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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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알게 된 작가였다. 뒤틀린 욕망과 서늘한 반전을 보여주었던 영화 <어톤먼트>와 젊은 날의 실수로 평생의 사랑과 행복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청춘들의 이야기 <체실 비치에서>.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는 외모에서부터 심리적 복합성을 드러내는 시얼샤 로넌이 작가의 퍼소나처럼 등장한다. 그의 작품은 묘사보다는 서술이 도드라지는데, 이 서사적 기술은 치밀하고도 정교하며, 차가울 정도로 가차없다. ‘하드 보일드의 원조쯤 되는 토마스 하디의 계보를 잇는 영국 소설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하여간, 뒤늦게 발견한 이 현대 영국작가의 작품을 내리 읽기로 하고 첫 장편으로 <이노센트>를 골랐다. 영화로 만들어진 <속죄><체실 비치>는 다음에 읽을 참이다.

 

작가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소개가 나온다. “‘베를린 터널’, 작전명 골드는 CIAM16의 합동작전으로, 19564월까지 일년이 조금 못되는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CIA 지국장이었던 윌리엄 하비가 책임자였다. 19554월부터 플라타넨 길 26번지에 거주하도 있던 조지 블레이크는 작전 기획위원회 서기로 일하던 1953년에 이미 작전을 누설했다고 추정된다.” 이 냉전 하의 조그만 사건, ‘베를린 터널사건은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베를린이 마악 동과 서로 나뉜 시기, 서방 연합군측인 영국과 미국은 동쪽의 소련 점령 지역 아래로 터널을 뚫어 동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통신을 도청하려 한다. 이언 매큐언은 이 에피소드에 로맨스와 살인, 배신과 회한을 버무려 한편의 잘 빚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냉전 시대의 스파이 소설이면서, 로맨스 소설이면서, 치정과 살인에 얽힌 엽기적 스토리이면서, ‘순진한 한 영국인의 뼈아픈 회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이 소설은 영화화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에 따른 흥행요소를 두루 갖춘 소설처럼 보인다. 그의 소설들이 계속 영화로 만들어지고 일정한 성공을 가져다준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단단하게 서술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이 가진 극적인 재미들, 주인공들의 감정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드러내는 장치들, “두꺼운 타탄체크 스커트와 빨간 미제 캐시미어 스웨터 차림과 같은 정확한(아니 차라리 사실의 나열과 같은) 문장들. 이언 매큐언은 이름 모를 꽃들이라거나 따스해보이는 자켓따위의 두루뭉수리한 서술을 하지 않는다.

 

나이든 탓인가. 주인공 레너드 마넘과 마리아가 약혼을 하던 날 밤, 우연히 저지르게 된 마리아 전 남편 오토의 살해와 시체 유기장면은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우연한 충돌과 그에 따른 구두주걱으로의 살인,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토막을 내고 그걸 베를린 터널로 운반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언 매큐언의 서술은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다. 토막내기라는 행위의 급박함과 심리적 요동은 무정한 서술과 병치되어 효과가 배가되는데, 이를 이끌어나가는 솜씨는 과연, 대가의 그것이었다. 그가 창조한 인물의 다급한 심리와는 정반대로 그의 서술은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일상의 베를린을 서술하고 묘사한다.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소설가라야 가능한 일이다.

 

이노센트는 사실 역설적이다. 레너드 마넘이 순진하게냉전적 대결의 한복판에 서게 되고, 로맨스와 배신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순정을 배반당한다는 의미일 것인데, 그의 비극은 연인 마리아가 배신했다고 믿는 또 한번의 순진함에 있다. 그녀의 진실은 배반이 아니었고, 정작 배반은 그의 순진한 오해가 낳은 참사였던 것. 이언 매큐언은 마치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처럼 극적인 사건들의 시간이 지난 뒤, 먼 시간이 지난 뒤의 에필로그에서 사태의 진상을 후술한다. 심리적 시간의 지속과 그것을 급격하게 단절시키며 과거를 정반대로 재생하는 현재. 이 작가가 뒤늦은 후회와 가련한 회상에 능한 작가라는 사실을 에필로그를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줄리안 반즈, 가즈오 이시구로 이후 가장 즐겨찾게 될 것 같은 영국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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