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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다 슈테판 츠바이크를 내리 읽게 되었다. 1장에서 멈춘 채 오랫동안 묵혀 있던 그의 자서전 <어제의 세계> 나머지를 읽었다.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합스부르크 제국 하의 오스트리아, 유태인, 작가, 평화주의자로서 살았던 그의 위치는 참으로 독특하고도 기구한 것이었다. 바로 그 자신의 위치 때문에 그의 삶은 거대한 지각변동을 겪어야 했고, 그를 양육한 과거의 세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여러 나라로 찢겨져 지도에서 사라졌으며, 그의 유태인 친구 동료 친척들은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져버렸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평화주의자이자 양심적 지식인으로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결국 먼 이국 브라질에서 자살을 하는 것으로 꺾여야 했다. 그의 삶은 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특정 세대, 나아가 세계사의 문화적 황금기가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책이 ‘자서전’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인 것과 마찬가지다.
츠바이크는 이 책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1차 대전 이전의 유럽인들에게는 여권도 관세도 필요없었다, 라고 말할 때, 매우 놀라더라는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있다. 과연 그랬다. 그들에게는 ‘국경’의 개념이 없었다. 여행을 하고 싶으면, 괴테처럼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잠든 밤, 홀연히 이탈리아 여행을 갈 수가 있었다. 국경검문소의 불필요한 절차도 필요 없었으며, 검색대를 통과할 필요도 없었다. 이동과 거주의 자유로움은 유럽 지식인들 사이의 자유로운 왕래와 교류로 이어졌고, 츠바이크가 ‘정신의 조국’으로 여겼던 ‘유럽 인문주의’의 세계를 낳았다. 그는 19세기 유럽이 낳은 최후의, 그리고 가장 심층적인 의미에서, 인문주의의 적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히틀러의 등장과 2차 대전의 와중에 유럽정신의 몰락과 파괴를 견딜 수 없다며 자살했을 때, 그와 더불어 19세기의 위대한 정신세계는 종말을 고한 것이었다.
츠바이크가 회고하는 오스트리아, 그 중 빈의 문화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빈은 야만의 문화에 저항하는 라틴문화의 전초기지로서 건설된 당대 유럽문화의 중심지였다. 늙고 쇠약한 제국의 왕이 거주하는 이 도시에는 프로이드, 호프만슈탈, 슈니츨러, 코코슈카가 있었으며, 말러와 쇤베르트, 그리고 글룩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등 ‘음악의 영원한 일곱 별들’이 있었고, 경제학의 오스트리아학파가 있었다. 쇤브룬 궁과 이 오래된 도시를 가로지르는 링슈트라세. 이 도시의 문화를 건설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은 츠바이크처럼 많은 경우 유태인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도시를 지배하는 거대한 도덕적 이중성이었다. 거리에는 곳곳에 창녀가 넘쳐 났으며 숱한 지식인들이 매독의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엄격한 도덕율을 내세웠던 곳. 빈은 성적 억압이 충만한 도시였으니 프로이드의 이론이 여기에서 나온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츠바이크에게 국경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그는 유럽 당대의 문사들과 두루 교유했다. 파리에서는 발레리와 시를 함께 읽고, 로맹 롤랭과 전쟁에 반대하는 유럽 지식인들의 성명을 준비했으며, 베를렌느와 압생트를 들이켰다. 조각에 몰입하는 로댕의 작업을 감동적으로 지켜보았고(“그때 나는 모든 위대한 예술의, 아니 거의 모든 지상의 성취의 영원한 비밀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즉, 집중, 모든 힘과 모든 감각의 응집, 그 무아지경, 모든 예술가가 행하는 자기의 바깥에 있는 것,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그것이다.”), 고독한 은둔자 라이너마리아 릴케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런던에서는 고독한 천재 윌리엄 블레이크와 만나고 1차 대전 와중에는 취리히의 카페에서 제임스 조이스, 러시아의 망명 지식인들과 반전과 평화를 말했다. 이탈리아에는 <새로운 학문>의 그 비코가 있었고, 무솔리니조차 츠바이크의 애독자였다. 세기말 세기초의 이런 풍경은 빌리 하스의 <벨 에포크> 같은 책이나 단 프랑크의 <보엠>같은 소설에서 잘 나와 있다. 그러나, 츠바이크처럼 당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코스모폴리탄으로부터 듣는 회고는 무게감이 확실히 다르다.
