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딱 절반이 끝났다. 이 세월은, 책으로 요약하자면, 빅토르 위고와 괴테,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에서 봄 사이는 다섯권 짜리 민음사판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두 번째 기간에는 괴테의 <친화력>과 그에 관한 벤야민의 <괴테의 친화력>을 읽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6월의 마지막 이틀은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읽으며 이른 더위를 삭혔다. 위고를 읽는 와중에 로베스피에르 평전과 그의 연설문집,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과 같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읽었고, 김형경의 <외출> 같은 소소한 소설들과 업무용 참고도서들과 리포트들을 읽기도 했다. 지금은 어제 책장을 덮은 츠바이크 소설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는 시간이다.

 

<레미제라블>은 스케일과 문장, 스토리와 교양이 백과사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소설이라서 짤막한 리뷰 정도로 마무리하기 어려운 대작이다. 누군가는 1권의 첫 부분에 지루할 정도로 길게 나오는 미리엘 주교에 관한 부분을 보다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말한다. 이 대하소설을 읽느냐 마느냐의 기로가 그 대목인 셈이다. 가난한 자의 친구이자 기독교적 성인의 경지에 오른 그의 삶은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라 하더라도, 도덕적 설교로 범벅된 소설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장발장의 삶을 예비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자, 장발장의 남은 삶의 규제적 원리로 작용하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미리엘 주교를 모델로 삼은 한 사내의 속죄와 자기구원의 드라마다.

 

나로서는 이 소설의 기본줄거리(미리엘-장발장-팡틴-코제트-마리우스로 이어지는 주인공들이 엮어내는 사랑과 헌신의 드라마)외에 주변적인 삽화들이 더 관심이 갔다. 18326월 봉기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바리케이트의 구조와 역사,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 혁명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길고 장황하게 묘사를 한다. 그중 가장 압권은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파리의 하수도에 대한 설명이다. 중세 때부터 건설이 시작된 파리의 지하 하수도에 대한 위고의 묘사와 설명은 그 자체로 도시사회학, 도시건설사에 대한 한편의 작품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런 대목들을 보면서 왜 이 소설은 유독 다이제스트판이 많은지 이해가 되었다.

 

장발장은 기구한 운명 속에서 저지른 사소한 죄 때문에 평생을 속죄와 헌신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그는 초기자본주의 시기에 등장하는 공장제 수공업 시대의 자본가이기도 하다. 그가 공장경영주로서 재산을 모으는 과정이나(자본가로서 그는 구시대의 수공업적인 기술을 대공장제 기술로 대체하는 혁신가다), 자신의 재산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모습에서 그의 자본가적 면모는 아주 두드러진다. 영화에서처럼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혁명을 예찬하고 고무하는 혁명의 서사시가 아니다. 그보다는 한 인간의 속죄와 구원의 드라마,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이야기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을 것 같다. 동시에 그것은 당대 프랑스의 사법제도가 가진 비윤리성에 대한 사회사적 고발이기도 할 것이다.

 

괴테의 <친화력>이 던진 소설적 충격(?)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괴테는 당시 막 싹트기 시작한 근대 화학의 발상법을 빌어 소설을 전개해 나가는데, 그 끝은 고전주의자괴테와 어울리지 않는 끔찍한 파국이다. 그러니까 화학 성분 사이의 친화작용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인위적으로 적용시켰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는 실험자의 의도와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자연의 질서(과학법칙)와 인간 세계의 차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의외성과 배반에 이르기까지 괴테는 그의 다른 소설에서와 달리 냉정하고 가차 없는 비극의 연주자가 되고 있다. 이는 지상의 질서는 괴테식의 진정한 사랑과 불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사랑은 저 너머의 세계에 있다는 인식이다.

