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집짓기 - 경이로운 동물들의 건축술과 생존전략
완다 쉽맨 지음, 문명식 옮김 / 지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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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집짓기라는 이 책을 읽으며 "대성당의 비밀"이란 만화가 떠올랐다. 장 클로드 갈의 그림이 인상적인 이 만화에서 대주교는 아르쉬텍트라는 성주가 방어하는 성을 공략하려고 한다. 이 전쟁으로 대주교의 부하들 뿐만 아니라 아르쉬텍트의 백성들도 고생한다. 결국 대주교의 장기전에 지친 아르쉬텍트는 백성들의 안전을 보장받고 항복한다. 이 자리에서 아르쉬텍트에게 대주교는 자신이 전쟁을 한 것은 아르쉬텍트의 솜씨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고 말을 한다. 성을 축성하는데 천재적인 솜씨를 가지고 있던 아르쉬텍트의 재능이 고통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백성들은 대주교의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역에 동원되고 그 강제노역이 길어지면 질수록 백성들은 전쟁에서 죽지 못한 것을 원망한다. 결국 오랜 세월이 흘러 아르쉬텍트는 대주교를 위하여 물에 뜬 거대한 성을 완성한다. 그 완성의 날 아르쉬텍트는 대주교에게 물에 뜬 성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중량과 평형"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쉬텍트는 이 신비스럽고 거대한 성이 무너지는 것은 "인간의 허영심"이라고 말한다. 그 오묘한 균형의 불균형 속에서 물 위에 뜬 성은 무너져 내려 호수에 잠긴다.

어쩌면 대주교가 완성하여 천년 만년을 살고자 하였던 물에 뜬 성은 인간이 욕망하는 집의 항구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물들의 집은 이런 허영심과는 거리가 멀다. 동물들에게 집은 천년 만년을 지내야하는 항구적인 곳은 아니다. 이들에게 거처는 육아를 위한 장소이면서 비바람을 피해주는 장소일 뿐이다. 이들에게 집은 항구성이라기 보다는 언젠가 떠날 곳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구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집보다 임시성이 강한 동물의 집이 더 과학적이며 자연친화적이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은 자연을 끊임없이 모방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 자연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한 자체가 문명이란 이름으로 우상화된다는 것이다. 반면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것은 문명과 멀어지는 세계로 인식된다.

파스칼은 우주의 물 한 방울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지만, 인간이 이 우주의 물 한 방울보다 위대한 것은 그 사실을 자각하느냐 않느냐의 차이라고 하였다. 자연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알 지 못하지만 인간은 자신들이 당하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물들의 집 역시 이들 동물들은 왜 그렇게 지어져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이들은 자연의 유전자 프로그램에 의해 반복적으로 그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단순한 동물의 행위를 데이터로 변형시켜 자신들의 건축에 응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조화이다. 동물들은 아마도 이 지상에서 소멸되는 순간까지 자신과 자연을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인식하며 생존할 것이다. 이들 동물들은 자연이 멈추는 순간 자신들 역시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반면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 혹은 타협을 하기 보다는 무자비하게 정복하려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얻은 수 많은 정보와 지식을 이용해 자연과 타협하고 공존하려하기 보다는 자연을 지배하고 그 위에서 자신들이 조종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자연의 붕괴도 과학이라는 만능의 열쇠로 복구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은 자연이 몰락한 그 자리에 자신들의 묘비명이 세워질 것이란 것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성을 중량과 평형으로 유지하기 보다는 허영심으로 붕괴시키려 하는 것이다. 동물들의 집짓기는 이 허영심에 대한 소박한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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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리처드 루드글리 지음, 우혜령 옮김 / 뜨인돌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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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럽사에 등장하는 야만인은 훈족-여기에는 고트족도 포함된다, 게르만족, 바이킹이 대표적이다. 이들 야만족들은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철저하게 "악의 화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자비함과 흉폭함 그리고 무지함이 뒤섞여있는듯한 관찰자의 기록은 공정하기 보다는 피해자의 시각에서 본 '만약에'라는 가정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들 야만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은 이들은 정복자이면서도 그것을 기록할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피정복자의 문자로 자신들의 업적을 기록한다고 해도 그것은 한정된 기록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유럽사에서 일정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들 야만족들은 기록을 남기지 못한 대신 유물을 남겼다. 그래서 유럽 각지에서 발굴되는 이들 야만족들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이들의 삶과 역사적 기록의 진위여부를 판별해야만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이 유물을 통해  바라본 야만족들은 결코 '야만족'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이 활약한 시기인 5세기에서부터 10세기에 걸친 기간이 야만의 시대였고 암흑의 시대였을 뿐이다. 즉 이들 야만인들은 그러한 시대에 활동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야만인 대접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어느 순간부터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떠올릴때면 원시성이란 상상에 사로잡힌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인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이 케나의 나이로비의 나이트클럽에 모여 코카콜라를 마시며 디스코를 추는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은 흑인이라는 인종을 바라보는데 있어서도 불안전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들이 미국의 흑인을 생각할 때면 미국인이라는 개념보다는 흑인 가운데 그래도 가장 나은 부류 정도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시각 역시 이런 편협된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의 야만인들인 훈족, 게르만족, 바이킹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점이 되는 것이다.

