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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술자리에서 꼭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푸른 물 눈에 어리네”로 시작하는 ‘가고파’를 부르는 선배가 있었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는 가사에 나오는 ‘물새’를 예의 그 경상도 사투리로 “물섀”라고 발음했다. 그의 사투리로 인해 같은 영남 사투리라고 해도 고장마다 각각 제 빛깔이 있고, 조금씩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향’이라고 하면 바닷가 언저리에 있어야 비로소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아우라가 생긴다는 느낌도 갖게 됐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에서 백화가 그토록 가려 하는 고향도 ‘포구’였고, 발레리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는 곳도 지중해 푸른 바다가 보이는 해변이 아니었던가. 한창훈의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으면서, 비록 내 고향은 바닷가가 아니지만, 만약 이 팍팍한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낙향’한다면, 그곳은 아마 바닷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샀다. 요즘 들어 자주 찾는 동네의 조그만 단골 서점에 갔더니, 작년 9월에 나온 이 책이 신간 코너에 꽂혀 있었던 것. 도대체 미어터지도록 밥과 술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간직한 터에, 이 책의 제목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물론 마음의 허기를 채울 마음의 양식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배고파 허기가 질 때 바닷가에 가서 고기를 잡아 배를 채우라는, 그러니까 배고프면 밥 먹어라, 그것도 바다낚시로 물고기 잡아먹으면 좋더라, 라는 책이었다. 읽고 났더니 마음의 허기가 가시기는커녕 더욱 심해지는 것이어서, 퇴근 하는 동료 몇을 꼬셔 술을 마시러 갔다. 여기는 저자가 사는 거문도도 아니니 생선회는 어림도 없고, 겨우 모듬순대와 소주일 수밖에.
작가 한창훈의 작품은 몇 개의 단편, 그리고 읽다만 <홍합> 정도 밖에 본 적이 없다. 이런저런 저널에 연재되는 글을 통하여 대전 언저리 어딘가에 살았다거나, 고향인 여수 근처로 낙향하여 고기를 잡으며 글을 쓴다는 정도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었다. 늦깎이로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은 푹 익어 곰삭은 맛을 풍기기는 해도 트렌디한 맛은 없는 경우가 많다. 임영태니, 유용주니, 공선옥과 같은 작가들 말이다. 동시에 이런 작가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살아온 핍진한 삶의 내력이 고스란히 작품에 구현되어 있다. 살다보니 글이 되고, 겪어보니 소설이 되는 것. 한창훈의 이 책도 그러했다.
이 책을 기존의 분류틀로 뭐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디딤돌 삼아 자신이 아는 바다 먹거리와 그에 얽힌 사연들을 줄줄이 풀어내는데, 에세이이기도 하면서 먹거리에 대한 요긴한 정보를 담은 실용서이기도 하다. 곳곳에 펼쳐진 사연들은 손바닥 장(掌)자 쓰는 장편(掌篇) 소설같기도 하다. 부제로 쓰인 ‘내 밥상위의 자산어보’는 정말 잘 뽑은 제목인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갈치, 삼치, 문어, 고등어, 홍합, 날치, 김, 붕장어, 성게, 우럭 등등이 밥상위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들 고기와 해산물들이 대개 밥이 아니라 술을 부르는 안주감이라는 점에서 ‘내 술상위의 자산어보’라고 슬쩍 부제를 고쳐도 무방하리라.
한창훈은 스스로 “생계형 낚시꾼”을 자처하고 있다.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파는 ‘기업형/상업형 어부’가 아니라, 제 밥상위의 먹을거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한다는 뜻일 게다. 이것을 농촌식 용어로 바꾸면 ‘텃밭 농사꾼’ 정도가 될 듯 한데, 그의 텃밭은 거문도 주변의 그 너른 바다라는 게 다르다면 다를 것. 나는 그의 ‘텃밭’이 부러웠고, 그 비싸다는 참돔, 감성돔에서 삼치, 고등어, 때로는 모자반이나 톳같은 해조류도 씨억씨억 잘 잡아내는 그의 재주에도 질투가 났다. 일곱 살 때부터 두뼘 짜리 막대기 낚시대에 돌멩이를 매달고 낚시를 해온 그이니, 재주없는 나로서는 다만 부러워할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바다생물들의 내력을 알고 나면 적어도 횟집에서의 술자리 ‘말[言] 안주꺼리’는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었던 문장들.
