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익명의 여인 지음, 염정용 옮김 / 마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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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떠올렸던 것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였다. 두 책 모두 2차 대전과 그 전쟁을 몸으로 겪었던 여자들의 이야기다. 전장에서 죽어간 것은 주로 전투병인 '남자'들이었지만, 그 전쟁의 후과를 가장 잔인하게 겪은 존재들은 여자들이었다. 특히 '패전국'의 여자들이 그러했다. 아마도 고대의 전쟁 이후로 모든 전쟁의 양상은 그러했을 것이다. 전쟁이 아니어도 제국의 지배하에 놓인 식민지의 여성들은 제국-식민 체제하의 최말단 '내부식민지'로서 이중적 억압과 폭력 속에 놓여 있었다. 스베틀라나의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주로 '민중'이라면, 이 책의 저자는 지식인 여성이다. 그녀는 독일의 패전과 전후의 상황을 섬세하게 관찰하며, 예민한 자의식으로 러시아 병사들에게 '그짓'을 당한 자신의 경험을 성찰적으로 드러낸다. 


"별안간 국민이 아닌 개인이 되었다."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 포성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쓰여진 문장이다. 이 짧은 문장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진술이다. 국가라는 보호막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에 결속되어 있는 '국민'도 사라졌다. 어제까지 독일의 승리를 떠들던 나치 지도부와 미디어도 없어지고, 쓰라린 패배를 온 몸으로 겪어야 하는 것은 그저 나약한 '개인'일 뿐이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남의 집을 뒤지거나, 추위를 막기 위해 시체에서 신발과 옷을 벗기고, 감자 한알을 두고 서로 아귀다툼을 해야 하는 것은 이제 낱낱의 개별자들이다. 여자들은 정복자들에게 자신의 몸까지 내줘야 한다. 아니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몸'을 빵과 거래해야 한다. 함락직전에도 "구원이 가까워졌으며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그분'은 그리스도 만큼이나 믿을만하다고 장담"하는 나치 광신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통 베를린 시민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이 러시아군에 겁탈을 당한 뒤에야 '패전의 현실'을 깨닫는다. 


"나약한 성이 된 남자들. 여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움튼 일종의 집단적인 환멸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여자들을 지배하던 남자들, 강한 남자를 찬미하던 나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나아가 '남성'이라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에서 남자들은 조국을 위해 죽고 죽일 수 있는 특권이 남자에게만 있다고 주장해왔다. 전쟁은 우리를 변화시켰고 우리는 담대해졌다. 이 전쟁이 끝나면 수많은 패배와 더불어 '남자들'의 패배도 찾아올 것이다."(p.58)


그러니,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군대와 국가의 패배이자 남성성의 패배이기도 하다. 저자의 '애인'이었던 게르타가 나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애인이 쓴 이 일기를 읽고 나서 '겁탈'이라는 말을 듣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이 쳐다보더니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떠난다. 이 책이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고 나중에서야 스위스와 독일에서 출간된 것도 이해가 된다. 한국 남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흥분하고 분노하는 심리의 저변에는 패배한 남성성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한 대목. "러시아 병사가 그녀를 끌어내려 하자 함께 지내던 어떤 남자가 이렇게 외쳤단다. '제발 빨리 따라가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잖아요'" 이를 두고 저자는 "서구 몰락에 대한 간략한 주석"이라고 덧붙인다. 그 몰락한 서구는 '남성성으로서의 서구'다. 러시아 병사들은 동물적 강간을 일삼다가 더 나아가 독일 여성들에게 순정함과 자발적 애정까지 요구한다. "그들은 정복한 향락의 대상에게서 단정함과 순박함과 고귀한 성품까지를 요구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몰락한 남성성 만이 아니라 폭력의 주체인 남성적 시각 저변의 무의식이 이러하다. 


