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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점들’, 한 여인의 변덕과 연약함에도 애착을 갖는다. 그녀의 얼굴에 주름살과 기미, 오래 입어 해진 옷과 삐딱한 걸음걸이 등이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지속적이고 가차없이 그를 묶어 놓는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가? 감각들이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다는, 다시 말해 창문과 구름, 나무가 우리 두뇌 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 깃들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이 옳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긴장되고 구속되어 있다. 우리 눈을 못뜨게 하면서 감각은 한무리의 새떼처럼 그 여인의 눈부심속에서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숨을 곳을 찾는 새들처럼, 그렇게 저 감각들은 안전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그늘진 주름살 속으로, 매력없는 행동과 사랑받는 육체의 드러나지 않는 흠들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결을 지나가는 그 누구도 바로 여기 이 결점들, 이 흠들 속에 덧없는 사랑에의 동요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

 -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번역) 44쪽 각주에서 인용

 사랑하는 남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여자의 변덕과 약점에만 애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주름, 기미, 낡아 빠진 옷과 비뚤어진 걸음걸이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그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감각은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창문, 구름, 나무를 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보는 장소에서 느낀다는 설이 있는데,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볼 때도 우리 외부에 있게 된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장하며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채. 현혹된 우리의 감각은 여자의 광휘 속을 새들 무리처럼 빙빙 돈다. 그리고 새들이 잎이 무성한 나무의 은신처에서 보호처를 찾듯이 온각 감각은 애인의 육체의 그늘진 주름, 품위 없는 동작,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 속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안전하게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곳, 결점이 있는 곳, 비난받을 만한 곳에 한 여자를 숭배하는 남자의 화살처럼 빠른 연정이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 <일방통행로> (조형준 번역) 33쪽 ‘알리는 말씀 : 우리 모두 삼림을 보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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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nis 2010-05-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일방통행로> (최성만, 김영옥, 윤미애 번역) p80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모든사이 2010-05-03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시의 '서정적인' 번역과 조형준의 '서투른'(?) 번역과 최성만 등의 '건조한' 번역. 그래도 김남시 번역이 어쨌거나(!) 울림은 더 큰 것 같구만요..

alanis 2010-05-03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구나 어떤 물건을 떠올릴 때면, 그 모양보다는 그와 연관된 기억, 느낌이 먼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삐삐"을 생각할 때면 먼저 떠오른 느낌이 있다. 보통은 음악을 녹음해 두었던 삐삐 인사말에, 어느 춥고 바람 불던 날 술먹고 귀가하다가 쓸쓸한 마음에 음악 대신 진짜 인사말을 녹음하고선 다시 전화 걸어 들었을 때 전혀 낯설은 내 목소리가 주던 그 어색함, 부끄러움, 당혹감, 약간의 공포...

내 귀로 들어가는 내 목소리는 입안에서의 울림과 더해져 달리 들린다는 과학적인 사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른 이에게는 그렇게 인식되는 나를 사실은 나 자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당혹감.... 그 시절 유명한(?) 소설 제목처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라고 당당히 외칠 수 없는 상황.... 내 자신이 온전히 나를 통제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인식은 약간의 편집증, 강박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가뜩이나 평소 대인 관계를 부담스러워 하는 나로서는 또하나의 대인기피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내가 인식조차 못하는 내 모습에 대해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어찌 소화를 할지 막막한 느낌이었다.

벤야민의 글을 곱씹어 읽어보다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이란 구절에서 불현듯 삐삐의 공포를 떠올렸다.

결국은 그 공포감이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였을까? 그 목소리가 말하는 뜻은 같으나 전혀 다른 내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것 또한 내 감정)과 내가 그 말을 할 때의 감정간의 불일치감에서 오는 공포감. 일종의 라캉이 얘기하는 상징계로 넘어가지 못한 감정에 대한 상상계적 혼란이 아닐까?

감정이 실재하며 진실된 순간임을 알지만, 불쑥 떠오르는 감정은 그때 그 전화기속 내 목소리처럼 낯설고, 부끄러우며, 당혹스럽고, 공포스럽긴 여전하다.

