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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과 선군정치 - ‘미지의 나라 북한’이라는 신화에 도전한다
헤이즐 스미스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17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마당과 선군정치>의 원래 제목은 'North Korea : Market and Military rule'이다. 그대로 해석하면 '북한 : 시장과 군사정책' 정도가 될 것인데, 이 영어 제목은 우리말로 번역된 '장마당'과 '선군정치'라는 단어의 뉘앙스와 전혀 다르다. 장마당=market, 선군정치=military rule인가? 알려져있다시피, 장마당은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소규모 개인(또는 집단, 기업소) 간의 거래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다. 자본주의적 의미의 '시장'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시장의 초기적 형태, 원초적 형태에 더 가깝다. 선군정치 또한 북한의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채택된 '군사력 우선주의'를 의미한다. 이런 독특한 배경을 가진 '북한식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에서 더 적절한 대체어를 찾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 제목, 장마당과 선군정치는 이 점에서는 아주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북한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위협이면서 화해와 협력, 나아가 통일의 당사자라는 이중적 지위를 부여받아 왔다. '햇볕정책' 10년이 지나 지난 두 정부의 '달빛 정책'이 이뤄지는 동안 북한은 화해와 협력의 대상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위협이라는 지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협력 대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시각이자 그동안의 변화된 남북관계라면, 북한이 스스로 '최대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은 지금의 트럼프 행정부에까지 부시 행정부의 '악의 축'이라는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 않다. 악의 축, 비정상국가, 악마적 제국, 인권유린의 나라, 사악하고 믿을 수 없으며 무자비한 독재국가 등 북한에 대한 수사학은 바뀌었으되 기본적인 시각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에게 북한은 언제된 붕괴될 가능성이 내재한 국가였다. 서구의 시각에서는 지속불가능한, 이해불가능한 국가로서 여기에는 저자에 따르면 북한을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에 있는 무언가"로 생각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헤이즐 스미스는 북한에서 2년여 체류를 하고, 이 지역에 대한 연구를 거듭해온 사람이다. 최근 북한 사회의 변화와 관련해서 이 책은 가장 신뢰할 만한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서구인(미국)이 가진 북한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한 '현장연구'와 실제적인 자료를 가지고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석이 취했던 내재적 시각과 한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외재적 분석틀을 활용하여 북한의 '실상'과 '변모', '평가와 비판'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주류 언론이 크게 의지하고 있던 비정상국가론과 북한붕괴론에서 벗어나 북한사회가 가진 상대적 내구성, 밑바닥으로부터의 변화와 북한 체제 중심 세력의 정치적 군사적 선택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년 동안 읽은 북한 관련 서적 중 얻는 바가 아주 컸다.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만났던 한 북한전문가는 "김정은이 왜 지금 회담에 나선 거냐"라는 질문에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사태의 추이를 보면 그의 진단은 아주 정확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상황"은 '인민경제'가 바닥으로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하여 경제성장에의 욕구가 비등점에 달하고 있고, 이제 활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경제제재에서 벗어나야 하는 형국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비핵화와 체제보장, 경제제재 해제를 둘러싼 '빅딜'은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타개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이같은 북한의 선택 배후에 깔린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아주 적절한 참고서였다.
그는 지금의 북한의 변화를 한마디로 '시장화'라고 규정한다. 북한에서 시장에 해당하는 장마당은 현재 전국적으로 500여개에 이르고, 이는 보다 광범위하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위기 시기인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개인의 사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당과 관료제에 의한 광범위한 국가통제가 이뤄졌다. 그러나 국가가 인민에게 '고통'을 감내할 것을 요구했던 '고난의 행군'은 역설적이게도 인민에 대한 국가통제가 완화되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적영역'을 만들어 냈다. 국영 상점은 더이상 물품을 제공하지 못하며, 국가로부터 받은 배급표는 유명무실하고, 국영기업소는 가동되지 못했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북한 인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야 했고, 스스로 물건을 만들어 '거래'에 나섰으며, 자생적인 장마당이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굶주림과 같은 극한적 상태에서 가족의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은 남자가 아닌 여성의 몫이었다. 장마당의 주역 또한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북한식 시장주의는 싹이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적부문의 팽창과 장마당 경제의 부상으로 북한은 불가피하게 2002년 경제관리개선조치라는 시장 질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북한의 '시장화'는 이제 불가역적인 상황이 되었다. 김정은의 선택 역시 북한 내부의 자생적 시장화를 수락하고, 이를 활성화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인식한데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북한 사회의 내구성, 지배체제의 견고함을 말할 때 '시민사회의 부재'를 꼽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을 고려하자면 북한에 없는 것은 '정치적 시민사회'이지 이미 '경제적 시민사회'는 형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제 북한은 '제국주의에 맞선 애국심'에만 기댈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특히, "청년을 시장화라는 사회적 역학으로부터 격리하려는 선군정책의 노력에도 벼락부자는 청년들에게 새로운 역할모델을 제공했다."(p.319)
이런 점에서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비핵화 협상에 나선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들은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리비아 정권을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고, 재래식 군사력에서도 남한에 한참 못미친다는 점(남한의 국방비는 북한의 연간 총 GDP에 해당한다)을 알기에 핵무장에 착수했던 것. "선군의 논리는 재래식 군사력과 외교수완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정권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대처방안은 '핵무장'이었다."(P.338) 그러니, 오로지 핵 하나로 체제보장과 경제제재 해제, 경제지원과 국교정상화까지 거의 모든 것을 얻어내야 하는 북한으로서는 미국과 그리고 한국과 끊임없이 '쪼개기식 주고받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인 '장사치'의 논리인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시장화, 위로부터의 핵무장과 비핵화 협상. 지금의 북한을 이해하는 두가지 키워드다.
