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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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소설에서 여자는 성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친밀감의 대상, 말하자면 프렌치키스로 가기 직전의 키스같은 것이다, 라고 쓴 적이 있었다. <제망매>에서 <엘리야의 제야>에 이르기까지 그의 누이 콤플렉스가 그렇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번에 나온 <해피 패밀리>를 보니 이젠 키스를 넘어 섹스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절필을 선언한 마당이니 친밀감을 넘어 아예 근친상간까지 가보자는 것일까. 문학적으로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자를 자처해온 고종석에게 그런 주제는 다소 파격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소설에서만이 아니라 황인숙, 강금실, 그리고 죽은 여자 시인 이윤림 등과 같은 실제의 누이들’(언니들?)에 대한 애정을 표나게 강조해 왔는데, 그것은 애정어린 친밀감의 관계였지 성적 관계를 의미하거나 연상시키는 것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소설인데 뭔 얘긴들 못하겠는가. 고은의 시 폐결핵을 두고 김현이 누이 콤플렉스 운운했지만 이 허풍스런 시인에게도 누이는 없었지 않나.

 

나는 고종석의 소설보다 먼저 그의 기사를 먼저 읽고 익숙해진 세대에 속한다. 그의 언어학이전에 소설과 시에 대한 그의 비평(이라기보다는 기사에 가까운, 비평저널리즘이 맞을 것 같다)을 먼저 읽은 세대인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사회의 문학적 지적 산출물에 대한 고종석의 요령있는 기사를 먼저 읽은 사람의 눈에는 그의 소설이 소설로 보이지 않더라는 얘기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스토리 전개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정치비평, 문학비평, 언어학적 지식을 슬쩍슬쩍 끼워 넣고 있는데, 지적 교양을 풀어 놓으려는 이 유난스러움은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저널리스트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장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유럽 기자 연수프로그램을 다녀온 뒤 써낸 <기자들>도 그러하고, 최인훈의 <회색인>의 후속편을 써내려간 <독고준>도 그러하다. 그러니, 순전히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완미한 단편들이 차라리 더 소설같다는 느낌이다. <해피 패밀리>가 소설로서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이유도 내게는 그러했다.

 

가족, 그러니까 소설 속 한씨네 가족들의 이야기는 이 혈연공동체가 기실은 부스러지기 쉬운 허약한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 공동체와 혈연적 끈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존재(영미)를 좀처럼 내부 구성원으로 허용하지 않으려 하는 완강한 배태성을 속성(민경화-한민주)으로 하고 있으며, 구성원 사이의 불가피하게 존재해야 마땅한 금기를 넘어서려는 위반의 욕망(민형-민희)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자,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서는 끝없는 분투와 노력(민형-현주)을 해야만 하는 집단이다. 게다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상대에 대한 애정과 증오,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원/구심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애정은 때로는 더없이 끈끈하면서도 때로는 서로에 대해 냉담하기도 하다. 이런 공동체가 가족이라는 경계를 스스로 허물지 않고 있는 이유는 위선때문이다. “내 위선은 지혜로운 위선이다. 가족들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위선. 가족들 사이에 사랑을 만들어내는 위선. 비록 그 평화가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위태한 것이고, 그 사랑이 보기에만 아름다운 치장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서현주)

 

언어도 순수한 언어는 없으며, 이종 언어간의 상호작용과 뒤섞임 속에서 감염된 언어로 존재하듯이, 가족 역시 서로 다른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면서도 깨지지 않고 굴러가는 느슨한 연대의 산물이라는 게 고종석이 말하는 가족이다. 그런데, ‘위선을 필연적 속성으로 가지지 않은 가족이란, 아니 공동체란 존재할 수 있을까. 애정과 결속의 힘이 유난히 강력하여 도무지 다른 틈을 허용하지 않은 순백의 가족은 존재할 수 있을까. “완전한 소통과 연대는 불가능하다라는 고종석의 전언도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이 불가피한 위선이 자신의 글쓰기로 향할 때, 그는 돌연 순정한 낭만주의자가 된다. “내 가족에 대해서도, 내 술 친구들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나는 위선자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위선자다. 그러나 글을 씀으로써 그 위선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떤 글도 쓰지 않을 것이다.” 한민형의 말을 빌어 풀어놓는 이 전언에는 =사람이라는 뷔퐁의 격언이 전제되어 있다. 그가 이 소설 첫머리에서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라며 뷔퐁을 부정하고 있으면서 왜 그는 떠들썩하게 일간지에 대고 절필을 선언했을까. 사람이 위선자인데, 글까지 위선을 확장할 수 없다는 글쓰기의 순수주의? 글이란 양보할 수 없는 자존의 영역이어서?

 

말이 나온 김에 고종석의 절필선언에 말해보자면, 나는 좀 뜨악한 편이다. 김주영이 자신의 문학적 역량이 고갈되고 관습적인 글쓰기만을 하고 있다며 절필 선언을 했을 때, 김승옥이 광주이후 절필을 하고 기독교에 귀의했을 때, 한수산이 전두환에게 된통 얻어맞은 뒤 절필선언을 하고 일본으로 (문학적) 망명을 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대체 고종석의 절필선언에는 어떤 내적 절실함이 있단 말인가. 더구나,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그리도 많은 글을 쓴 백낙청이 통일부 중하급 관료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만큼이라도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미심쩍었다.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라고 말할 때는 더더욱 뜨악했다. 아니, 고종석의 글쓰기가 언제부터 세상을 바꾸는일이었던가. 애시당초 그의 글쓰기는 전투성을 내장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 자신도 실천적 글쓰기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이지 않았던가. (이른바 창비 사단에 대한 그의 혐오에 가까운 독설을 보면 더더욱)

 

트위터리안 ‘JS’로서 고종석은 문학적 글쓰기와는 달리 전투적인 글쓰기를 감행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이른바 친노’(혹은 깨시민, 혹은 문빠)에 대한 그의 비아냥은 다소 불편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유쾌하게 그의 트윗을 읽고 있다. 호남, 김대중, 구민주당, 김현과 문지사단, 프랑스의 지적전통에 대한 상대적 호의도 여전히 그의 트윗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인 것 같다. 때로, 그의 전투적인 트윗을 보면 그게 어떤 콤플렉스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다. 호남출신, 서울대가 아닌 후기 성대, 언어학과 대학원에 들어간 법학 전공자(그것도 수료), 프랑스 어/문학 전공자출신이 아닌 프랑스 유학생, 상대적 마이너였던 코리아타임스에서 출발한 기자생활, 진보성향의 기자들이 득시글대던 초기 한겨레에서 보기 드문 자유주의적 성향 등등. , 물론 이는 아무 근거 없는 상상일 뿐이고, 그의 글쓰기가 어디서 연원하든 나는 그를 오랫동안 읽어왔고, 탐독해 왔으며, 그가 절필선언을 철회하고 다시 종이에 쓰여진 글을 썼으면 좋겠다. 콤플렉스는 그의 몫이 아니라 기실 그 자신이 많은 고종석 에피고넨들(나를 포함하여)에게 유발시켰던 심리적 열등감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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