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술자리에서 꼭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푸른 물 눈에 어리네”로 시작하는 ‘가고파’를 부르는 선배가 있었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는 가사에 나오는 ‘물새’를 예의 그 경상도 사투리로 “물섀”라고 발음했다. 그의 사투리로 인해 같은 영남 사투리라고 해도 고장마다 각각 제 빛깔이 있고, 조금씩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향’이라고 하면 바닷가 언저리에 있어야 비로소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아우라가 생긴다는 느낌도 갖게 됐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에서 백화가 그토록 가려 하는 고향도 ‘포구’였고, 발레리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는 곳도 지중해 푸른 바다가 보이는 해변이 아니었던가. 한창훈의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으면서, 비록 내 고향은 바닷가가 아니지만, 만약 이 팍팍한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낙향’한다면, 그곳은 아마 바닷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샀다. 요즘 들어 자주 찾는 동네의 조그만 단골 서점에 갔더니, 작년 9월에 나온 이 책이 신간 코너에 꽂혀 있었던 것. 도대체 미어터지도록 밥과 술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간직한 터에, 이 책의 제목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물론 마음의 허기를 채울 마음의 양식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배고파 허기가 질 때 바닷가에 가서 고기를 잡아 배를 채우라는, 그러니까 배고프면 밥 먹어라, 그것도 바다낚시로 물고기 잡아먹으면 좋더라, 라는 책이었다. 읽고 났더니 마음의 허기가 가시기는커녕 더욱 심해지는 것이어서, 퇴근 하는 동료 몇을 꼬셔 술을 마시러 갔다. 여기는 저자가 사는 거문도도 아니니 생선회는 어림도 없고, 겨우 모듬순대와 소주일 수밖에.

작가 한창훈의 작품은 몇 개의 단편, 그리고 읽다만 <홍합> 정도 밖에 본 적이 없다. 이런저런 저널에 연재되는 글을 통하여 대전 언저리 어딘가에 살았다거나, 고향인 여수 근처로 낙향하여 고기를 잡으며 글을 쓴다는 정도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었다. 늦깎이로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은 푹 익어 곰삭은 맛을 풍기기는 해도 트렌디한 맛은 없는 경우가 많다. 임영태니, 유용주니, 공선옥과 같은 작가들 말이다. 동시에 이런 작가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살아온 핍진한 삶의 내력이 고스란히 작품에 구현되어 있다. 살다보니 글이 되고, 겪어보니 소설이 되는 것. 한창훈의 이 책도 그러했다.

이 책을 기존의 분류틀로 뭐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디딤돌 삼아 자신이 아는 바다 먹거리와 그에 얽힌 사연들을 줄줄이 풀어내는데, 에세이이기도 하면서 먹거리에 대한 요긴한 정보를 담은 실용서이기도 하다. 곳곳에 펼쳐진 사연들은 손바닥 장(掌)자 쓰는 장편(掌篇) 소설같기도 하다. 부제로 쓰인 ‘내 밥상위의 자산어보’는 정말 잘 뽑은 제목인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갈치, 삼치, 문어, 고등어, 홍합, 날치, 김, 붕장어, 성게, 우럭 등등이 밥상위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들 고기와 해산물들이 대개 밥이 아니라 술을 부르는 안주감이라는 점에서 ‘내 술상위의 자산어보’라고 슬쩍 부제를 고쳐도 무방하리라.

한창훈은 스스로 “생계형 낚시꾼”을 자처하고 있다.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파는 ‘기업형/상업형 어부’가 아니라, 제 밥상위의 먹을거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한다는 뜻일 게다. 이것을 농촌식 용어로 바꾸면 ‘텃밭 농사꾼’ 정도가 될 듯 한데, 그의 텃밭은 거문도 주변의 그 너른 바다라는 게 다르다면 다를 것. 나는 그의 ‘텃밭’이 부러웠고, 그 비싸다는 참돔, 감성돔에서 삼치, 고등어, 때로는 모자반이나 톳같은 해조류도 씨억씨억 잘 잡아내는 그의 재주에도 질투가 났다. 일곱 살 때부터 두뼘 짜리 막대기 낚시대에 돌멩이를 매달고 낚시를 해온 그이니, 재주없는 나로서는 다만 부러워할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바다생물들의 내력을 알고 나면 적어도 횟집에서의 술자리 ‘말[言] 안주꺼리’는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었던 문장들.

