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였던 그림자
남미판 386세대의 후일담 소설. 혁명은 가고 남은 자는 먹고 살아야 한다. 후미진 뒷골목 주택에서 집단으로 서식하는 이 왕년의 투사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찌질하다. 피노체트 이후 30여년, 이들의 그림자는 길고 우울하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실패한 혁명 이후의 풍경을 보고자 했으나 소기의 목적 달성에는 실패.
일단 웃고 나서 혁명
오르한 파묵 때문에 들추게 된 터키 소설. 우디 앨런 소설 이후에 이렇게 유쾌하게 본 소설이 있을까. 풍자는 예리하고 유머는 도를 넘지 않는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동경한 유신의 주역들이 떠오르는 장면들. 군인과 정치가, 언론과 혁명가들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 터키판 돈 카밀로와 페포네? 정치풍자 유머 소설로는 최고수준이다.
비틀거리는 여인
이 우익 파시스트에게 이런 정도의 타자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니. 연하의 남성-유부녀 사이의 내밀한 감정을 얇고 여린 꽃잎 들춰내듯 묘사해내는 미시마 유키오의 감각. ‘도덕’에서 ‘관능’으로, 내부의 격렬한 들끓음이 차분차분한 외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일본적 사랑의 존재론. 다른 우주에 대한 이해, 컴컴한 우물을 들여다보는 기이한 각성의 순간들. 인물의 위치를 반대로, 거꾸로 베껴쓰고 싶은 욕망.
위풍당당
유쾌한 성석제의 귀환, 그는 B급 정서를 가진 동네 양아치를 그리는데 가장 탁월하다. 거기에 맞서는 우직하고 순박한 자들의 원시적 매력까지도.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르는 잡것들이 가족 아닌 가족을 이루고 몸을 부려 하루를 먹고 사는 이야기.

아버지의 자리/포옹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소설가다. <탐닉>과 <단순한 열정>의 이 여자는 자기를 팔아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소설은 한 젊은이를 매혹시키고, 그 놈은 33살 연상의 이 소설가와 연애를 하고, 그 이야기를 팔아 소설가가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지갑에서 툭 떨어지는 동구권 외교관의 그 사진. 넘어설 수 없는 절망의 절벽.
어머니의 연인
처음 읽은 스위스 소설. 미약한 처음부터 창대한 내일에 이르기까지의 헌신과 배반. 이탈리아 북부에서 겪은 무솔리니 군대. 실제와 허구가 교차하는, 부성에 대한 애증,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
소셜 정치혁명 세대의 탄생
그가 한국 출신의 정치학자라는 게 이런 책을 쓰게 했을 터. 언제나 부분에 대한 확대해석은 전망의 과잉으로 나타난다. 징후적 이해로서는 동의할 만하나, 대안적 질서의 창출로는 난망. 언제나 ‘과잉대표’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끝없이 경계할 일.
디지털 시민의 진화
디지털 시민은 격자 속에 갇혀 있다. 광장은 사라지고, 장벽으로 가로막힌 골목에서 ‘애들’이 놀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시민들을 ‘호명’해내었으나, 그 진화는 현재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로막혔다. 디지털 생태계의 변동에 대한 설명은 더할 나위 없이 현장밀착적이다. 인터넷 세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이면서 섬세한 애정이 아니라면 쓰여지지 못했을 것.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글쓰기가 ‘혁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글읽기과 글쓰기에서 혁명은 시작된다는 전언. 과연 혁명은 펜과 종이쪼가리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인식 이전에 구체적 삶이 있었다는 유물론에 대한 공박? 또 한명의 재기발랄한 아사다 아키라를 보는 느낌. 그런데, 왜 일본 젊은 지식인들의 책에서는 사기성이 그리 진하게 느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