고대 로마가 사라진 유럽의 대륙은 정말로 모든 문명이 사라진 어둠의 땅이었을까? 이런 물음으로부터 유럽의 야만인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대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야만인들은 고대 로마의 경계선 밖에 위치한 사람들이었다. 고대 로마는 라인강과 도나우 강을 지나  카파르티아 산맥을 넘어 흑해에 이르는 장대한 자연적 국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 국경선 안쪽은 문명이고 그 바깥쪽은 야만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었다. 이들 경계선 바깥의 사람들은 로마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삶은 로마인의 입장에서 볼 때 혹은 현대의 눈으로 볼 때 야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거주지며 유물들은 로마의 영향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독자적인 문명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훈족, 게르만족, 바이킹의 야만의 역사는 이들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는 과정이면서 야만인에서 유럽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훈족의 경우 고대 세계를 붕괴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게르만족은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감으로서 중세 유럽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바이킹의 경우 유럽의 주변부를 확장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들의 등장과 확산은 고대 그리스-로마적인 세계에 주변부의 문명이 혼합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전통적인 유럽의 세계관이 주변 세계의 세계관과 합쳐지면서 확장되고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은 종교적 단일성이라는 커다란 장벽에 부딪히게 되면서 주변부의 문명은 그리스도교로 순화되어야할 거친 문명, 혹은 교화될 문명이라고 폄하되면서 다원적 유럽은 단일적 유럽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세 야만인의 기본적 사료는 요르다네스의 게티카Getica,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germania, 이븐 파들란의 여행기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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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환 2008-01-2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들은 어느 순간부터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떠올릴때면 원시성이란 상상에 사로잡힌다."<---- 이 말씀에 동감합니다. 게르만족이나 바이킹, 훈족에 대한 편견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편견이지요. 저는 그 때문에라도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 움베르토 에코의 즐거운 상상 06
움베르토 에코 지음, 안수진 옮김 / 새물결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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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의 눈길을 피해서 스트립 쇼를 보았다. 과연 제대로 보기나 했을까?

스트립 쇼에는 무희와 관객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에코는 바로 이 주도권의 이야기를 스트립 쇼를 통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이런 우스개 소리를 읽은 적이 있다. 집시 로즈-미국의 유명한 스트리퍼-가 기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옷소매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고 한다. 나중에 기자들은 집시 로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시 로즈는 자신의 동작을 통해 기자들을 완전하게 통제하였던 것이다. 거기에 모인 기자들은 집시 로즈의 동작 하나에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은  옷소매의 단추를 하나 풀어버리는 것에서 그 다음 동작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칼리굴라나 티베리우스 그리고 스탈린이 인민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예측할 수 없는 공포가 아니라 자신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이 언제라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상상 가능한 예측 때문이었다.