"냉전 기간 동안의 엄격한 명령경제에서 오늘날 시장화된 사회로 변모한 북한의 모습은 계획되거나 예견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아니라 주민들이 외부적 내부적 긴급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이해하는 것으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수백만명의 소상인들이 물품을 교환하고, 거래하고, 판매하면서 민간경제에 전면적으로 참여하는 자기주도적 활동이 아래로부터 그리고 안으로부터 사회를 변모시켰다. 북한 사회의 변화는 외부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북한 주민은 생존하기 위해,그리고 드물게는 번창하기 위해 정부의 통제를 피해가야 했다. 북한 정권이 생명과 생계유지에서 시장화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공식 발표와 실제 생활 사이의 괴리는 심화되었다. 정권은 경제적 고난을 종식시키지 못했고, 북한 주민들은 중국과 남한의 더 나은 생활수준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선군 정권의 정당성이 위기를 맞았다. 남한을 향한 북한 당국의 공격적인 수사는 북한이 남한보다 부유하지 않지만 더 정당성있는 한국임을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측면도 있었다. 오래전 디즈레일리가 언급했듯이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수단이었다."(p.355-356)
이 책의 초반부는 북한에 대한 서구의 일반화된 편견을 꼬집고 있는데, 이 부분은 또다른 의미의 '북한 바로 알기'가 필요한 지점이다. 1)우선 서구언론(그리고 한국의 보수언론 포함)의 보도와 달리 북한의 외교관들은 마약밀매와 위조지폐 혐의로 사법적 판결을 받거나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2)북한의 핵탄두는 8개 내외로 추정되지만 미국은 2200개의 핵을 가지고 있어 비교불가능한 수준이다. 3)벼랑끝 전술은 북한의 특이한 외교행태라고 평가되지만, 세상의 모든 외교는 벼랑 끝 외교다. 4)미국은 북한의 무기수입을 금지시켰고 엄격히 통제했는데, 2013년 북한이 수입하려던 쿠바산 무기가 압류되었을 때, 그 안에는 '카스트로가 혁명을 시도했던 때'에나 쓰던 무기들이 담겨 있었다. 5)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 정부가 인민을 굶겨 죽인 것은 아니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사자는 속출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북한의 출산율은 동남아 국가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6) 어린이들의 보건상태가 고난의 행군 시기 최고조에 이르긴 했어도(체력저하율 15.6%) 곧 5%로 줄었고, 이는 동아시아 평균 4%보다 높은 것이다. 7) 북한의 기대수명은 보도와 달리 69세 정도로 식량부족으로 일찍 죽을 정도는 아니다. 등등
이같은 서구의 언론이 만들어낸 북한에 대한 '악담'은 끝이 없는데, 대체로 김정은 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당과 국가의 통제가 이뤄지고 있기는 해도, '범죄국가'로서 '세뇌된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러한 저자의 기술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가 남한의 친북한 학자이거나 서구 정부의 일원으로 북한에 머무른 외교관이 아니라 독립적인 영국의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일차적 독자들은 '무식하면서도 용감하기 그지 없는 NYT, WP, CNN의 소위 북한 관련 기자들'과 군수산업체로부터 자금을 수혈받는 미국 싱크탱크의 소위 동아시아 전문가들이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