창작과 비평 같은 잡지에서 동아시아 지식인 연대를 말하지만, 인터넷도 이메일도 없던 시대에 세기초 지식인들의 연대는 사뭇 감동적인 바가 있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장 크리스토프>의 작가 로망 롤랭이 당대 유럽지식인 사회에서는 지도적 인물이자 지적․윤리적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츠바이크나 롤랭이나 위대한 인물의 ‘삶’에 집착했던 작가이고, 또 그러한 인물들을 통해 인간이 이룩한 문화의 높이와 정신적 성취를 말하려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긴밀한 우정은 이해가 된다. 그래, 어쩌면 이 가볍지 않은 책을 내가 술술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인물의 삶과 그 주변에 대한 오랜 호사취미에 부합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차이를 넘어선 단순한 부러움 이상의 그 무엇이다. 국가와 국가, 상이한 문화권 사이, 서로 다른 문화적 양육의 과정을 거친 지식인들 사이의 연대감각이 1차 대전 이전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관습이자 하나의 문화였다는 것, 이 사실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츠바이크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자각 중의 하나이다.
전쟁으로 인해 이스탄불의 뒷골목으로 피신한 아우에르바하는 참고할 책이 없어 기껏 몇 권의 책을 읽고 읽어 <미메시스>를 써냈다. 2차 대전 이전까지 전세계에서 6천만권 이상의 책이 팔렸던 베스트셀러 저자인 츠바이크는 유럽 최대의 장서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아무런 장서도 없이, 문화적 불모지나 다름없던 브라질에서 오로지 기억에만 의존하여 그가 살아낸 당대 유럽의 문화를 기록한 것은 보기 드문 지적 장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인문주의의 안쪽에는 문화예술의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원천이라는 것, 그리고 평화와 세계시민으로서의 삶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역동적인 서술은 1차대전 직전 빈 거리에 나부끼던 호전적인 광기와 불가해한 전운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히틀러의 등장과 2차대전에 관한 서술은 몰락과 하강의 분위기가 역력하지만, 그 최초의 ‘인류사적 광기’로서 1차대전 직전의 분위기는 한 사회에 전쟁과 파시즘이 어떻게 전염병처럼 감염되어 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진실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이 최초의 군중의 출발에는 뭔가 당당한 것, 감동적인 것, 그리고 매력적인 것까지 내포되어 있어 이것을 피해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에 대한 모든 증오와 혐오에도 불구하고 이 최초의 한동안의 추억을 나는 나의 생애에서 놓치고 싶지 않다. 수천 수십만의 사람들은 평화시에 더 한층 느껴야 했던 일, 즉 그들은 하나라는 것을 이때만큼 느꼈던 일은 없었다. 2백만의 한 도시, 거의 5천만의 한나라에서, 그들은 세계사에 결코 다시 기록될 수 없는 순간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 각자는 그 미미한 자아를 불타고 있는 군중 속에 서로 체험하고 있다는 것, 거기에는 모든 이기심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정화한다는 것을 그때에 느꼈던 것이다. 신분, 언어, 계급의 모든 구별은 그 순간 넘쳐나오는 형제애의 감정으로 덮였다. 낯선 사람들도 거리에서 서로 말을 나누었고, 오랫동안 서로 피하고 지내던 사람들도 서로 손을 맞잡았으며 도처에 생기 넘치는 얼굴이 보였다. 각 개인이 자기 자아의 드높여짐을 체험했고, 그는 이제는 이전의 고립된 인간이 아니었다.”