모든사이 2010-05-0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하여 감각은 실존하는 것이다. 이 봄날, 미치도록 환장한 꽃 내음 속에서 잠시 우리는 감각의 실존에 몸을 가누고 거기 도취하는 것이다. 순간, 무엇이 있어 이 현전하는 감각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몸을 가누지 못하고 취한 채 그저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흔들리거니. 더 흔들리고 흔들려 제 몸이 따라 흔들릴 때 그 때, 우리는 알게 되리라. 바람의 근원은 결국 제 몸뚱아리인 것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 없는 이 육체성의 현현 앞에 우리는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할지니. 그건 공포라기보다 차라리 넉넉한 긍정이려니. 긍휼스러워 말지어다, 그대여. 언젠가 간직하고 잃어버렸던 맑고 투명한 여의주 앞에, 잠시 엎드려 경배하기를. 라일락 향기가 너무 짙어 그 그늘아래 취했거늘, 관능을 열어 가쁘게 숨쉴 밖에 다른 그 무엇을 탓하겠는가. 주름살이 아름답게 보이는 자, 이제 비로소 지극한 아름다움을 관조할 수 있으려나.

april 2010-05-04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둘이 사귀나봐...여기 분위기 왜 이래요?ㅎㅎ

모든사이 2010-05-0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에 홀려 한잔 한 탓이겠져. 오마르 카이얌의 옷자락 한올 잡았달까? ㅎㅎ

술은 액체로 된 루비, 술잔은 나의 현현
술잔은 육체이며, 그 안의 술은 영혼
술로 흡족해 하고 있는 그 맑은 술잔은
눈물, 그 안에 숨겨진 마음의 피이네
- 오마르 캬이얌, <루바이야트> 중
 

 

3월 셋째주 구입 도서 목록. 요즘 가끔 방문하는 효자동 헌책방 가가린에 산 헌책, 그리고 교보문고와 알라딘에서 산 새 책들. 우선 새 책, 한강이 오랜만에 펴낸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 지성사)과 그녀의 에세이집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열림원) 그녀의 소설은 여전히, 아직도, 고통과 절망과 바닥을 알 수 없는 삶의 얼룩과 비의를 말하고 있을까. 또 예술가를 등장시켜 어둡고 우울한, 어쩌면 칙칙한 세계를 말하고 있을까. 개인의 내면으로, 비극적 가족사로 환원되는 고통의 내력은 여전히 그대로일까. 에세이집은 아이오와 창작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경험을 쓴 것인데, 눈밝고 부지런한 작가들은 어떻게 이 프로그램만 갔다오면 죄다 에세이 한 권 씩을 쏟아내는지 신기한 노릇이다.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한강의 재능들을 발견하는 재미. 그녀는 시와 소설에 이어 작곡과 연주를 하더니만, 이 책에서는 프로수준의 크로키까지 선보인다. 소설가는 글쓰는 것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어야 명작이 나온다는데, 이 친구는 왜 이리 재주가 많은지.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민음사)는 이 작자의 본격 작품은 처음이라서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궁금해서 샀다. 브르통의 ‘작품’은 별로 번역이 안된 것 같은데, 대중성이 떨어져서인가, 아님 지나치게 전위적이어서인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덧없는 행복>(문학과 지성사)는  내가 좋아하는 스펙트럼 시리즈로 나왔는데, 루소에 대한 토도로프의 주석쯤 될 것 같다. 이제 껏 문학이론가, 서사학자로만 알고 있던 토도로프였는데, 정치철학도 나름 섭렵했던 모양이다. 유럽의 변방 불가리아 출신들이 이렇게 잘나가는 거 보면, 그들이 평지돌출이어서가 아니라, 나름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적 후광이 그만큼 커서 인 것 같다는 느낌이다.  
 

