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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으면서 그가 퇴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무겁고 진지한 소설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노벨문학상 반열에 오르는 작가라면 이제는 <노르웨이의 숲>보다는 좀 더 나은 소설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그의 팬들은 ‘빠’와 ‘반’이 선명하게 엇갈리는 데, 나는 거의 빠에 가까웠고 그의 소설 대부분을 읽어온 처지라 이번 소설이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레이먼드 카버와 피츠제랄드의 순정한 팬인 그가 써온 많은 소설들은, 이들 미국 소설의 문체와 스토리 감각을 자기 식으로 변주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사소설적인 전통에도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경쾌하고 쿨한 그의 소설이 매력적이었고, 그가 만들어낸 소설 속 인물들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하루키가 일종의 팬시상품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팬시상품은 독특하고도 통일적인 캐릭터에 기반한 유사상품들의 목록이다. 그리고 일정한 고정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팬시상품의 캐릭터는 좀처럼 변하는 법이 없다. 헬로키티는 그걸로 아무리 다른 것을 만들어도 헬로키티여야 한다. 하루키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그의 전작들인 <노르웨이의 숲>이거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유년의 기억들, 과거의 흔적들이 오늘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흔적들을 찾고 대면한다는 기본 스토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배경과 인물의 속성들이 조금 달라졌을 뿐 반복은 여전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빠’에서 ‘반’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이 뜨겁고 축축한 여름에 그의 소설은 복잡한 두뇌회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소설이고, 점점 더 부실해져가고 있는 내 두뇌가 소화하기에는 적당한 정도로 가볍다. 하루키의 캐주얼리즘은 역설적이게도 이 지리멸렬의 한국사회가 손쉽게 소비할 수 있는 기호품이다.
<색채>는 단순화하자면 주인공 쓰쿠루의 ‘발기부전 극복기’다. 쓰쿠루는 고교시절 그와 단짝으로 어울리던 그의 친구 네 명으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절교를 당한다. 그가 고교를 졸업하고 동경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 그는 아무런 설명도 맥락도 없이 자신의 소우주와 같았던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이다. 자살충동과 함께 이 젊은 날의 상처를 간직하고 사는 그에게 사라라는 연상의 여인이 찾아오고, 그녀의 충고대로 과거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 결과 그가 알게 된 것은 쓰쿠루의 친구들이 그를 왕따시킨 것은 여리고 섬세했던 멤버 시로(유즈)를 강간했다는, 시로 자신의 ‘주장’ 때문이었다는 것. 이로 인해 이 ‘사춘기 공동체’는 붕괴되고 만다. 과거의 친구들을 하나하나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밝혀지는 사실은,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시로의 우울증과 신경증이 빚어낸 판타지였다는 것이다.
쓰쿠루를 자살충동으로 몰아갔던 이 왕따사건은 이 다섯 명의 공동체가 사춘기의 욕망과 열정을 스스로 통제하고 억압함으로써 유지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소설의 제목으로 쓰인 ‘색채가 없다’는 것은 쓰쿠루의 이름에서 비롯하는데, 이름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 또한 “색채가 없는 잔잔한 바다처럼 중립적인 감정”으로 가득차 있다. ‘색채가 없는’ 그가 합류하여 헌신하고 있는 이 공동체에서 성적인 욕망은 인위적으로 거세되어 있다. 그래서 이 공동체는 성적 욕망의 돌출(강간이라는 의사사건) 앞에 무기력하게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사춘기 공동체에서 욕망의 거세는 인위적인 억압의 산물이며 부자연스러운 절제의 결과다. 아주 프로이드적이게도, 쓰쿠루의 억압된 욕망은 유즈와 에리 두 여자 멤버와의 섹스라는 꿈으로 등장한다. 욕망을 거세한 쓰쿠루는 에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하고, 에리와 유즈 사이의 보이지 않는 욕망의 충동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쓰쿠루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성적인 억제가 불러온 긴장감이 적지 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쓰쿠루는 그렇게 상상했다. 후일 그에게 생생한 성적인 꿈을 꾸게 한 것도 아마 그런 긴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무언가였으리라. 그것은 또한 다른 네명 에게도 무엇인가를(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져다 주었을 지도 모른다. 시로는 아마도 그런 상황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끊임없이 감정 조절을 요구하는 긴밀한 인간관계를 더는 버텨 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결국 멤버 중 한명인 시로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어린 시절의 관계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쓰쿠루에게 ‘섹스’는 없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는 인위적으로 욕망을 거세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되는 연애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새로운 연인으로 등장한 사라와의 정사도 발기부전 앞에 실패하고 만다. 그러니, 그가 과거의 흔적을 찾아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은 거세된 욕망의 시간을 찾아, 그것이 결과한 사건들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 이후에야 그의 발기부전은 치료될 수 있고, 사라와도 온전한 사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하루키에게 ‘성’이라는 코드는 거의 모든 소설에 내재되어 있거니와 이 소설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프로이드의 성적 억압에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성적, 문화적 억압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 소설은 사춘기의 성적 억압에 관한 것이자 프로이드식 치료를 받는 한 사내의 발기부전 극복기, 심리치료를 위한 글로벌한 순례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