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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딱 절반이 끝났다. 이 세월은, 책으로 요약하자면, 빅토르 위고와 괴테,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에서 봄 사이는 다섯권 짜리 민음사판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두 번째 기간에는 괴테의 <친화력>과 그에 관한 벤야민의 <괴테의 친화력>을 읽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6월의 마지막 이틀은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읽으며 이른 더위를 삭혔다. 위고를 읽는 와중에 로베스피에르 평전과 그의 연설문집,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과 같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읽었고, 김형경의 <외출> 같은 소소한 소설들과 업무용 참고도서들과 리포트들을 읽기도 했다. 지금은 어제 책장을 덮은 츠바이크 소설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는 시간이다.

 

<레미제라블>은 스케일과 문장, 스토리와 교양이 백과사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소설이라서 짤막한 리뷰 정도로 마무리하기 어려운 대작이다. 누군가는 1권의 첫 부분에 지루할 정도로 길게 나오는 미리엘 주교에 관한 부분을 보다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말한다. 이 대하소설을 읽느냐 마느냐의 기로가 그 대목인 셈이다. 가난한 자의 친구이자 기독교적 성인의 경지에 오른 그의 삶은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라 하더라도, 도덕적 설교로 범벅된 소설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장발장의 삶을 예비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자, 장발장의 남은 삶의 규제적 원리로 작용하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미리엘 주교를 모델로 삼은 한 사내의 속죄와 자기구원의 드라마다.

 

나로서는 이 소설의 기본줄거리(미리엘-장발장-팡틴-코제트-마리우스로 이어지는 주인공들이 엮어내는 사랑과 헌신의 드라마)외에 주변적인 삽화들이 더 관심이 갔다. 18326월 봉기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바리케이트의 구조와 역사,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 혁명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길고 장황하게 묘사를 한다. 그중 가장 압권은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파리의 하수도에 대한 설명이다. 중세 때부터 건설이 시작된 파리의 지하 하수도에 대한 위고의 묘사와 설명은 그 자체로 도시사회학, 도시건설사에 대한 한편의 작품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런 대목들을 보면서 왜 이 소설은 유독 다이제스트판이 많은지 이해가 되었다.

 

장발장은 기구한 운명 속에서 저지른 사소한 죄 때문에 평생을 속죄와 헌신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그는 초기자본주의 시기에 등장하는 공장제 수공업 시대의 자본가이기도 하다. 그가 공장경영주로서 재산을 모으는 과정이나(자본가로서 그는 구시대의 수공업적인 기술을 대공장제 기술로 대체하는 혁신가다), 자신의 재산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모습에서 그의 자본가적 면모는 아주 두드러진다. 영화에서처럼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혁명을 예찬하고 고무하는 혁명의 서사시가 아니다. 그보다는 한 인간의 속죄와 구원의 드라마,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이야기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을 것 같다. 동시에 그것은 당대 프랑스의 사법제도가 가진 비윤리성에 대한 사회사적 고발이기도 할 것이다.

 

괴테의 <친화력>이 던진 소설적 충격(?)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괴테는 당시 막 싹트기 시작한 근대 화학의 발상법을 빌어 소설을 전개해 나가는데, 그 끝은 고전주의자괴테와 어울리지 않는 끔찍한 파국이다. 그러니까 화학 성분 사이의 친화작용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인위적으로 적용시켰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는 실험자의 의도와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자연의 질서(과학법칙)와 인간 세계의 차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의외성과 배반에 이르기까지 괴테는 그의 다른 소설에서와 달리 냉정하고 가차 없는 비극의 연주자가 되고 있다. 이는 지상의 질서는 괴테식의 진정한 사랑과 불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사랑은 저 너머의 세계에 있다는 인식이다.

 

벤야민의 괴테 해석은 이 소설속 이미지와 상징, 그것의 신화적 의미를 벗겨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가 뛰어난 비평가인 이유는 그의 해석이 표피적인 데 그치지 않고, 그 심층적 의미와 신화적 의미를 끄집어 내어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암시적 문장을 따라가는 것은 여전히 버겁고 머리 아픈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가령, ‘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 : “삶의 카오스적인 요소로서의 물은 여기서 사람들에게 몰락을 가져다 주는 성난 파도의 모습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수수께끼같은 정적속에서 위협한다. 운명이 지배하는 한 사랑하는 연인들은 파멸한다. 단단한 땅의 축복을 스스로 물리치는 곳에서 그들은 정체된 물에서 나타나는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빠지고 만다.” 이 소설의 에두아르트와 오필리에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이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으며, 진정한 사랑은 신화적 세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가차없는 비극적 인식이 차라리 지상의 삶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은 문지의 대산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다. 그의 소설과 평전들은 꽤 오래전부터 애독목록이었는데, 과연 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아들은, 이 소설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2차대전 중에 유럽 인문주의의 몰락을 비관하여 자살한 그의 드라마틱한 삶만큼이나 <낯선 여인의 편지>이래 그의 소설들과 <마리 앙투아네트>,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과 같은 평전들은 언제나 매혹이었다. 프로이드와 아인슈타인도 그의 애독자였고, 2차대전 이전에 유럽에서 6천만권이 팔린 소설가였으니, 하물며 나같은 삼류 소설애호가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 작품인 <어제의 세계>는 일년 이상 2장에서 머물러 있으니, 게으름이 책읽기의 마력을 압도하는구나!)