△키스는 갈치 비늘을 주고 받는 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다.(갈치의 비늘은 립스틱 재료로 쓰인다고 하니)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숭어’는 송어의 잘못이다.(그런가, 이제 알았네) △낚시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보기 좋은 것은 가족이 와서 아빠기 회 떠먹이는 모습이다. 모름지기 애비란 먹을 것을 물어오는 존재이다.(저 가련한 수컷-애비의 운명!) △군소가 많이 나는 해는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한다.(바람과 생물의 저 깊고 깊은 운명적 링크) △서양요리의 아스파라거스는 분향소의 흰 국화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생명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스파라거스를 접시위에 올렸단다.(그러면, 삼겹살 옆에 놓인 상추는 돼지의 운명의 비는 것?) △포장마차 따끈한 홍합 국물에 소주 한잔은 추운 겨울 강력한 유혹이다. 그런데 이건 양식한 것이다.(그렇군, 자연산 홍합은 ‘담채’라는군) 붉은 게 홍합 암컷이고, 흰 것은 수컷, 암컷이 더 맛있다. △봄철 어미 망상어를 잡으면 임산부처럼 배가 볼록하다. 꼬물꼬물한 새끼들이 잔뜩 들어있는 것이다.(생선도 뱃속에서 아이들을 키워 내보내는 구나) △날치는 가장 멀리 갈 때는 3~400미터 날아가기도 한다.(아, 푸른 바다 위를 떼지어 날아가는 ‘날치’들의 경쾌한 활강을 상상해보라)

△(자연산 김 값을) 깎지 말자. 만드는 과정을 보았다면 눈물 난다.(사람의 손을 거치는 것들치고,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풍천은 지명이 아니라 바람이 들어오는 하천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다(이제, 고창 선운사 앞의 그 숱한 풍천장어집들을 다시봐야 겠구만) △아는 만큼만 먹을 수 있다.(유홍준이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제 알아야 먹기도 하는군) △(학꽁치) 이녀석들이 몰려오면 겨울바다는 은비녀를 뿌려 놓은 것처럼 변하고 객바위나 방파제는 아연활기를 띈다. 마을 영감님도, 환갑 다되어 가는 노총각도, 어린학생도 와서 낚는다.(학꽁치떼 몰려드는 바닷가에서 긴 뜰채로 꽁치를 잡는 저 풍경이라니!) △(낚시 밑밥용으로 남극의) 크릴 새우가 약 80% 사라졌단다. 이거 펭귄 밥이다.(온대지방의 낚시꾼들 때문에 남극 펭귄이 굶어죽어가는 이 글로벌한 세상) △복어 독인 테트로도톡신은 독중의 독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그래서 더 쎈 독이 약한 독을 물리친다. 복어가 해장에 좋은 이유) △광어와 도다리, 우도좌광, 좌도우광(이 놈들은 보이는 쪽에 따라 눈알이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있는 모양)

