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자야 여사의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애틋하고 흐뭇하게 읽은 적이 있었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두 번씩이나 마음에도 없는 시골처녀와 결혼을 했고, 그 때마다 아내를 버리고 서울로 도망쳤다. 부모를 피해 도망 온 그가 매번 찾아간 곳은 김자야 여사의 집이었다. 둘은 겨우 3년 동안 불같은 사랑과 달콤한 행복을 맛보았을 뿐이다. “한국 페시미즘의 절창”이라 꼽히는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씨봉방’에 나온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잃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의 그 아내가 바로 김자야 여사다.
이 책에서 가장 애틋한 장면은 늙은 김자야 여사가 백석의 시집 ‘사슴’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대출받은 뒤 가슴에 꼭 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백석의 시집은 87년 민주화 이후에야 금서에서 풀렸다.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시인의 옛 시집을 50여년 뒤에야 펼칠 수 있었던 심경이 오죽했으랴. 조선권번의 기생이었던 그녀는 훗날 한국 요정정치의 요람인 대연각의 여주인으로 일세를 풍미한 밤의 여인이 되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해 지금의 길상사를 세운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내 사랑 백석>이 울림이 컸던 이유는 또 있다. 바로 김자야 여사의 ‘문장’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글을 배우고 쓴 사람들의 문장은 지금의 그것과는 달리 담백하기 그지 없다. 한국어의 문장이 지금처럼 복잡하고 어렵게 변한 것은 추상적 논리의 언어로서 진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마음의 자기표현과 감정의 담백한 토로라는 문장의 본령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연변작가인 고 김학철의 문장 같은 문인들의 글을 보면 자본주의의 ‘때’가 문장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짐작이 된다.
김자야 여사의 책에는 현학과 수사를 걷어낸 문장의 맨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착하고 탁월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문재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시인 못지않은 감성과 문학적 재능을 가진 시인의 아내이자 연인이었으며, 그녀는 남은 생이 증거하듯 남루하고 궁핍한 시인의 아내로서 필수불가결하게(?) 갖추었어야할 ‘생활력’과 '의지'도 아울러 갖춘 여인이었다. 모름지기 시인의 아내란, 정말 힘이 센 것이다.
<내 사랑 백석>의 뒷자리에 <김수영의 연인>(책읽는 오두막)을 놓고 싶다. 올해 2월에 출간된 이 책을 동네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는 단숨에 읽었다. 분량이 얇기도 하거니와 까칠하고 괴팍했던 김수영의 숨겨진 면모와 내면, 그 시인을 온전히 사랑하고 살뜰하게 챙겼던 ‘시인의 아내’가 살아온 과정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이 책을 쓴 시인 김수영의 아내 김현경 역시 탁월한 문장력의 소유자였다. 팔순 노인의 문장이 이렇게 세련되고 촉촉하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고스트라이터가 아니라 그녀가 직접 썼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한 챕터는 ‘나는 시인의 아내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이런 자기선언은 당차고 아름답다. 이런 자존의 언어는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 실비아 플라스의 문장에서 보이는 고독과 유폐의 언어와는 사뭇 다르다. 그녀는 40년대 이화여대를 다닌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엘리트 여성이었다. 이 책에는 '흑인시'를 쓴 시인이자 남로당 지하당원이었던 배인철과의 짧고도 비극적인 사랑, 김수영과의 만남과 임산부로 치른 전쟁의 참혹함, 섬약하고 신경질적이었던 김수영과의 결혼생활, 김수영의 어이없는 사고사, 김수영의 시와 그 시에 얽힌 가정사 등 노년에 이른 김현경의 담담한 회고가 담겨있다.
김수영은 시를 쓰고 그녀는 그 시를 원고지에 정서했다. 그녀가 없으면 김수영은 밥을 챙겨먹지 못했으며, 시를 원고지에 옮기지도 못했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서강대 언저리인 구수동에서 양계장을 했으며, 재봉틀을 돌려 양재를 했고, 양장점을 운영했다. 그녀가 차린 양장점 '그레이스'는 당시의 서울 상류층이 드나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수영 사후에는 미술품 컬렉터가 되었다. 이 책에서 생계를 감당한 여성 가장으로서의 면모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김수영 특유의 가부장적이고 소시민적인 신경증을 감내한 여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녀는 김수영의 폭음과 선병질적인 기질을 온전히 포용하고 미덥게 그를 보살폈다.
“그가 짜증을 낼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아내인 나밖에 없었다. 수영은 밤새도록 우리의 억압적 현실을 탄식하면서 상처난 짐승처럼 괴로워했다, 그때 나는 그런 수영을 충분히 안아주지 못했다. 왜 한 가정의 평안이, 시대의 우울에 영향을 받는 한 남자로 인해 파탄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수영의 분노를 묵묵히 받아내면서 조금씩 지쳐갔다.”
김수영이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바람아 먼지야 물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라고 자책할 때, 그 탄식과 신경질을 온 몸으로 받아냈던 여인이 김현경이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김수영 ‘시의 현대성’은 시대인식, 양식과 감수성의 현대성을 의미할 뿐, 그 현대성의 안쪽 한켠에는 가부장적 봉건성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김수영 평전을 쓴 최하림은 그를 일러 ‘퓨리탄의 초상’이라고 했다. 퓨리탄의 ‘염결성’ 안쪽에는, 그러나, 위장된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었다. 이 책에는 그런 김수영-김현경 부부의 내밀하고도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김수영의 시 ‘죄와 벌’은 이렇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살인을 한다//그러나 우산대로/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우리들의 옆에서는/어린 놈이 울었고/비오는 거리에는/사십명 가량의 취객들이/모여들었고/집에 돌아와서/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아는 사람이/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아니 그보다도 먼저/아까운 것이/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것이었다.”
