노에 열광하는 것일까? 도대체 포르노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포르노에 대해 현학적인 말을 많이 했지만 성행위의 직접적인 실현을 보여주는 화면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만큼 포르노가 겉과 안의 모습이 다른 것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포르노를 반대하는 자들은 곧잘 폭력 영화의 예를 든다. 폭력성이 짙은 영화를 보고 자란 아이는 폭성력을 지닌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포르노를 보며 자란 아이들은 결국 성폭행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포르노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이다. 포르노처럼 하찮은 쓰레기를 규제한다면 그 어떤 것도 규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모든 표현의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쓰레기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두 상반된 견해는 포르노를 이해하는데 아주 피상적인 지식만을 제공할 뿐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포르노는 그렇게 간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포르노는 이런 고답적인 논쟁의 위치에서 바라본다면 허위와 위선의 맛만을 볼 뿐이다. 포르노는 이런 상태보다 더 아래에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불평등한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르노의 주 시청 대상이 남자들이라는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남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포르노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비록 화면에서이지만 그것은 포르노를 처음 접한 성적 초년병들에게는 깊은 각인을 새겨준다. 이런 불평등의 잔상은 심층 깊숙한 곳에 자리잡게되고 평소에는 결코 돌출되지 않다가 이성이 느슨해지는 순간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들은 영화로 표현된 것을 그대로 흉내냈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이 아니라 영화의 화면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머리를 뉴욕 타임스 1992년 8월 17일자의 기사로 시작한다. 여기서 저자는 길거리에서 한 여자가 칼에 찔려 죽어가는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십 수명이  '죽여, 죽여버려'라고 소리쳤는데 이들을 살인방조와 교사혐의로 수배 추적중이라는 기사였다. 저자는 이 상황을 대낮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강간사건으로 바꿔 우리에게 보여준다. 만약 강간범을 둘러 싸고 있던 십 수명의 군중들이 '따먹어, 따먹어'라고 외쳤다면 이들은 강간에 가담한 사람이 아닐까? 혹자들은 단지 말일 뿐only wards이라고 항변하겠지만 죽이라고 외친것과 따먹으라고 외친것의 차이는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포르노를 보는 것은 그 영화에 나온 모든 상황을 긍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 아닐까.

린다 러브레이스는 <목구멍 깊숙이>라는 영화를 찍은 한참 뒤에 글로리아 스타이넘 과의 대담에서 그때의 경험이 좋지 않았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녀는 모든 것이 열려있는 공간에서 성행위를 한다는 그 자체가 정말로 수치스러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기구를 이용한 촬영에서는 인간적인 모욕을 느꼈으며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였다. 과연 한 인간의 인격성이 마멸되어가는 과정을 찍어대는 것이 진정한  "표현의 자유"일까? 

포르노는 일종의 법률처럼 되어 가고 있다. 포르노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이 실제로 여성들에게 강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사실 수백 년 간 여성의 삶은 포르노의 삶이었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을 여성들이 말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다를 뿐인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남성적 이데올로기가 "진실을 희생시켜 추상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곡해는 인종적인 편견과 법률적인 것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포르노는 남녀의 불평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에 대한 이런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법률 속의 남녀 평등은 하나의 문장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포르노의 문제는 불평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는한 포르노는 여전히 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존재하게 될 것이다.

가끔 섹스 중에 그와 나는 힘 겨루기를 한다. 힘으로 치자면 물론 그에게 당할 재간이 없지만 그래도 쉽게 ‘뒤집어’지지 않으려고 등으로 모든 힘을 모은다. 나는 정상위, 그러니까 얼굴을 마주보며 키스도 할 수 있는 그런 자세가 가장 안정적이고 좋다. 그의 등도 힘껏 안을 수 있고. 하지만 남편은 처음엔 ‘정상’적으로 잘 나가다가 은근슬쩍 뒤집으려고 한다. 뒤로 하고 싶은 거다. 그의 말로는 뒤로 하면 그의 성감대라는 페니스 시작 부근의 언저리가 엉덩이에 강하게 마찰되어 쉽게 ‘오르는’데다가 그의 양손이 내 가슴을 안을 수 있어 좋다고. 그러나 나는 뒤집히기가 싫다. 뒤집혀 그에게 엉덩이를 허락하고 있노라면 나는 거대한 구멍 같다. 그의 열정을 위한 구멍. 무언가를 느끼고 못 느끼고를 떠나서 그 자세 자체가 비굴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체력적으로 그 자세는 매우 힘들다. 힘든 내색을 하면 그는 다시 뒤집어주는 아량을 베풀지만, 불판 위의 고기도 한 번씩만 뒤집혀야 육즙이 살아있다는데 그렇게 몇 번 뒤집히다보면 하기 싫다. 아예 뒤집어 뒤로 시작하자고 할 때는 말한다. 죽어도 그건 싫다고. (이 마지막 글은 GQ KOREA.COM  '즐겁고 달콤한 섹스 스터디' 가운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문제가 되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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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2005-12-1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의 다큐가 곧 개봉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늘 그렇듯, 알찬 정보, 깊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겨울 몸 건강히 잘 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