이 책은 각 장마다 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의 관련 대목을 인용해 놓았는데, 실학의 자장안에서 공부했던 손암선생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인어’(人魚)를 묘사해 놓은 부분이 재밌다. “모양은 사람을 닮았다. 역어는 바닷 속 인어로서 눈썹 귀 입 코 손 손톱 머리를 다 갖추고 있으며 살갗이 옥처럼 희고 비늘이 없고 꼬리가 가늘다. <술이기>에 이르기를, 교인(鮫人, 인어)은 물고기와 같으나 물속에서 옷을 버리지 않고 눈이 있어 곧잘 우는데, 눈물이 구슬이 된다고 했다.” 중국 사람들이 구라 잘 치기로 유명해 황당한 구라 모음집인 <산해경>을 냈다지만, 이런 산해경스러운 실학자의 설명은 뜨악하다. 당시로선 절해고도였을 흑산도에서 역시 유배를 떠난 형 정약용을 생각하는 와중에 떠올리는 실학자 정약전의 인어 생각이라니. 아마 외로움이 불러낸 허깨비였을 터인데, 그런 상상이라도 없었으면 어찌 버텼으랴.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1-02-1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어와 숭어가 발음만 비슷하지 전혀 다른 어종인데 아직까지 슈베르트의 숭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건 이른바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짓말 때문이지요.국내에서 잡히는 송어 중 무지개 송어가 외래종이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02-1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소는 생김새가 괴상해서 식용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사이 2011-02-14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군소는 이 책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바닷가에서는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을 거 같다는..ㅎㅎ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훈이 쓴 <내 젊은 날의 숲>을 한 달 째 가방에 넣고 다니다 이제야 겨우 다 읽었다. 서사의 골격이 그리 튼실하지 않은 그의 소설은 띄엄띄엄 읽어도 좋고, 중간에 서사의 흐름을 까먹어도 읽기의 흐름이 방해받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훈은 더 이상 장편소설을 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말하자면 그는, 드넓은 채마밭을 어떤 기계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호미 한 자루로 일구고 있는 가난한 농부다. 그에게 어울리는 경작지는 뒤꼍의 작은 텃밭이지 너른 들판이 아니다. 생래적으로 단편의 호흡인, 단편의 문장을 가진 그가 부실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문장의 힘만으로 장편을 써내려가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걸 읽어내는 독자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김훈이 고유의 문장을 만들어낸 보기 드문 소설가인 것은 분명하다. 나로서는 저 먼 옛날의 <문학기행>으로부터 이 소설에 이르기까지 김훈의 문장을 오랫동안 보아 온 셈인데, 이젠 좀 지겹다. 이 ‘지겨움’은 그의 문장이 실어나르는 ‘숙명적 현실주의’(라고 명명하고 싶다.)라 할만한 김훈식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그는 정밀한 관찰력과 세심한 독해력으로 풍경의 ‘안쪽’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이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아니 본래 풍경의 안쪽으로 스미고자 하는 관찰자의 시도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허무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안으로 스미지도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지도 못할 때, 그에게 남은 길은 이 엄정한 우주만물의 질서를 숙명적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길 외에는 없다. 그는 가진 것이 닳고 닳은 한자루 호미 밖에 없으므로, 뙤약볕에도, 눈보라에도 제 목숨의 연명을 위하여 땅을 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쓰럽다기보다는 엄중한 삶의 리얼리즘이므로, 차라리 엄숙하다.

김훈이 “사내의 할 일이란 모름지기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혹자는 그의 남근주의를 탓하고 성별분업의 차별적 질서를 옹호한다라며 비난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자연의 질서”로 인식하는 김훈에게는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한 개별자가 운명적으로 감당해 내야할 삶의 몫은 그날 하루 식구들의 입으로 넘어갈 ‘밥’을 만드는 일이며, 그 밥을 목으로 넘길 때의 비릿한 질감을 맛볼 때, 그 삶의 리얼리즘은 추상성에서 벗어나 구체적 일상성이 된다. 자신에게 부과된 목숨의 값을 맨 몸으로 버텨내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김훈식의 인생론. 어떤 초월의 의지에도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며, 거짓 선지자들의 목소리에도 현혹되지 않는 이런 시각. 개발바닥의 굳은 살을 만지며, 그 개가 맨발로 버텨왔을 삶의 리얼리즘에 경의를 표하는 것. 이런 인식은 수긍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어반복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세속적 트임의 각성도 던져주지 못하며, 아유, 정말 지겹다. <내 젊은 날의 숲> 어딜 펴도 이런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김훈식의 문장과 만난다.