 

<초조한 마음>연민에 관한 이야기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츠바이크가 작중 인물인 콘도어 박사의 말을 빌어 정리한 연민은 두 가지다 : “그 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주인공인 호프밀러 소위는 불의의 사고로 다리가 마비된 여성, 에디트에 대한 연민으로 그녀의 집을 계속해서 방문한다. 그녀가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을 청하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생기발랄하던 소녀였던 에디트는 이 사고로 인해 신경질적인 환자로 변해버렸고, 백만장자인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치료하느라 혼신을 다한다. 호프밀러에게는 점점 강렬해지는 연민, 에디트에게는 그에 대한 사랑이 점차 싹트게 된다. 연민과 온전히 양립할 수 없는 사랑은 이 두 사람과 두사람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심리 드라마가 된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절친이자 프로이드가 애독한 책의 저자답게 츠바이크는 이러한 심리를 대단히 탁월하게 묘파해낸다.

 

연민-사랑 사이의 비대칭 속에서 호프밀러는 오락가락한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연민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나아가 그 연민에 대한 책임앞에서도 그는 무기력하고 혼돈스러워한다. 에디트의 주치의인 콘도어의 말을 빌자면, 그는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한 채 자신의 몰락과 한 여인의 죽음, 그리고 그 여인의 가족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에디트는 호프밀러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서 환희와 자학, 냉소와 신경증, 독기와 애절함 사이를 숨가쁘게 오간다. 어린아이-환자-성숙한 여인이라는 세 층위를 오가는 여성의 심리를 츠바이크는 매우 섬세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들은 1차대전이라는 전화속에서 파국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양심이 기억하는 한 그 어떤 죄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민이 타자로 향할 때 그것은 소박한 동정에서 그칠 수도, 숭고한 헌신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루카치가 <감정교육>을 분석하면서 말한 환멸의 낭만주의이래, 근대적 개인의 정조를 지배하는 한 정서는 멜랑콜리일 것이다. 그 멜랑콜리는 연민이 타자가 아닌 자신으로 향할 때 발생한다. 그러니까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발생사적 기원은 자기연민이고, 멜랑콜리는 그것의 심리적 표현일 것이다. 연민이 초래하는 이 사랑과 환멸의 막장 드라마, 내게는 자기연민의 내력과 표정들을 성찰하는 텍스트였다는 것을 책장을 덮고 나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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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였던 그림자

남미판 386세대의 후일담 소설. 혁명은 가고 남은 자는 먹고 살아야 한다. 후미진 뒷골목 주택에서 집단으로 서식하는 이 왕년의 투사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찌질하다. 피노체트 이후 30여년, 이들의 그림자는 길고 우울하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실패한 혁명 이후의 풍경을 보고자 했으나 소기의 목적 달성에는 실패.

 

 

 

 

일단 웃고 나서 혁명

오르한 파묵 때문에 들추게 된 터키 소설. 우디 앨런 소설 이후에 이렇게 유쾌하게 본 소설이 있을까. 풍자는 예리하고 유머는 도를 넘지 않는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동경한 유신의 주역들이 떠오르는 장면들. 군인과 정치가, 언론과 혁명가들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 터키판 돈 카밀로와 페포네? 정치풍자 유머 소설로는 최고수준이다.

 

 

 

비틀거리는 여인

이 우익 파시스트에게 이런 정도의 타자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니. 연하의 남성-유부녀 사이의 내밀한 감정을 얇고 여린 꽃잎 들춰내듯 묘사해내는 미시마 유키오의 감각. ‘도덕에서 관능으로, 내부의 격렬한 들끓음이 차분차분한 외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일본적 사랑의 존재론. 다른 우주에 대한 이해, 컴컴한 우물을 들여다보는 기이한 각성의 순간들. 인물의 위치를 반대로, 거꾸로 베껴쓰고 싶은 욕망.

 

 

 

 

 

위풍당당

유쾌한 성석제의 귀환, 그는 B급 정서를 가진 동네 양아치를 그리는데 가장 탁월하다. 거기에 맞서는 우직하고 순박한 자들의 원시적 매력까지도.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르는 잡것들이 가족 아닌 가족을 이루고 몸을 부려 하루를 먹고 사는 이야기.

 

 

 

 

 

아버지의 자리/포옹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소설가다. <탐닉><단순한 열정>의 이 여자는 자기를 팔아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소설은 한 젊은이를 매혹시키고, 그 놈은 33살 연상의 이 소설가와 연애를 하고, 그 이야기를 팔아 소설가가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지갑에서 툭 떨어지는 동구권 외교관의 그 사진. 넘어설 수 없는 절망의 절벽.