에코는 '릴리 나이아가라'라는 무희를 등장시켜 자신의 스트립 쇼에 대한 이론을 전개 시킨다. 관객들은 스트립 걸의 동작을 보면서 '의심의 씨앗이 뿌려진다'고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관객인 남자는 스트립 걸이 '여자'라면 그의 아내는 여성이 아닌 다른 존재이고, 그의 아내가 '여자'라면 스트립 걸은 분명 아내보다 더한 존재, 예컨대 여성적 원리나 섹스, 황홀경, 죄악, 매력일 거라는 의심이 마음속에 뿌려진다는 것이다. 즉 스트립 걸은 관객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시각의 잔상이 흐려진 다음이다.  이런 반성의 핵심은 스트립 걸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스트립 걸은 하나의 신기루 혹은 잔상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트립 걸은 관객들에게 하나의 욕망을 심어준다. 보는 것과 만지는 것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정치는 끊임없이 의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정치에 확신이 개입하게 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정치가들은 목전의 현실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저 멀리 있는 무지개 혹은 신기루에 대중들이 몰입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갈등이 고조된다. 나의 여자는 내가 만질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여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서 스트립 걸의 상상을 맛볼 수 없다. 반면 자신의 시각 속에 존재하는 '여자'에게서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상'일 뿐이다. 즉 스트립 쇼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들에게 보는 상상은 허용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게 하는 것 뿐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스트립 쇼를 통해 억압과 타율이 존재하는 사회의 실제적 현실 속에서 플라토닉한 사랑을 꿈꾸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상황으로 흘러간다. 상황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은 정치적 통제권이란 것이다. 과연 정치적 통제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서 로마 시대 황제들이 왜 빵과 서커스에 집착했는지를 알게 된다. 빵과 서커스는 어찌보면 만질 수 없는 스트립퍼 즉 보는 스트리퍼의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스트립 쇼를 보는 관객들은 보는 것을 통해 기존의 질서 속에 붙박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즉 상상은 끝난 것이다. 이제 현실 속의 '여자'를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리도에서 본 크레이지 호스 쇼의 쇼걸들의 이미지는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크레이지 호스 쇼에서 마지막 순간 스트립걸은 모든 것을 벗어 던진다. 그리고 그녀의 체모體毛가 드러난다. 하지만 이 체모 역시 그렇게 보이도록 부착한 인공적인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만족하며 문을 나서는 그 순간 또 한번의 기만에 뒷통수를 얻어 맞는 것이다. 우리 세계에 대한 통찰. 그것은 어쩌면 이런 허위와 기만을 벗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는 이런 짤막한 글이 무려 17편이나 들어있다. 그 하나 하나에 이런 해석이 덧붙여져야 한다는 점에서 세상을 엿본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에코가 가끔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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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 반 룬 전집 3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이혜정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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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정서가 "중용中庸"이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면 서양의 정서는 "관용寬容"이란 단어에 응축되어 있다. 관용의 사전적 정의의 '너그럽게 용서하다'라고 되어 있다. 반면 중용은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고 되어 있다. 이 두 핵심적 용어를 보더라도 동양과 서양이 추구한 길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들이 추구한 단어를 그대로 시행했던 적은 없었다. 서양은 끊임없이 관용을 부르짖으면서도 반대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멈추지 않았고, 동양은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파당을 만들지도 않는 것이 가장 숭고한 것임에도 파당으로 붕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관용이란 단어와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저자가 수없이 강조하는 것처럼 '즐거운 타협은 비겁함에서 나온 비열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불관용은 자신의 순수함만을 강조할 때 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 룬은 "간단히 말해, 세상에 유용한 물건들은 모두 합성된 것들이다. 나는 신념만 예외가 되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확신'이 그 가반에 적정량의 '의심'이라는 합금을 함유하지 않는 한, 산념은 순수한 은으로만 된 종처럼 서투른, 혹은 순수한 동으로만 만든 나팔처럼 거친 소리를 낼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즉 관용을 실천한 역사의 소수는 이런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역사 속의 수많은 관용과 불관용을 여기서는 언급하고 있다. 제네바의 칼뱅이나 스피노자, 태양왕 루이 14세와 프리드리히 대제와 같은 사람들의 삶을 언급하면서 관용과 불관용이 가져온 결과를 이야기 하고 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부르봉 왕가를 창시한 앙리 4세의 손자였다. 그는 태양왕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과시했지만 할아버지 앙리 4세가 기초해 놓은 가톨릭과 위그노가 함께하는 프랑스를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관용을 불관용으로 바꾼 그 순간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고 자신의 5세손인 루이 16세의 사형집행장에 도장을 찍은 것이라고 보고있다. 반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는 빈약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종교에 관계없이 자신의 왕국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상업활동에 종사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프로이센으로 프랑스의 위그노와 유대인, 청교도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이들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는 한 무제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이 결과 그 손자 대에 이르러 프로이센은 유럽의 막강한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 룬은 관용의 경제적 측면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제네바의 칼뱅이나 볼테르와 같은 인물을 통해 자행된 권력의 불관용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 불관용의 세계는 숨막히는 세계인 것이다. 불관용은 금지의 세계이다. 무엇 무엇을 하지말라는 금지는 죄악을 몰아낼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미덕을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미덕은 내면의 설득을 통해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관용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내면의 설득을 위해 훌륭한 학문의 전당을 만들고-왜 유럽에 그렇게 많은 대학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모든 종류의 학문을 젊은이들이 골고루 흡수하도록 장려하였다.