“강은 자유사행으로 남류했다. 강이 지평선을 넘어올 때, 먼 상류쪽에 저녁 햇살이 닿으면 강은 수면위로 붉은 노을을 이끌고 저무는 고원을 건너왔다. 강은 비무장 지대를 빠져나오면서 서쪽으로 굽이쳤고, 그 굽이의 언저리에서 일어서는 산맥을 따라서 동부전선은 잇달린 봉우리들을 넘어갔다.” “두루미들은 갑자기 외마다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두루미들의 비명소리는 탁했고, 속이 비어서 들판의 저쪽 가장자리에까지 닿았다. 가까이서 울부짖는 두루미 소리도 멀리서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것들은 작은 불결이나 훼손도 묵과하지 않았다.” “그 닮은 꼴 부자의 결핍은 생명으로 태어난 것들의 근원적인 결핍이어서, 본래부터 결핍속에서 태어나서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결핍에 젖어서 살수는 있지만, 그것을 감지할 수는 없었고, 그들 부자의 결핍은 그 결핍을 인식하는 능력조차 결여된 결핍이었다.”

이런 식의 밀도가 높은 문장들이 겹겹이 쌓인 한권의 소설을 읽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다. 그건 <자전거 여행>이거나 <내가 읽은 책과 세상>과 같은 김훈의 다른 에세이보다 더 버겁게 읽힌다. 이미 산문에서 충분히 말해진 담론을 굳이 소설로 반복해야 하나.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남한산성>이 그나마 읽히는 까닭은, 이들 소설에는 ‘서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서사는 김훈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김훈의 빈곤한 서사적 상상력을 대신했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그나마 읽을 만 했던 것은 그의 세심한 주의력과 관찰력이 ‘풍경’을 향할 때다. 자등령 언저리의 숲을 묘사하거나, 휴전선 부근의 풍경을 말할 때 김훈의 문장은 시적으로 빛난다. 시적이므로, 시간성은 실종되어 없고, 그러니 시간성을 원리로 하는 서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원래 그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외부의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개별자의 ‘상처’를 더듬어나가던 에세이스트가 아니었던가. 그가 풍경을 바라보고, 짧은 김훈식 문장으로 써내려갈 때, 풍경과 더불어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은 도드라지지 않고 풍경과 더불어 있다. 김훈에게 ‘인간’은 오롯한 존재가 아니라, 저 자연적 질서가 만들어낸 풍경의 일부이면서 풍경 그 자체이기도 하므로.

<내 젊은 날의 숲>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김훈도 이런 책을 써서 가계에 보탬을 도모할 만큼 궁핍하지도 않고 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1-02-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배~안녕하세요 심혜리입니다~ 잘 지내시죠?
김훈의 이 책은 저도 읽으면서 '김훈의 바운더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지만, 소설 속의 여주인공과 어쩐지 겹쳐지는 점들(스물 아홉, 아빠의 죽음, 방황..)들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좀 애틋하게 읽었습니다.
참,, 며칠전에 아빠 1주기에 맞춰 창비에서 유고시집이 나와서요,, 선배께도 한권 드리고 싶은데.. 조만간 만나게 되면 드릴게요.ㅎㅎ 곧 뵈어요~^^

모든사이 2011-02-1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네. 혜리씨. 원래 책 리뷰라는 건 칭찬과 주례사로 이뤄져야 마땅한데 이런 식으로 쓰니 잘 알지도 못하는 김훈선생께 미안하네..ㅎㅎ 심호택 선생의 시집이라니, 나야 고맙지 아주..더구나 '따님'이 주는 책이니..

프리즘 2011-09-2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밀도가 높은 문장들이 겹겹이 쌓인 한권의 소설"이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점점 정형화되어가는 김훈님의 글이 조금은 안타까웠죠...
 