토도로프에 이어 또하나의 잘 난 불가리아 출신 작가. 헌책방에서 산 <비잔틴 살인사건>(소담)도 유럽 변방 불가리아 출신 비평가 크리스테바의 작품. 남편 필립 솔레르스도 소설 깨나 썼는데, 마누라인 이 여자의 소설만도 <사무라이들>(솔), <포세시옹, 소유라는 악마>(민음사)에 이어 이 책이 세 번째로 번역된 모양이다. 헌책방에서 발견한 책인데, 추리/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될 이런 소설을 크리스테바가 썼다니, 의외의 수확이었다. 비코의 <새로운 학문>(동문선)은 헌책방에서 보이길래 샀다.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나 그저 소장용으로 샀다. 대학원 시절, 교수가 계속 비코의 중요성을 떠들어 댔었는데, 그는 과연 책을 읽기나 하고 떠들었을까. <한국의 민화> 역시 소장용으로 샀다. 한때 조갑제가 편집장으로 있던 80년대 잡지의 양대산맥인 ‘마당’에서 나온 책. 요즘 헌책방에 가면 이런 ‘그림책’들에 눈이 간다. 책꽂이에 꽂아두고 아무 때나 펼쳐 읽을 수 있는 그림책들. 민화/민속품 하면 야나기 무네요시일텐데, 민화가 재발견된 것은 그의 유산인지, 아니면 60년대 이래의 민족주의 문화연구의 영향 탓인지.

2월과 3월에 걸쳐 펼쳐 놓고 일부 혹은 절반, 혹은 거의 읽었으나 아직 끝마치지 못한 책들. <창작과 비평>(2010년 봄호), <마음의 사회학>(김홍중, 문학동네),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김종대, 나무와 숲), <스토리텔링>(크리스티앙 살몽, 현실문화연구), <여론>(월터 리프만, 현대사상사),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오카모토 다카시, 소와당),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안병길, 동녘), <사회계약론>(루소, 박영사). 리뷰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책은 김종대의 책과 오카모토의 책. 김종대의 책은 참여정부 인사들이 써낸 책중 가장 중요한, 그리고 노무현의 ‘진실’을 가장 잘 증언하고 있는 책일 것이다. 잠들기 전 책을 읽고 있는데, 책장을 넘길때 마다 탄식과 분노, 아쉬움과 허무함을 떨칠 수 없다. 다 끝내지 못하고 다시 내 눈길과 손길을 기다리는 책을 볼 때마다 나는 엄청난 부채감을 느낀다. 갚지 않아도 되는 빚이거늘, 이 마음의 소리는 왜 이리 강박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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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3-24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승자 시인도 아이오와 갔다 와서 에세이집 냈죠
세계사에서 '어떤 나무들은' 이라고.
서울서나 아이오와에서나 생활은 똑같았다는 시인의 말에
외국만 나가면 뭐도 보고 뭐도 해야만 하는 부류와
'참 많이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죠.
뭐, 사실 외국 나간다는 게 장소 바꿔가며 술 먹는 거 아니냐는
생각도 이 책 보다 들게 됐고.

노이에자이트 2010-04-04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터 리프만<여론>은 헌책입니까? 현대사상사 판이 지금도 서점에 나오나요?

모든사이 2010-04-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리프만의 책은 당연히 헌책이지요. 오래전에 구한 책인데, 이제야 읽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현대사상사라는 출판사가 꽤 좋은 책이 많습니다. 사회학자 루이스 코저의 <지성사의 전개>나 신학자 하비 콕스의 <바보제> 같은 책들 말입니다. 현대사상사판 리프만 책을 아시는 것을 보니, 노이에자이트님의 연세도 조금 되시는 모양입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0-04-05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한 10년 전 광주 헌책방에 현대사상사 책이 열권 정도 무더기로 나왔길래 그때 알게 되었어요.제가 보는 책으로만 나이를 짐작하시면 70세가 넘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걸요.헌책방에서 구한 60~70년대 세로줄의 국한문 혼용체 책도 꽤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요.현대사상사 책들은 10년 전까지 기독교 서점에도 있었구요.새 책은 거의 안 삽니다.

모든사이 2010-04-0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본의아니게 실수를 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 역시 60년대 대학생 쯤 되는데 말입니다. 너그러이..

노이에자이트 2010-04-05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헌책을 많이 읽으면 그럴 수 있지요.
 