관용은 자유와 같은 것이라고 반 룬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요구만 해서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밤새도록 불침번을 서면서 돌보아야만 관용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관용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은 하나의 세계로 경도된 세계 속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관용은 언제나 광풍의 회오리가 지나간 뒤에야 드러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황혼녁에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 오르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숨어있던 관용이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 우리들 모두는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지 못하는가? 우리는 같은 별을 바라보며, 같은 행성 위에 있는 동료 여행자들로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다. 각 개인들이 궁극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 어떤 길을 따라가는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 해답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여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너무나 크다"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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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직업 잔혹사 - 문명을 만든 밑바닥 직업의 역사
토니 로빈슨.데이비드 윌콕 지음, 신두석 옮김 / 한숲출판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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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얼마 전에 읽은 "영국 민중사"를 떠올리게 한다. 시대적 구분이라든가, 역사에서 그리 조명을 받지 못한 기층민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국 민중사의 저자인 J.F.C. 해리슨은 왜 민중의 역사를 기술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다. "역사가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이 세계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 또한 말미에 "우리는 여러 시대에 걸친 최악의 직업들을 담당한 그 모든 얼굴 없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바로 우리 세계를 형성시킨 주인공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결국 "불량직업 잔혹사"는 우리의 삶과 연관되어 있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형성시킨 것에 대한 보고서인 셈이다.

이 책은 유럽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잉글랜드라는 섬에 국한시키고 있다. 바로 이 고립된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오히려 불량직업의 가혹함을 전달하는데 더 효과적이란 점이다. 이 책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은 거의 다 망라되어 있다. 그 가혹한 삶의 형태를 읽다보면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유럽사에 대한 단순한 평가를 일시적으로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책은 우리들에게 가려져있던 유럽사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가혹함을 잉글랜드라는 섬에 한정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열악한 직업의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책에 나와있는 직업들은 한결같이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3D직업이란 점이다. 그래서 이런 직업은 자신이 선택하였다기 보다는 삶의 무게에 의해 강요되었던 것이다. 직업선택에 있어서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기층민중들은 오로지 하루의 빵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들이 빵을 얻기 위해 한 생존의 행위는 개별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것이 집단적인 의미로 반전될 때 엄청난 위업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잉글랜드의 철도노동자의 삶은 이런 반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아무도 이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이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삶은 고단했고 고달펐던 것이다.

사실 역사에서 주인공과 조연은 판이한 대접을 받는다. 한 예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부하들은 데르모필레에서 수 만의 페르시아군과 접전을 벌여 모두 전사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곳에는 이들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거느리고 있던 900명의 하인들이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역사에서는 300명의 결사대로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1200명의 군사들-이 가운데 900명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인의 명령에 의해 남겨졌다는 점이다-이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웠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무도 900명의 하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역사의 소외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그들에 관한 기록은 빈약하기 짝이없다.  

이 책은 사회의 기층민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각 시대의 낭만적인 환상을 깨뜨리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영화나 소설을 통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각 시대의 이야기를 접하고 있다. 화면이나 지면을 통해 묘사되는 삶의 방식은 우리들에게 이런 환상을 심어준다. 그들도 사람이었고, 즐거움과 슬픔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재의 우리들 만큼 문명적 혜택을 받지 못했다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본다면 이런 단순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가장 가혹한 직업이라도 ?책의 가장 손쉬운 직업보다 덜 가혹할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과학적 사고로 평가하면서 바라볼 때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현재 브리튼에는 과거의 생활을 그대로 체험해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현대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완벽하게 과거의 모습-의.식.주를 그 당시와 똑같은 방식으로 해결해야만 한다-으로 들어가 생활한다고 한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큰 의미를 체험-이들 역시 완벽하게 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 버티는 것이다-하지만 소수는 적응하지 못해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온다고 한다. 이들 실패자들의 대부분은 그 시대의 삶은 현대보다는 조금 더 가혹한 것, 혹은 야외에서의 거친 캠핑 정도로 생각했고 자신들이 행하는 하나 하나의 행위가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이것은 현대적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우리들이 그 시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저자는 "이 책을 읽을 만큼 시간과 소양을 가졌다는 것은 당신의 삶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될 사람들만큼 힘겹지 않다는 뜻이라는 것이 거의 자명하다"고 말한다. 저자의 이런 말을 고맙다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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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5-10-1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엄청난 제목이군요. 음, 체험프로그램까지. 우리에게 그들은 무얼 원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