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 반 룬 전집 3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이혜정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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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동양의 정서가 "중용中庸"이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면 서양의 정서는 "관용寬容"이란 단어에 응축되어 있다. 관용의 사전적 정의의 '너그럽게 용서하다'라고 되어 있다. 반면 중용은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고 되어 있다. 이 두 핵심적 용어를 보더라도 동양과 서양이 추구한 길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들이 추구한 단어를 그대로 시행했던 적은 없었다. 서양은 끊임없이 관용을 부르짖으면서도 반대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멈추지 않았고, 동양은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파당을 만들지도 않는 것이 가장 숭고한 것임에도 파당으로 붕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관용이란 단어와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저자가 수없이 강조하는 것처럼 '즐거운 타협은 비겁함에서 나온 비열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불관용은 자신의 순수함만을 강조할 때 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 룬은 "간단히 말해, 세상에 유용한 물건들은 모두 합성된 것들이다. 나는 신념만 예외가 되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확신'이 그 가반에 적정량의 '의심'이라는 합금을 함유하지 않는 한, 산념은 순수한 은으로만 된 종처럼 서투른, 혹은 순수한 동으로만 만든 나팔처럼 거친 소리를 낼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즉 관용을 실천한 역사의 소수는 이런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역사 속의 수많은 관용과 불관용을 여기서는 언급하고 있다. 제네바의 칼뱅이나 스피노자, 태양왕 루이 14세와 프리드리히 대제와 같은 사람들의 삶을 언급하면서 관용과 불관용이 가져온 결과를 이야기 하고 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부르봉 왕가를 창시한 앙리 4세의 손자였다. 그는 태양왕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과시했지만 할아버지 앙리 4세가 기초해 놓은 가톨릭과 위그노가 함께하는 프랑스를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관용을 불관용으로 바꾼 그 순간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고 자신의 5세손인 루이 16세의 사형집행장에 도장을 찍은 것이라고 보고있다. 반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는 빈약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종교에 관계없이 자신의 왕국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상업활동에 종사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프로이센으로 프랑스의 위그노와 유대인, 청교도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이들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는 한 무제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이 결과 그 손자 대에 이르러 프로이센은 유럽의 막강한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 룬은 관용의 경제적 측면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제네바의 칼뱅이나 볼테르와 같은 인물을 통해 자행된 권력의 불관용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 불관용의 세계는 숨막히는 세계인 것이다. 불관용은 금지의 세계이다. 무엇 무엇을 하지말라는 금지는 죄악을 몰아낼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미덕을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미덕은 내면의 설득을 통해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관용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내면의 설득을 위해 훌륭한 학문의 전당을 만들고-왜 유럽에 그렇게 많은 대학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모든 종류의 학문을 젊은이들이 골고루 흡수하도록 장려하였다.

관용은 자유와 같은 것이라고 반 룬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요구만 해서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밤새도록 불침번을 서면서 돌보아야만 관용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관용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은 하나의 세계로 경도된 세계 속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관용은 언제나 광풍의 회오리가 지나간 뒤에야 드러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황혼녁에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 오르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숨어있던 관용이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 우리들 모두는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지 못하는가? 우리는 같은 별을 바라보며, 같은 행성 위에 있는 동료 여행자들로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다. 각 개인들이 궁극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 어떤 길을 따라가는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 해답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여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너무나 크다"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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