 

벤야민의 괴테 해석은 이 소설속 이미지와 상징, 그것의 신화적 의미를 벗겨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가 뛰어난 비평가인 이유는 그의 해석이 표피적인 데 그치지 않고, 그 심층적 의미와 신화적 의미를 끄집어 내어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암시적 문장을 따라가는 것은 여전히 버겁고 머리 아픈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가령, ‘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 : “삶의 카오스적인 요소로서의 물은 여기서 사람들에게 몰락을 가져다 주는 성난 파도의 모습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수수께끼같은 정적속에서 위협한다. 운명이 지배하는 한 사랑하는 연인들은 파멸한다. 단단한 땅의 축복을 스스로 물리치는 곳에서 그들은 정체된 물에서 나타나는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빠지고 만다.” 이 소설의 에두아르트와 오필리에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이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으며, 진정한 사랑은 신화적 세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가차없는 비극적 인식이 차라리 지상의 삶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은 문지의 대산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다. 그의 소설과 평전들은 꽤 오래전부터 애독목록이었는데, 과연 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아들은, 이 소설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2차대전 중에 유럽 인문주의의 몰락을 비관하여 자살한 그의 드라마틱한 삶만큼이나 <낯선 여인의 편지>이래 그의 소설들과 <마리 앙투아네트>,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과 같은 평전들은 언제나 매혹이었다. 프로이드와 아인슈타인도 그의 애독자였고, 2차대전 이전에 유럽에서 6천만권이 팔린 소설가였으니, 하물며 나같은 삼류 소설애호가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 작품인 <어제의 세계>는 일년 이상 2장에서 머물러 있으니, 게으름이 책읽기의 마력을 압도하는구나!)

 

<초조한 마음>연민에 관한 이야기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츠바이크가 작중 인물인 콘도어 박사의 말을 빌어 정리한 연민은 두 가지다 : “그 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주인공인 호프밀러 소위는 불의의 사고로 다리가 마비된 여성, 에디트에 대한 연민으로 그녀의 집을 계속해서 방문한다. 그녀가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을 청하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생기발랄하던 소녀였던 에디트는 이 사고로 인해 신경질적인 환자로 변해버렸고, 백만장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치료하느라 혼신을 다한다. 호프밀러에게는 점점 강렬해지는 연민, 에디트에게는 그에 대한 사랑이 점차 싹트게 된다. 연민과 온전히 양립할 수 없는 사랑은 이 두 사람과 두사람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심리 드라마가 된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절친이자 프로이드가 애독한 책의 저자답게 츠바이크는 이러한 심리를 대단히 탁월하게 묘파해낸다.

 

연민-사랑 사이의 비대칭 속에서 호프밀러는 오락가락한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연민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나아가 그 연민에 대한 책임앞에서도 그는 무기력하고 혼돈스러워한다. 에디트의 주치의인 콘도어의 말을 빌자면, 그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한 채 자신의 몰락과 한 여인의 죽음, 그리고 그 여인의 가족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에디트는 호프밀러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서 환희와 자학, 냉소와 신경증, 독기와 애절함 사이를 숨가쁘게 오간다. 어린아이-환자-성숙한 여인이라는 세 층위를 오가는 여성의 심리를 츠바이크는 매우 섬세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들은 1차대전이라는 전화속에서 파국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양심이 기억하는 한 그 어떤 죄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민이 타자로 향할 때 그것은 소박한 동정에서 그칠 수도, 숭고한 헌신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루카치가 <감정교육>을 분석하면서 말한 환멸의 낭만주의이래, 근대적 개인의 정조를 지배하는 한 정서는 멜랑콜리일 것이다. 그 멜랑콜리는 연민이 타자가 아닌 자신으로 향할 때 발생한다. 그러니까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발생사적 기원은 자기연민이고, 멜랑콜리는 그것의 심리적 표현일 것이다. 연민이 초래하는 이 사랑과 환멸의 막장 드라마, 내게는 자기연민의 내력과 표정들을 성찰하는 텍스트였다는 것을 책장을 덮고 나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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