아내 김현경은 묻는다. “대로변에서, 그것도 어린 아들 앞에서 부인을 때리는 시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시에다 우산을 두고 온 일이 아깝다고 말하는 시인의 감정에는 무엇이 섞여 있었을까?” 여기에는 남편 김수영에 대한 서운함이 살짝 묻어나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회고가 '남편'을 향해 있지 않고, ‘시인의 마음’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의 한쪽으로서 그날의 폭력을 묻지 않고, ‘시인’이라는 일반명사의 주체에게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김수영은 그런 존재였던 모양이다. 남편이기에 앞서 자신의 내부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자 세상과 불화하며 성스러운 아우라를 함께 지닌 인간. 그런 '시인'이기에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는 있었던 것.
그것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아니 바로 그 첫 날 밤은/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물어 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모양이다/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다시 돌아간다/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성, 전문)
그녀는 사창가 창녀와 외도를 하고 온 날 자신과 섹스를 하는 내용의 시 ‘性’을 공개하며, “나는 그런 마음으로 아내로서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이 시를 공개하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면 어떠랴.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더 빛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수모와 치욕도 달게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이 ‘性’를 두고 김수영다운 적나라한 솔직함이라고 말해선 안된다. 그 시는 공개발표된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 서랍에서 발견된 것이다. 김수영은 이 글을 시로서 의식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메모하듯 휘갈겼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내밀한 ‘일기’의 편린을 본격적인 시라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김현경은 만남에서 죽음까지 애오라지 김수영만을 사랑하고 그만을 위해 헌신한 아내는 아니었다. 이 책에서 그로테스크한 삽화처럼 보여지는 대목은 김현경과 김수영의 선린상고 선배인 이종구와의 인연이다. 김현경은 전쟁의 와중에 의용군에 징집되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수영과 극적으로 재회했으나, 전쟁으로 생활이 궁핍해지자 이종구에게 취직자리를 부탁하러 간다. 그러다 그녀를 오랫동안 좋아했던 이종구의 손에 이끌려 사실상의 결혼 상태로 일년 이상을 함께 살았다.
어느 아침 이종구와 김현경이 나란히 앉아 아침밥상을 마주하고 있을 때, 김수영이 자신의 아내를 찾으러 이종구의 집에 왔다. 그러나, 김수영은 자신의 아내를 되찾아 돌아가진 못했다. 자신의 아이를 낳은 아내를 선배에게 빼앗긴(?) 채 돌아오는 김수영, 그리고 남편인 김수영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을 감금하고 감시한 이종구와 일년여를 동거한 김현경. 그녀의 선택은 이종구에 의해 강요된 것만은 아니었던 듯 싶다. 김현경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정식결혼을 요구하는 이종구를 따돌리고 김수영에게 돌아간다.
“잘못된 선택으로 수영을 떠나 있었지만 여전히 그에게만큼은 귀하고 당당한 여자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마조마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김수영이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나를 본 수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꼭 잡고는 근처 거리를 천천히 돌아 그 길로 자신이 살던 집에 데리고 갔다. 마치 늘 하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아내의 손을 잡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집으로 돌아가는 김수영, 그리고 그를 따라 선선히 집으로 돌아가는 아내. 영화 ‘라 스트라다’를 보고 난 뒤 거리에서 아내를 우산대로 구타한 김수영의 심리에 대해 김현경은 이렇게 주석을 달고 있다. “배우 줄리에타 마시나와 앤서니 퀸이 남루한 모습을 한 채 방랑하는 야바위꾼으로 나왔던 그 영화. 상영 내내 펼쳐지던 황량하리만큼 넓은 영화의 공간.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 그리고 수영과 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수영은 나를 때리고 ‘죄와 벌’을 썼는지 모른다. 수영은 그날 일에 대해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1958년 가을이었다.”
김수영의 시 ‘죄와 벌’도 이해가 간다. 사람의 삶이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욕망과 좌절, 사랑과 질투, 인내와 폭력 사이에서 길항하고 충돌하며 굴러가듯이, 이 시인 남편과 그 아내의 삶도 애증병존과 모순적 감정의 뒤섞임으로 이뤄진 것이리라. 김수영의 ‘사랑’은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왜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고, “번개처럼/금이 간 너의 얼굴”이던가. '금이 간 얼굴'은 흉터로 남아 그 앞에 선 사람이 평생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처가 될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 그리고 ‘그리고 수영과 나’라는 짧은 두 구절에는 얼마나 많은 복잡한 심경과 인생의 내력이 숨어 있을 것인가. 당사자가 아닌 독자는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김수영의 연인>에는 김자야 여사의 백석 회고처럼 순정하고 기구한 사랑의 내력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수영의 싯귀는 ‘공자의 생활난’의 마지막 대목이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事物과 사물의 生理와/사물의 數量과 限度와/사물의 愚昧와 사물의 明晳性을/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이 구절에는 소시민 김수영의 고뇌는 잘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단호하고 명확한 어조로 현실을 바라보는 김수영 특유의 그 형형한 눈이 보인다. 이따끔씩 나는 사물의 생리와 수량과 명석성을 바로 보자는 김수영의 단단한 결의를 되뇌이곤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돌연사의 예고도 함께 말이다.
ps. 김수영의 넷째 동생은 수려한 용모의 엘리트였으나 북한 의용군에 자원입대를 했고, 우익 대한청년단의 단장이었던 셋째 동생은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둘째 동생은 무능한 장남의 자리를 대신한 가장이었고, 누이동생 김수명은 문학잡지 <현대문학>의 편집장을 지낸 미모의 문인. 김수영의 복잡다단한 심리만큼이나 그의 가족사도 기구하고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