△키스는 갈치 비늘을 주고 받는 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다.(갈치의 비늘은 립스틱 재료로 쓰인다고 하니)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숭어’는 송어의 잘못이다.(그런가, 이제 알았네) △낚시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보기 좋은 것은 가족이 와서 아빠기 회 떠먹이는 모습이다. 모름지기 애비란 먹을 것을 물어오는 존재이다.(저 가련한 수컷-애비의 운명!) △군소가 많이 나는 해는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한다.(바람과 생물의 저 깊고 깊은 운명적 링크) △서양요리의 아스파라거스는 분향소의 흰 국화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생명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스파라거스를 접시위에 올렸단다.(그러면, 삼겹살 옆에 놓인 상추는 돼지의 운명의 비는 것?) △포장마차 따끈한 홍합 국물에 소주 한잔은 추운 겨울 강력한 유혹이다. 그런데 이건 양식한 것이다.(그렇군, 자연산 홍합은 ‘담채’라는군) 붉은 게 홍합 암컷이고, 흰 것은 수컷, 암컷이 더 맛있다. △봄철 어미 망상어를 잡으면 임산부처럼 배가 볼록하다. 꼬물꼬물한 새끼들이 잔뜩 들어있는 것이다.(생선도 뱃속에서 아이들을 키워 내보내는 구나) △날치는 가장 멀리 갈 때는 3~400미터 날아가기도 한다.(아, 푸른 바다 위를 떼지어 날아가는 ‘날치’들의 경쾌한 활강을 상상해보라)
△(자연산 김 값을) 깎지 말자. 만드는 과정을 보았다면 눈물 난다.(사람의 손을 거치는 것들치고,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풍천은 지명이 아니라 바람이 들어오는 하천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다(이제, 고창 선운사 앞의 그 숱한 풍천장어집들을 다시봐야 겠구만) △아는 만큼만 먹을 수 있다.(유홍준이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제 알아야 먹기도 하는군) △(학꽁치) 이녀석들이 몰려오면 겨울바다는 은비녀를 뿌려 놓은 것처럼 변하고 객바위나 방파제는 아연활기를 띈다. 마을 영감님도, 환갑 다되어 가는 노총각도, 어린학생도 와서 낚는다.(학꽁치떼 몰려드는 바닷가에서 긴 뜰채로 꽁치를 잡는 저 풍경이라니!) △(낚시 밑밥용으로 남극의) 크릴 새우가 약 80% 사라졌단다. 이거 펭귄 밥이다.(온대지방의 낚시꾼들 때문에 남극 펭귄이 굶어죽어가는 이 글로벌한 세상) △복어 독인 테트로도톡신은 독중의 독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그래서 더 쎈 독이 약한 독을 물리친다. 복어가 해장에 좋은 이유) △광어와 도다리, 우도좌광, 좌도우광(이 놈들은 보이는 쪽에 따라 눈알이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있는 모양)
이 책은 각 장마다 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의 관련 대목을 인용해 놓았는데, 실학의 자장안에서 공부했던 손암선생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인어’(人魚)를 묘사해 놓은 부분이 재밌다. “모양은 사람을 닮았다. 역어는 바닷 속 인어로서 눈썹 귀 입 코 손 손톱 머리를 다 갖추고 있으며 살갗이 옥처럼 희고 비늘이 없고 꼬리가 가늘다. <술이기>에 이르기를, 교인(鮫人, 인어)은 물고기와 같으나 물속에서 옷을 버리지 않고 눈이 있어 곧잘 우는데, 눈물이 구슬이 된다고 했다.” 중국 사람들이 구라 잘 치기로 유명해 황당한 구라 모음집인 <산해경>을 냈다지만, 이런 산해경스러운 실학자의 설명은 뜨악하다. 당시로선 절해고도였을 흑산도에서 역시 유배를 떠난 형 정약용을 생각하는 와중에 떠올리는 실학자 정약전의 인어 생각이라니. 아마 외로움이 불러낸 허깨비였을 터인데, 그런 상상이라도 없었으면 어찌 버텼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