계절이 바뀌는 건 몸으로 체득하는 일이지만, 책을 사고 읽는 일로 깨닫기도 한다. 내게는 <창작과 비평>가 바로 그런 ‘환절기’의 필수 도서목록. 점심 시간에 교보에 가서 사다. 이명박 시대를 ‘3대 위기’로 규정하고 있는 특집이 우선 눈길을 끌고, 20대 ‘아해’들의 좌담과 백낙청 선생의 ‘포용정책2.0을 향하여’도 들춰보게 된다. 김철과 황종연의 문학적 민족주의 비판에 대한 ‘원로’ 김흥규 선생의 글도 눈에 띤다. 연세가 꽤 되셨을 것인데, 자신의 문학연구의 출발점이자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했는지, 이론적 반격의 서슬이 꽤나 단단하다. 어서 읽고 리뷰를 쓸 것. <문학과 사회> 봄호에는 한강의 신작 소설에 대한 작가대담이 실려서 교보에 서서 들춰봤는데, '비평가' 강계숙과 '소설가' 한강이라는, 나에게는 두 사람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두 사람 모두 예전보다 훌쩍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이준구 교수의 홈피에서 눈에 익은 안병길 박사의 책. 역시 이준구 교수의 서평에 힘입어 사다. 참여정부 초기 임혁백 교수와 정치개혁연구실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참여정부의 지향했던 정치개혁의 방향을 우회적으로 읽어낼 수 있으리라 짐작이 됐다. 첫 머리의 추천사에는 이준구, 임혁백, 정준표 등 무려 세명이나 동원됐다. 저자가 뒷표지의 짤막한 ‘주례사’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 누군가의 평가처럼 내가 ‘도저한 리버럴리스트’라면 ‘자유민주주의’ 라는 언어에 육친적 친화력을 느낄 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은 ‘자유민주’를 자처한 자들이 남긴 트라우마일까. 하여간,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알기”라는 부제를 보니 MB 비판을 바닥에 깔고 있을테고, 문득, 참여정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간들은 왜 이리 책 내고 담론을 개발하는 것을 좋아하나.(3월 9일, 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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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6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사이 2010-05-06 20:11   좋아요 0 | URL
방금 전에 리뷰 이메일로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 나온 14권의 책 중 내가 읽은 것은 8권이다.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대위의 딸>, <광장>, <사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 읽었으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은 <대위의 딸>. 아마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읽었던 듯한 데, 그게 중학시절인지 고교시절인지 모르겠다. <인구론>, <맹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은, 장정일의 어법을 빌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읽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내게 세상에 없는 책이다. 맬더스, 다윈, 베블렌, 조지의 책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지만, 그리고 아마도 이들 책에 관한 2차 문헌들은 보기도 했을 것이나, 정작 책을 읽는 수고로움을 들이지는 못했다. 솔제니친은 <암병동>을 겨우겨우 읽어냈을 뿐이다. 유시민의 독서편력에는 못 미치나 대략 평균수준은 되는 셈이다. 

 유시민은 스스로 ‘지식소매상’임을 자처하고 있는데, 그건 지식세계와 대중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나름의 ‘나와바리’ 선언이다. 과연, 그는 복잡한 책의 미로를 매끄럽게 헤엄치며, 합리적 핵심을 요령있게 정리해낸다. 내가 그에게 질투를 느끼는 바도, 한권의 책을 뚝딱 요리해내는 그의 재기와 그걸 잘 담아 옮기고 있는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다. 고전이 제기한 묵직한 주제들은 그의 손을 거쳐 현대 한국사회의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와 연관된 핵심 사안으로 부활한다. 지식소매상으로서의 솜씨도 바로 여기에서 특장을 발휘한다. 속도감 있는 문체, 책에서 한발짝 정도 더 나아간, 대중적 상식에 최대한 가까운 해석과 의미부여. 그래서 그는 근대적 교양인에 가깝다 

그래서 이 책은 유시민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책이다. 도스토옙스끼에게서 “선한 수단이라야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를, 리영희 선생에게서 지식인의 임무를, 맑스에게서 자본주의 비판의 도덕적 근거를, 맬서스에게서 인종적 편견을, 푸시킨에게서 반동과 억압에 저항하는 힘을, 맹자에게서 도덕적 보수주의를, 최인훈에게서 서글픈 개인의 욕망을, 사마천에게서 권력의 비극적 존재방식을, 솔제니친에게서 인간의 존엄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자연스럽고, 유시민스럽다.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 숨겨진 타자에게 대한 배려(다윈)를 읽어내거나, 베블렌에게서 개혁가로서의 곤혹스러운 자기모습을 대면하는 것도 한발짝 더 나아간 상식적 해석으로서 지극히 타당하다. 카타리나에게서 죽은 노무현의 흔적을 발견하고, 악의적 언론의 해악을 말하는 대목은 정치인 유시민의 현실적 면모와 겹친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재독하는 그가“인간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 그는 근대적 과제의 해결에 몰두하는 ‘근대적 지식인’이 된다.  