 

고 박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1951년 어느날, 서울 현저동 판자촌 비탈길에 서서 또랑또랑한 눈을 밝히고,  

전쟁이 개인에게 가한 폭력과 잔학함을 기어이 증언하리라고 다짐하던, 

어린 소녀의 결기를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온 생애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것으로 생을 다하신, 

그리하여 우리 시대에도 '대지모신의 글쓰기'가 현전함을 보여주신 분.  

문학이, 소설이, 위안과 위무의 양식임을 일깨워준 분.  

6.25도, 전후 미군 PX도, 거기서 그림을 그리던 박수근도, 개성의 인삼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개인사가 곧 역사였던 시대를 알지 못하는 부박한 자들이 소설을 쓰는 시대에,  

어디서 누구의 소설을 읽으며 한 밤의 불을 밝힐 것인가.  

문학의 그믐, 소설의 장렬한 최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 불어 추운 날에는 만화를 봐야 한다. 이런 날은 일찍 집에 들어가 거실 소파에 다리 뻗고 누워 만화를 봐야 한다. 몸은 피곤하고, 온갖 잡사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혼곤할 때, 만화를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세월을 보내야 한다. 동네 골목마다 즐비하던 만화가게들이 없어졌으니, 이젠 ‘대여’가 아니라 사서 봐야 한다. 만화책의 지질이 갱지임에도 불구하고, 그새 만화책 값은 엄청 올랐다. 그래도 사야 한다. 한줌의 위안이 그리울 때, 만화는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불편도 투정도 않고, 딱 본 만큼의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날은 저물고 집에는 가야 하는데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던 어제, 아무 생각 없이 교보에 갔다.

가서 보니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 6권이 나와 있었다.  한권 보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만화책의 더딘 출간 속도는 참으로 감질 맛 난다. 히로카네 겐지의 ‘시마’ 시리즈도 그러한데, 70년대 과장을 거쳐 80년대 부장이 되더니 중국의 개혁개방 시대를 맞아 이사가 되더니, 거품 붕괴 이후의 시대에는 드디어 ‘사장’이 되었다. 시마 시리즈에 비하자면, <심야식당>은 에피소드 중심이라 그나마 감질맛이 덜 하다. 어쨌건 이번에 나온 6권도 전편들과 비스무리한 스토리들이 개성적이고 간결한 그림과 더불어 보고 읽을 만 했다. 아쉬운 건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봤는데, 내릴 때 되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는 것. 한 시간도 못돼 이렇게 끝나다니, 허무하여라.

그러니까, 야밤에 문을 여는 식당, 누구든 먹고 싶은 것을 주문만 하면 뚝딱 만들어 주는 눈가에 흉터자국이 있는 빼빼 마른 아저씨가 하는 식당. 간단한 요기꺼리에서부터 한끼 식사, 그리고 술까지 파는 집. 이 만화는 음식에 대한 개인의 취향과 그 개인적 취향의 형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다양해서 술집 호스티스와 게이샤부터, 트랜스 젠더, 직장인, 만화가, 할머니와 엄마와 딸, 바람난 남자와 여자들까지, 한밤의 동경 거리를 돌아다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연작 만화라는 시트콤 드라마 형식을 빌었기 때문일 것인데, 나로서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심야식당이라는 ‘소우주’가 매우 일본스러워 보였다. 일본스럽다함은 사회학적 상상력보다는 개인의 미세한 일상사를 소소한 드라마로 그려 보이는 ‘사소설적’ 전통이 만화에서도 어김없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밥상을 마주하고는 누구나 그 소박한 ‘평화와 안식’을 경험할 것이다. 가령, 한국 사람이라면 곽재구의 ‘김치찌개 평화론’이 주는 가족주의적 아우라를 절절하게 체험한 바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퍼준 김나는 밥을 한 술 떠 먹을 때의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말이다.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김치찌개 평화론, 곽재구)

그도 아니라면, 김선우가 말한 대로, 여럿 둘러 앉아 삼겹살(물론 그녀의 시는 삼겹살이 아니라 돼지고기 소금구이지만,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지)을 상추에 싸 먹을 때의 그 생의 환희 같은 것.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되는 시간은 왁자하게 떠들며 삼겹살을 먹을 때가 아닐 것인가. 그런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채식주의자들의 염결성을 나는 무척이나 싫어한다.