전쟁에 대한 집단적 광기는 이토록 아름다운 공동체성으로 빛난다. 이 대목에는 파시즘의 속성과 신화가 모두 담겨 있다. 불과 얼마 뒤 그들은 전쟁터에서 “이에 시달리고 갈증에 괴로워하면서 몇 주일을 참호나 진지에서 빈둥거려야 한다는 것, 적은 구경도 못하고 멀리에서 분쇄되고 사지를 절단 당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궁핍과 약탈, 파괴의 나날을 거친 뒤에 조각조각 찢겨져 버렸다. 인상적인 대목은 여성적 섬세함으로 빛나는 시인 릴케가 어울리지 않은 군복을 억지로 입고 츠바이크 앞에 나타난 일, 군국주의의 망령이 한 여리고 섬약한 시인을 어떻게 몰락시키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어색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애처로울 정도로 어색하게 보였다. 옷깃은 너무 답답하게 조여 있었고, 어떤 장교에서나 장화를 찰칵 부딪히고 경례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당황해 했다.”)
히틀러는 츠바이크의 책을 불살랐고, 그가 준비하려던 오페라도 나찌의 심의 끝에 불허되었다. 독일을 벗어나 피신한 런던에서는 망명한 프로이드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며,(“이 살육의 시대에 한없이 죽어가는 희생자들 가운데서도 기념할 만한 죽음이었다. 그리고 우리 친구들이 그의 관을 영국의 땅 속에 묻었을 때, 우리들의 조국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이땅에 바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헌사만큼 육중한 무게감을 갖는 것도 드물 것이다.), 츠바이크는 브라질로 망명한 뒤 이 긴 자서전을 쓰고 아내와 함께 음독 자살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그와 아내의 죽음은 완벽한 체념의 어떤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얼굴을 위로 향한 채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있고, 아내는 그의 목을 안고 얼굴을 품속에 묻고 있다. 절망의 표정이라기보다는 숙명적 체념 같은 인상이다.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과거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성취된 것은 모두 멸망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몸 바쳐 살아온 우리의 고향, 유럽은 우리의 삶을 훨씬 넘어서 파괴되어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뭔가 다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지옥과 연옥을 지나가야 한단 말인가.
태양은 풍부하고 힘차게 빛나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내 앞에 나의 그림자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이번 전쟁의 뒤에 지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보았던 것과 같았다. 그 그림자는 내내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가 밤낮으로 나의 모든 생각 위를 떠다녔다. 아마도 그 그림자의 어두운 윤곽은 이 회상의 書의 많은 페이지 위에도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츠바이크는 유태인답게(?) 자신이 정주하던 곳에서 뿌리 뽑혀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생을 마감했다. 다른 유태인들처럼 시온주의자도 아니었으니 그에게 ‘인종의 조국’은 없었다. 그에게 조국이 있다면 빈 혹은 유럽의 문화계쯤이었을 것이다. 한 개인이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자기의 전부를 투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그의 자살은 히틀러의 광기에 절망한 지식인의 자살이라기보다는 좀 더 큰 차원의 인류사적 자살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말처럼 ‘빛’을 이해하고 경험한 자만이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유럽문화의 절정기를 살아본 자만이 그것의 몰락이 주는 고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장군인, 국경과 세관, 출입국관리소의 직원들로 둘러싸인 ‘국민국가’ 시대에 그와 같은 지식인은 등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라고 말한 이상이 19세기의 본질을 알았을 리 없다. 기껏해야 번역과 수입으로 이뤄진 ‘重譯’의 동경에서 잠깐 그것을 맛보았을 뿐일 것이다. 이 책을 한 여름 더위 속에서 읽었는데, 이런 여름에는 가벼운 책보다는 무겁고 두꺼운 책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오스트리아의 빈과 짤즈부르크는 가보지 못한 곳이다. 츠바이크로 말미암아 세기말 세기초의 빈에 대한 흥미가 생겨났는데, 1장 링슈트라세에서 머물고 있는 <천재들의 붉은 노을 : 세기말 비엔나>를 다시 읽어야 겠다는 의욕이 이제야 샘솟는다. 이것도 부채감이라면 부채감이다. 그런데, 짤즈부르크의 츠바이크 집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의 수많은 수집품들과 장서들은 그대로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