유시민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이 언제였던가. 어느날 선배가 전해줬던 <항소이유서>가 아니었을까.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네크라소프의 싯구. 유시민은 이 싯구의 인용내력을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건 다름아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한국어 번역본에 실린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서문에 나오는 인용구의 재인용이었던 것. 유시민이 네크라소프의 원본 시를 읽은 것은 아니라는 것, 네크라소프는 생소한 시인이었던 데다 그의 국내 번역본 시집에도 이 싯구는 없었다는 것. 노문학을 전공했던 영진에게 물었을때 그녀가 답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만하다. 유시민의 섬세한 기억력이 놀라울 뿐.  

책으로 만난 유시민은 아마 <꺼꾸로 읽는 세계사>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영선의 책꽂이에서 읽었던가. 그건 네루의 <세계사편력>이 보여준 역사해석과 유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루가 자기 딸에게 “교양으로서의 역사”를 들려주듯, 유시민은 교양 차원의 세계사를 해석하고, 중계했다. 그것의 연장선에서 선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논술강사 시절, 이 책을 '아해'들에게 읽히고 진보적 역사관을 심어주려 무던히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게 옳아서라기보다, 순전히 논술용 답안 작성을 위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은, 잡지 기사 읽듯 읽어치운 책. 케인즈가 주식투자의 귀재였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까지는 지식소매상이자 교양전수자로서의 유시민이다.  

<대한민국 개조론>은 참여정부의 참모들이 쓴 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이라 믿는다. 사회투자국가를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 이 책은, 참여정부의 지향과 현실적 성취, 안병진이 ‘토플러주의’ 라고 비아냥댄 노무현/유시민의 미래전략을 명쾌하게 보여줬다. 이 책의 주장은 시장경제와 복지국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데, ‘사회(적)자유주의’라는, 모순적 합성명사로 요약되는 전략 탓이다. 시장의 활력을 해치지 않으면서 복지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현실주의적 책략’. 좌파로부터는 복지를 시장에 맡겼다는 비판을(가령, 이태수), 우파로부터는 ‘좌파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비판(조선일보를 비롯한 대다수 꼴통 우익들)을 받으며,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정책가 유시민의 면모를 읽어낼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위태로운 전략은 사실 한국사회의 ‘범진보/개혁진영’이 해낼 수 있는 현실적 정책의 최대치다. 부분적으로 현실화되었고, 대부분이 전략적 비전제시에 그쳤지만 실제로 가장 현실적이면서 많은 성취를 해낼 수 있는 전략이라고 믿는다. 유시민의 탁월한 점은 거대한 명분과 이념을 제거한 자리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내는데 있다. 시장의 역설, 명분과 대의에 입각한 논리가 가져오는 거대한 '반역'을 그는 아주 잘 파악해낸다. 우리나라 ‘진보’의 문제는 ‘시장의 역설’을 보지 못한 채, 아니 외면한 채, 목청높여 노동자/서민을 말하는 데 있다. ‘계급 역투표’를 탓할 게 아니라, 왜 ‘앤서니 기든스’가 안나오는 지를 고민해야 한다. 말하자면, 유시민의 <대한민국 개조론>은 내게 노무현 노선에 대한 주석이었던 것. 그는 왜 장관에서 퇴임한 이후에야 이런 책을 써냈나. 그랬다면, 내가 가졌던 한 3-4년의 오해도 달라졌을 것인데.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정책가 유시민은 다시 한번 정치철학적인 질문, 국가의 존재이유와 역할이라는 주제로 돌아가 한층 성찰적이 된다. 헌법에 대한 ‘상식적 해석’과 ‘실천적 함의’를 읽어내고, 엠비시대가 어떻게 헌법적 가치를 위반하는 지를 살피는 것. 유시민은 엠비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내가 가진 혼돈과 고민을, ‘일반 민주주의’ 수준의 지향과 가치로, 거두절미, 뚝딱뚝딱 싹 정리해낸다. 왜 어째서 악인지 아닌지, 유시민은, 진중권처럼 ‘메롱 전략’을 취하지 않고도, 충분히 진지하게 나를 설득한다. 그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제학 카페>는 몇 장만을 넘긴 채 아직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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