이상하지? 신촌 고바우집 연탄 불판 위에서 생고깃덩어리 익어갈 때, 두꺼운 비곗살로 불판을 쓱쓱 닦아가며 남루 한 얼굴 몇이 맛나게 소금구이 먹고 있을 때 /엉치뼈나 갈비뼈 안짝 어디쯤서 내밀하게 움직이던 살들과 육체의 건너편에 밀접했던 비곗살, 살아서는 절대로 서로의 살을 만져 줄 수 없던 것들이, 참 이상하지?/새끼의 등짝을 핥아주고 암내도 풍기곤 했을 처형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자기 살로 자기 살을 닦아주면서 , 그리웠어 어쩌구 하는 것처럼 다정스레 냄새를 풍기더라니깐/훤한 알전구 주방의 큰 도마에선 붉게 상기된 아줌마들이 뭉청뭉청 돼지 한 마리 썰고 있었는데 내 살이 내 살을 닦아줄 그때처럼 신명나게 생고기를 썰고 있었는데/축제의 무희처럼 상추를 활짝 펼쳐들고 방울, 단검, 고기 몇점, 맛나게 싸서 삼키는 중에 이상하지? 산다는 게 갑자기/단순하게 경쾌해지고 화르륵 밝아지는, 안 보이던 나의 얼굴이 그때 갑자기 보이는 것이었거든.(고바우집 소금구이, 김선우)

그런데, <심야식당>이 지극히 일본스럽다함은, 삼겹살이나 김치찌개에서 보이는 그 ‘비릿한 질감의 연대감’이 느껴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은 지극히 개인화되어 있으며, 주인장 또한 그들에게 별로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전국 어딜 가든 꼭 한 군데는 있게 마련인 ‘욕쟁이 할머니’ 같은 가족주의적 아우라가 없는 것이다. 그게 싫은가. 아니다, 그래서 편하고 부담 없다. 만약 한국의 <심야식당>이라면, 그리고 그곳의 주인장이라면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개인사와 일상에 틈입하여 쓸데없는 카운슬러를 자청했을 것이다. 심야식당이 한밤 동경 뒷골목에서 형성된 느슨한 공동체일지언정, 서로가 서로를 감정적으로 묶어내는 질펀한 연대가 없어서 차라리 쿨한 것이다. 물론,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은 가볍기도 하고, 가끔 눈물 찔끔 나기도 하며, 키들거리는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이 만화는 주인장의 째진 얼굴처럼 쿨하다.

아베 야로의 이 만화는 일드로도 만들어진 모양인데, 케이블에서 한 두번 보다 말았다. 어째 일본의 걸작만화가 영화화되었을 때는 왜 그리 우스꽝스러운 스토리로 변하는 지 모르겠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들>도 그렇고... 어제 교보에서 산 아베 야로의 또 다른 만화는 <야마모토 귀파주는 가게>다. 야마모토에 귀를 파주는 가게가 있는데, 아주 예쁜 여자가 귀를 파주는 ‘서비스’를 하고, 한번 거기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광적인 귀파기 매니어가 되어 버린다. 유쾌하고 재밌는 발상인데, 물론 에로틱하기도 하다. 여자들을 기형적으로 그리는 아베 야로의 그림체가 오히려 섹슈얼하게 느껴진다. 무릎을 대주고 귀파주는 여자라서 그런가. 아무튼, 이 만화가 한권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둘째권이 나올 때까지 또 감질맛 나게 기다려야 겠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qui 2011-01-20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귀파주는 가게라니~ 저는 어머니가 파주는 것도 왠지 공포스러워서 못맡기겠던데 말이죠 ㅡ.ㅡ;ㅎㅎ 만화가 영화화될때 그 원작의 아우라를 상실하게 되는건 어쩔수 없는듯; 재현에 무리가 있다는 점은 둘째로 치고-왜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그토록 상상력이 후진지 모르겠어요-일본인들 특유의 제스처가 익숙치않아서 그런지 저는 안보게 되더라구요;대표적으로 노다메 칸타빌레가 그랬다지요..

