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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집짓기 - 경이로운 동물들의 건축술과 생존전략
완다 쉽맨 지음, 문명식 옮김 / 지호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동물들의 집짓기라는 이 책을 읽으며 "대성당의 비밀"이란 만화가 떠올랐다. 장 클로드 갈의 그림이 인상적인 이 만화에서 대주교는 아르쉬텍트라는 성주가 방어하는 성을 공략하려고 한다. 이 전쟁으로 대주교의 부하들 뿐만 아니라 아르쉬텍트의 백성들도 고생한다. 결국 대주교의 장기전에 지친 아르쉬텍트는 백성들의 안전을 보장받고 항복한다. 이 자리에서 아르쉬텍트에게 대주교는 자신이 전쟁을 한 것은 아르쉬텍트의 솜씨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고 말을 한다. 성을 축성하는데 천재적인 솜씨를 가지고 있던 아르쉬텍트의 재능이 고통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백성들은 대주교의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역에 동원되고 그 강제노역이 길어지면 질수록 백성들은 전쟁에서 죽지 못한 것을 원망한다. 결국 오랜 세월이 흘러 아르쉬텍트는 대주교를 위하여 물에 뜬 거대한 성을 완성한다. 그 완성의 날 아르쉬텍트는 대주교에게 물에 뜬 성의 비밀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중량과 평형"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쉬텍트는 이 신비스럽고 거대한 성이 무너지는 것은 "인간의 허영심"이라고 말한다. 그 오묘한 균형의 불균형 속에서 물 위에 뜬 성은 무너져 내려 호수에 잠긴다.
어쩌면 대주교가 완성하여 천년 만년을 살고자 하였던 물에 뜬 성은 인간이 욕망하는 집의 항구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물들의 집은 이런 허영심과는 거리가 멀다. 동물들에게 집은 천년 만년을 지내야하는 항구적인 곳은 아니다. 이들에게 거처는 육아를 위한 장소이면서 비바람을 피해주는 장소일 뿐이다. 이들에게 집은 항구성이라기 보다는 언젠가 떠날 곳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구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집보다 임시성이 강한 동물의 집이 더 과학적이며 자연친화적이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은 자연을 끊임없이 모방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 자연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한 자체가 문명이란 이름으로 우상화된다는 것이다. 반면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것은 문명과 멀어지는 세계로 인식된다.
파스칼은 우주의 물 한 방울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지만, 인간이 이 우주의 물 한 방울보다 위대한 것은 그 사실을 자각하느냐 않느냐의 차이라고 하였다. 자연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알 지 못하지만 인간은 자신들이 당하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물들의 집 역시 이들 동물들은 왜 그렇게 지어져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이들은 자연의 유전자 프로그램에 의해 반복적으로 그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단순한 동물의 행위를 데이터로 변형시켜 자신들의 건축에 응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조화이다. 동물들은 아마도 이 지상에서 소멸되는 순간까지 자신과 자연을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인식하며 생존할 것이다. 이들 동물들은 자연이 멈추는 순간 자신들 역시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반면 인간은 자연과의 조화 혹은 타협을 하기 보다는 무자비하게 정복하려 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얻은 수 많은 정보와 지식을 이용해 자연과 타협하고 공존하려하기 보다는 자연을 지배하고 그 위에서 자신들이 조종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자연의 붕괴도 과학이라는 만능의 열쇠로 복구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은 자연이 몰락한 그 자리에 자신들의 묘비명이 세워질 것이란 것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 인간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성을 중량과 평형으로 유지하기 보다는 허영심으로 붕괴시키려 하는 것이다. 동물들의 집짓기는 이 허영심에 대한 소박한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