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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 움베르토 에코의 즐거운 상상 06
움베르토 에코 지음, 안수진 옮김 / 새물결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의 눈길을 피해서 스트립 쇼를 보았다. 과연 제대로 보기나 했을까?
스트립 쇼에는 무희와 관객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에코는 바로 이 주도권의 이야기를 스트립 쇼를 통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이런 우스개 소리를 읽은 적이 있다. 집시 로즈-미국의 유명한 스트리퍼-가 기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옷소매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고 한다. 나중에 기자들은 집시 로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시 로즈는 자신의 동작을 통해 기자들을 완전하게 통제하였던 것이다. 거기에 모인 기자들은 집시 로즈의 동작 하나에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은 옷소매의 단추를 하나 풀어버리는 것에서 그 다음 동작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칼리굴라나 티베리우스 그리고 스탈린이 인민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예측할 수 없는 공포가 아니라 자신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이 언제라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상상 가능한 예측 때문이었다.
에코는 '릴리 나이아가라'라는 무희를 등장시켜 자신의 스트립 쇼에 대한 이론을 전개 시킨다. 관객들은 스트립 걸의 동작을 보면서 '의심의 씨앗이 뿌려진다'고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관객인 남자는 스트립 걸이 '여자'라면 그의 아내는 여성이 아닌 다른 존재이고, 그의 아내가 '여자'라면 스트립 걸은 분명 아내보다 더한 존재, 예컨대 여성적 원리나 섹스, 황홀경, 죄악, 매력일 거라는 의심이 마음속에 뿌려진다는 것이다. 즉 스트립 걸은 관객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시각의 잔상이 흐려진 다음이다. 이런 반성의 핵심은 스트립 걸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스트립 걸은 하나의 신기루 혹은 잔상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트립 걸은 관객들에게 하나의 욕망을 심어준다. 보는 것과 만지는 것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정치는 끊임없이 의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정치에 확신이 개입하게 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정치가들은 목전의 현실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저 멀리 있는 무지개 혹은 신기루에 대중들이 몰입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갈등이 고조된다. 나의 여자는 내가 만질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여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서 스트립 걸의 상상을 맛볼 수 없다. 반면 자신의 시각 속에 존재하는 '여자'에게서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상'일 뿐이다. 즉 스트립 쇼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들에게 보는 상상은 허용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게 하는 것 뿐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스트립 쇼를 통해 억압과 타율이 존재하는 사회의 실제적 현실 속에서 플라토닉한 사랑을 꿈꾸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상황으로 흘러간다. 상황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은 정치적 통제권이란 것이다. 과연 정치적 통제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서 로마 시대 황제들이 왜 빵과 서커스에 집착했는지를 알게 된다. 빵과 서커스는 어찌보면 만질 수 없는 스트립퍼 즉 보는 스트리퍼의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스트립 쇼를 보는 관객들은 보는 것을 통해 기존의 질서 속에 붙박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즉 상상은 끝난 것이다. 이제 현실 속의 '여자'를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리도에서 본 크레이지 호스 쇼의 쇼걸들의 이미지는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크레이지 호스 쇼에서 마지막 순간 스트립걸은 모든 것을 벗어 던진다. 그리고 그녀의 체모體毛가 드러난다. 하지만 이 체모 역시 그렇게 보이도록 부착한 인공적인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만족하며 문을 나서는 그 순간 또 한번의 기만에 뒷통수를 얻어 맞는 것이다. 우리 세계에 대한 통찰. 그것은 어쩌면 이런 허위와 기만을 벗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는 이런 짤막한 글이 무려 17편이나 들어있다. 그 하나 하나에 이런 해석이 덧붙여져야 한다는 점에서 세상을 엿본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에코가 가끔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