모든사이 2011-01-20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그런 거 같습니다. 좀더 덧붙이자면, 저는 일본 문화 특유의 어떤 폐쇄성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1억2천만명이라는 인구가 창출하는 일본의 자족적 내수시장과 불가피하게 대외의존형 개방경제(박정희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발전경로)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우리와의 차이 같은 것이랄까요. 그러니까, 일본은 자신들 고유의 문화를 폐쇄적으로 고집해도 되는 조건 속에서 대중문화가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오타쿠스러운 문화, 그리고 매니어에게 호소할 수 있는 문화가 창출되었다는 것. 그것이 가진 보편성은 우리의 개방적(그것이 헐리우드에서 '벤치마킹'한 것이든 어떻든) 문화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비단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만이 아니라, 일본 영화의 저변에 폭넓게 퍼져 있는 B급스러운 취향은 그런 폐쇄성의 결과가 아닐까라는. 아니, 어쩌면 제가 가진 문화적 감식안이 협애한 것이어서일수도.. ㅎㅎ

빵가게재습격 2011-10-06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사이님 안녕하세요. 글을 읽어보니 너무 좋네요. 실례지만, 제 블로그에 옮겨 게재해도 될까요? 마침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읽었는데, 모든 사이님의 리뷰를 보니 꼭 옮겨놓고 싶어서요. 괜찮을지 의견 여쭤봅니다. 부탁드립니다~^^

모든사이 2011-10-06 08:26   좋아요 1 | URL
네 괜찮습니다. 출처만 밝혀주시면 어디에 써도 무방합니다. 근데, 이게 쓴 지 좀 된 리뷰인데, 심야식당은 벌써 7권이 나오지 않았나요? ㅎㅎ

빵가게재습격 2011-10-06 09:5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별어곡(別於谷)은 강원도 정선 부근의 간이역이다. 2005년 3월 21일 무인 간이역으로 격하된 뒤, 2009년 8월 민둥산 억새 전시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라고 임철우는 쓰고 있다.)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이 역은, 간이역이 풍기는 쓸쓸한 낭만과 서러운 삶을 그대로 온축하고 있다. 소설가 임철우는 이 역 부근에 살았던 사람들의 인생유전을 같은 이름의 소설로 써냈다. <이별하는 골짜기>(문학과 지성사) 제목 그대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별을 하거나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술술 잘 읽히고 등장인물들이 살아온 내력은 가슴시리다. 잘 쓴 소설이겠으나  내러티브의 밀도는 촘촘하지 않고 짓다만 건축물처럼 어딘지 허술하다.

임철우의 소설을 읽은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다. <아버지의 땅>이니 <달빛 밟기>, <그 섬에 가고 싶다>같은 소설들. 그가 가장 공들여 썼다는 <봄날>은 아직 보지 않았다. 임철우의 예전 소설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이 소설에서도 ‘역사의 서정화, 혹은 서정의 역사화’쯤으로 해석할 만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유전을 서정적인 문체로 보여주는 방식 말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인은 하나의 개별적 존재이되, 어느 날 닥쳐온 역사의 광기를 홀로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의 전작들에서 개인에게 부과된 역사의 무게는 전쟁(6․25)이거나 광주학살이었다.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기차와 시골 간이역이 뿜어내는 향수와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루한 시와 소설의 전통 속에서 기차와 역은 늘 그런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그것은 눈 내리는 날 시골 간이역의 풍경을 이야기하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와 같은 시에서 전형적일 것이다. 가난과 궁핍에 젖은 사람들이 대합실 톱밥난로 곁에 앉아 있는 모습.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사평역에서) 귀성열차를 탈 때마다 이 시구를 얼마나 자주 되뇌었던가. 내 손에 굴비와 사과가 없더라도 귀향의 내면은 언제나 상처와 얼룩들로 그득했었다.

