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기억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 출판사를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이건 대학시절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긴 버릇인데, 그래서인지 집에 있는 책도 출판사별로 정리를 해 놓고 있다. 이건 사실 미학적이유이기도 하다. 출판사 별로 총서류를 내놓고 있고, 이 시리즈물들은 대개 디자인도 훌륭하고 가지런히 꽂아 놓을 때 보기도 좋기 때문이다. 이사를 한 뒤 출판사 별로 책을 정리하고 나서 훑어보니 내가 선호하는 출판사들이 한눈에 정리가 되었다. 민음사, 문학과지성사, 창작과비평사, 한길사, 후마니타스, 돌베개, 새물결 등 대개가 인문사회과학 책을 내는 곳들이었다. 흰색 바탕에 빨간 띠를 두른 문학과지성사는 책을 한데 모아 꽂으면 방안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디자인이나 책 장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책들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더 클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많이 읽고 밑줄을 긋고 책장에 꽂아놓은 책들은 문지도 창비도 아닌 민음사의 책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 중 가장 많은 책들도 바로 이 출판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오늘날의 한국 민주주의가 창비, 문지, 민음사, 한길사 등의 출판사에 큰 빚을 졌다는 철학자 박구용의 말을 빌자면, 내 생각과 세계관은 이 출판사로부터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아마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젊은날의 초상> 읽기에서 시작되었을 민음사 책에 대한 선호는 지금도 여전하다. 오늘의 작가총서, 오늘의시인총서, 세계시인선, 벤야민과 아우에르바흐가 들어가 있는 이데아총서, 김우창·유종호·고은·김춘수 전집, 수많은 단행본들, 그리고 모던클래식과 세계문학전집. 심지어는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와 셜록 홈즈 전집을 낸 황금가지와 칼 세이건이 포함된 사이언스북스. 비룡소의 어린이 책까지 민음사와 그 방계 출판사는 오랜 세월 내 외로움과 고독의 동반자이자 지식과 안목의 밑거름이었다.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자서전 <>을 읽은 것도 이런 저간의 사정과 관련이 있다. 그에 관해서는 김현과 고은, 김병익 등의 책에서 간헐적으로 읽은 바 있으나 그의 육필로 그의 생애와 민음사의 뒷이야기를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 자서전에 싣고 있는 소설 자유풍속을 오래 전 선배의 서가에 꽂힌 50년대 서울대 문리대 문학회지에서 읽은 기억도 난다. 맥파로라는 인상적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썼던 문청출신의 사장이라니 과연 이 출판사의 책들이 왜 문학과 인문학에 집중되었는지 짐작이 갔던 것이다. 그의 품성과 인간적 교유, 가치관과 행태마저도 고스란히 이 굴지의 출판사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하룻동안 후딱 읽어냈는데, 그만큼 흥미롭기도 했고, 내가 가진 특유의 호사취미에 들어맞는 책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일본의 이와나미 쇼뗑이나 프랑스의 갈리마르 같은 출판사들은 나름의 고집스런 자기 원칙과 방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에도 나름의 인문사회과학의 에콜을 형성하고 있는 창비나 문지같은 출판사가 있다. 그러나, 민음사는 김우창과 유종호, 이남호가 편집위원으로 있던 <세계의 문학>이 잘 보여주듯이 민음사는 특정한 에콜과 상관없이 폭넓은 의미에서 인문주의적 시각을 표방하고 있었으며, 좌와 우(라기 보다 자유주의적?)를 아우르는 넉넉함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어느 출판사보다 기민하게, 그리고 때로는 더 선도적으로 트렌드를 읽고 유행을 만들어내는 책을 내놓았은 곳일 터이다, 나쁘게 말해 상업주의적 감각에서는 우직한 창비나 문지보다 훨씬 윗길이었고, 책을 펴내는 감각도 탁월했다. 여기에는 김승옥, 정병규, 박상순으로 이어지는 탁월한 북디자이너들의 기여도 상당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사회의 문학(인문) 세대의 어떤 부침같은 것이 엿보이기도 한다. 박맹호 곁에는 신동문과 고은, 김현, 김우창, 유종호 등이 있었다.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은 60년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문학의 현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가장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는 주역들이다. 고은의 감성, 김현의 문학적 감식안, 김우창의 인문주의, 유종호의 탁월한 비평이 없었더라면, 이 출판사의 오늘도 없었으리라. 김현이 쓴,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이룬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오늘의 시인총서 발간사는, 개인적으로 20세기 한국문학이 산출해낸 가장 탁월한 문장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헌책방 순례를 취미삼아 다닐 때, 눈에 잘 띄이지는 않지만 보는 족족 샀던 책들이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 정현종의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가 끼어있는 오늘의 산문정신 시리즈였다. 나온 지 오래되었어도 장정이나 편집, 필자와 글도 결코 낡지 않은 책들이었다. 헌책방에 쌓인 저 수많은 책들 가운데 90%는 다시 읽히지도, 읽을 필요도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일본어 중역의 날림 번역본 소설들, 디자인이라 할 수 없는 장정, 몽롱하고 애매하며 순응주의적인 긍정의 철학을 설파하는 에세이들 가운데 민음사의 이 시리즈는 오롯하게 그 현재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책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시간의 풍화작용과 패러다임의 변혁을 겪고 나서도 남는 것, 사상과 콘텐츠로서만이 아니라 물질로서의 책도 남을 수 있어야 하는 것,

 

박맹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우리시대의 한 탁월한 출판편집자가 그런 책을 낸 사람중의 하나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는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자아버지를 두었으나 그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인문출판의 커다란 산실을 만들었다. 그의 삶은 우여곡절이 많지만 대개 저자를 만나고 책을 만드는 것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수천그루의 나무를 희생하여 출판시장에 상품을 내놓는 일일지라도, 지금 세상에서는 가장 를 짓지 않고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거나, 남의 것을 교묘한 방법으로 강탈하거나, 현혹과 요설과 악문으로 살아가는 일이 대부분의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일진대,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일, 그게 가장 행복한 직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을 통해 본 박맹호의 삶은, 아주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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