이 내밀한 일기의 주인공은 오랫동안 익명으로 묻혀 있다가 나중에야 기자출신의 마르타 힐러스라는 여성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녀는 유럽 10개국을 여행했으며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할 줄 알고, 공산주의자로 러시아에 머물기도 했으나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전쟁을 맞았다. 그녀는 러시아군의 강제에 의해, 또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 준다.(아니 강제당한다) 그녀 주변의 독일 여성들은 나이가 들거나 어리거나 간에 만나면 서로 "너도?"라고 물을 만큼, 러시아군에 의한 집단강간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당시 270만명의 베를린 주민중 200만명이 여성이었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베를린 여성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선택. "다른 온갖 늑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마리 늑대를 불러들여야 해, 장교를. 가능한 계급이 높아야 겠지. 지휘관이든 장성이든, 내가 데려올 수만 있다면." 전후의 혼란기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인 야만의 세월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한 사망자와 학살자 수를 러시아의 그것과 단순비교했을 때, 베를린의 집단 강간사태는 어쩌면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죽은 러시아 민간인과 군인, 독일의 전격전, 나치친위대가 자행한 동유럽 유대인과 러시아인 학살과 강간은 훨씬 더 광범위했고 피해자도 많았다. 패전 당시 베를린 주민들도 자신들의 겪는 고통이 '인과응보'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 독일인 집에 거칠게 침입한 러시아 병사들은 '아기'를 보자 갑자기 온순해지며 폭력을 멈춘다. 그리곤 독일군이 고향마을에서 아이들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의 머리를 벽에 내리쳐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군인들도 그곳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야." 독일인들은 그들이 저 '농민'의 자식들인 러시아 병사들보다 더 문화적이며 문명화된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실상 독일 군대(그리고 히틀러를 지지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그들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한 독일인들)의 폭력은 그들의 문화가 추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히틀러의 '대중독재'를 탄생시킨 독일적 특수성, 독일인의 기질들을 드러내는 대목들을 문득문득 보여준다. 스스로 낯설게 하기, 또는 자기 객관화할까. 내가 밑줄을 그은 대목들도 대개 파시즘을 가능케한 독일인의 심성구조를 보여주는 부분들이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질서의 원칙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해 있으며, 우리는 따를 뿐이다." "어떤 남자도 여자-자기부인이든 이웃의 부인이든 상관없이-를 정복자에게 내준다고 해서 체면을 구긴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자를 거역해 화나게 만든다고 못마땅해할 것이다." "독일 민족에게는 빨치산 기질이 없다. 우리는 영도와 명령을 필요로 한다.""한 여자를 마주쳤는데, 안마당 구석에서 치마를 까 뒤집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볼일을 보았다. 베를린에서, 독일 여자가 드러내놓고 이런 행동을 하다니." 


"베를린 방송이 흘러나왔다. 방송은 거의 언제나 뉴스와 비화, 피비린내나는 사건, 시신발굴, 잔학행위들을 보도했다. 동부지역에 있는 대형 강제수용소들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불태워졌으며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고 했다. 그들의 시신을 태운 재로 비료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모든 것이 두꺼운 장부들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죽음마저 꼼꼼히 기록하다니, 그야말로 착실한 민족이다. 밤늦게 베토벤의 곡이 흘러나왔다. 잊고 있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나는 방송을 꺼버렸다. 지금은 들을 수가 없다."(p.275) 


저자는 스스로 유럽 여러 곳을 가보았고, 공산주의, 의회주의, 파시즘을 바로 가까이에서 경험한 지식인 여성이지만, '나찌즘'은 그녀에게조차 내면화되어 있다. 파리 여행 중 뤽상부르 공원에서 만난 한 네덜란드 남자와 로맨스가 펼쳐지려는 순간, 그녀는 그와 함께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군인들처럼' 걷기 시작한다. 그순간 남자는 "아, 총통의 딸이군!"이라 말한다. 자신은 네덜란드인이자 유대인이었던 것. 결국 그들은 다음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녀는 이 에피소드를 두고두고 곱씹는다. 그녀는 나치체제에 대한 찬성여부와 상관없이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비록 원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나를 둘러싸고 물들였던 공기를 들이 마셨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그녀의 이 도저한 자기고백과 성찰들이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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