귀향 열차에는 기형도의 ‘조치원’에 등장함직한 사내들도 언제나 쿨럭거리고 앉아 있었다.“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의심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조치원) 조치원 역의 그 허름한 역사에서 내려 버스를 탈 때마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을 한 채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 보이는 사내들을 만나고, 그들이 “크고 검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역사를 빠져나가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서울살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인 사내들. 내가 아는 그 사내들은 성수동 마찌꼬바에서 손가락이 뭉개져 귀향하거나, 지하철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기차가 모더니티를 상징한다면, 곽재구나 기형도, 그리고 임철우가 보여주는 그 주변의 사람들은 모더니티가 부과하는 폭력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처와 얼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기차 그리고 역사(驛舍)는 한국적 모더니티의 슬픈 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본 것은 시골 소읍의 기차역에서 간호사로 취직이 되어 떠나는 큰 딸을 떠나보냈던 순간이었다(고 형은 내게 말했다.) 기차는 스물을 넘긴 처녀를 싣고 한국 모더니즘의 집약체인 도시로 내달릴 것이다. 제 품의 자식을 저 거친 대처로 내보내는 부성의 내면은 눈물범벅이었을 것이다. 말없이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사내를 꽁무니에 달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내면은 한국적 모더니티가 부과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을까.

기차가 모더니티의 빠른 질주를 보여준다는 것은 그것이 초래하는 변화의 ‘물결’에 있을 것이다. 기차는 선으로 뻗으면서 면으로 확장한다. 비행기와 선박이 점에서 점으로 연결되는 것과는 다르다. 무슨 말인가. 기차는 철로와 철로를 둘러싼 지역을 서서히, 그리고 빠르게 모더니티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 선박과 비행기는 이차원적인 연결이 없어 그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연결될 따름이다. 일본의 만주정복을 앞장서 이끌었던 만철은 일제의 싱크탱크이자 불모의 땅 만주에 모더니티의 신세계를 열어 젖혔다.(만철, 고바야시 히데오) 기차가 가는 어디든 이런 ‘근대의 질주’가 벌어졌는데(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박천홍), 그럼 초고속 열차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상징일 것인가.

질주하는 기차의 모더니티는 홀로 선 근대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기차와 역사 주변을 다룬 시와 소설들에 등장하는 개인들이 한결같이 상처와 얼룩으로 번들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임철우의 이 소설에서처럼, 퇴락한 시골 역사에서 시를 쓰는 젊은 시인이거나, 업무상 과실로 사람을 죽게 만들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늙은 역무원이거나, 위안부로 한많은 생애를 살다가 들어온 노파이거나, 유년의 트라우마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중년 아낙이거나 죄다 기차와 역사 주변에 살아갈 인물들로는 딱 들어맞는 것이다.

어쩌면 기차가 주는 사비유(死比喩)적 인물들과 내러티브 때문에 이 책이 덜 재미있는 지도 모르겠다. 시골의 간이역은 퇴행성 낭만주의에나 어울릴 법한 배경이고, 개인이 감당하는 역사적 상처도 한국소설에서 모래알만큼이나 흔하다. 임철우의 서정의 역사화, 역사의 서정화는 그리 성공적이질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절 집중해서 읽으면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는 이 소설을 후다닥 읽고도 못내 영 찜찜했던 것은 낭만이 끝간 데까지 간 것도 아니고, 낭만이 거세된 것도 아닌 이 어정쩡한 낭만주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촌기차역은 밀리오레라는 거대한 쇼핑몰 한구석에 옛모습 그대로 처박혀 있다. 문화유산으로서 보존하기 위해서라는데, 거대 쇼핑몰에 짓눌린 옛시절의 신촌역사는 낭만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임철우의 퇴행성 낭만주의가 꼭 그 짝이다. 그래도 주말 하루를 보내게 한 소설인데, 너무 혹평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