 

 

 

 

어머니의 연인

처음 읽은 스위스 소설. 미약한 처음부터 창대한 내일에 이르기까지의 헌신과 배반. 이탈리아 북부에서 겪은 무솔리니 군대. 실제와 허구가 교차하는, 부성에 대한 애증,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

 

 

 

 

 

 

소셜 정치혁명 세대의 탄생

그가 한국 출신의 정치학자라는 게 이런 책을 쓰게 했을 터. 언제나 부분에 대한 확대해석은 전망의 과잉으로 나타난다. 징후적 이해로서는 동의할 만하나, 대안적 질서의 창출로는 난망. 언제나 과잉대표되는 현실에 대해서는 끝없이 경계할 일.

 

 

 

 

 

디지털 시민의 진화

디지털 시민은 격자 속에 갇혀 있다. 광장은 사라지고, 장벽으로 가로막힌 골목에서 애들이 놀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시민들을 호명해내었으나, 그 진화는 현재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로막혔다. 디지털 생태계의 변동에 대한 설명은 더할 나위 없이 현장밀착적이다. 인터넷 세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이면서 섬세한 애정이 아니라면 쓰여지지 못했을 것.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글쓰기가 혁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글읽기과 글쓰기에서 혁명은 시작된다는 전언. 과연 혁명은 펜과 종이쪼가리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인식 이전에 구체적 삶이 있었다는 유물론에 대한 공박? 또 한명의 재기발랄한 아사다 아키라를 보는 느낌. 그런데, 왜 일본 젊은 지식인들의 책에서는 사기성이 그리 진하게 느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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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연 뒤 최근 몇 달만큼 공백이 긴 시간도 드물었던 듯 싶다. 책이 읽히지 않기도 하고, 책을 보고도 끝까지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읽고도 리뷰를 쓰지 못했기도 하다. 개인적인 게으름이 가장 큰 문제이리라. 심란하게 돌아가는 최근 한국사회의 사정도 아마 작용했으리라. 책읽기라는 심모원려(深謀遠慮)는 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도, 우리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도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 것 같다. 두어 해 동안 서양문학의 고전을 읽어온 것도 그래서다. 모두가 앞으로 갈 때, 옆으로 혹은 뒤로 가야 내 공간이 생길 것이라는 헛된 희망 말이다. 최근 읽고도 리뷰를 쓰지 못한 책들은 심모(深謀)를 필요로 하지도, 원려(遠慮)가 생길 것 같지도 않은 책들이다. 네 권의 책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기.

최인석의 장편소설 <연애, 하는 날>(문예중앙)은 남녀간의 사랑과 투기적 자본주의의 일상, 그리고 노동탄압을 적절히 뒤섞어 놓은 소설이다. 그 사랑은 냉혹한 투기꾼과 순정한 노동자 아내 사이의 그것이고, 투기자본은 투기적 과정을 거쳐 한 노동자와 그가 속한 계급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간다. 최인석의 소설의 ‘재미’는 극작가였던 그의 내력이 잘 발휘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 스토리를 드라마틱하게 전개해 나간다. 동시에, 한국 자본주의의 파행성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계급의 삶을 그리는데도 탁월하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도시-상류층의 추악한 일상을 겨누고 있다. 재미있고 책장도 잘 넘어가는데 읽고 나면 답답하고 암담하다.   

 

성석제의 <칼과 황홀>(문학동네)은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에세이다. 1장은 그가 먹은 음식이야기고, 2장은 그가 마신 술 이야기, 3장은 그가 마신 차와 기타 다른 먹을거리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라는 게 그의 전언인 셈인데, 나로서는 그의 구라를 흥미롭게 따라가면서 내가 먹었던 음식들, 내가 들이켰던 술과 술자리의 아우라들을 문득문득 생각해 냈다. 성석제의 글은 그의 소설이 그렇듯이 유쾌하고 즐거우며 때로는 유익하기도 하다. 한물 간 유머를 즐겨 쓰는 그의 너스레가 유쾌하고, 약간의 한학적 지식과 잡식을 보여주면서 늘어놓는 ‘정보’들이 유익하다. 성석제는 동창생이 모인 술자리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구라로 분위기를 주도하는 인물이다. 어차피 술자리 구라이기 때문에 그가 늘어놓는 구라가 정확한 지식일 필요는 없다.

그의 글은 경북 상주라는 시골 소읍 출신다운 촌놈 기질, 70년대적 낭만주의와 바둑, 화투와 같은 잡기, 이백과 두보같은 약간의 한학적 지식이 버무려져 있다. 그의 유머를 이해하는 연령상의 하한선이 적어도 30대 중반이라는 얘기다. 예전에 그가 썼던 예컨대, <위대한 거짓말>(문예마당)이나 <재미나는 인생>(강),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비) 같은 소설도 아마 지금의 장년층 이상에게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20대가 성석제의 문장에서 재미를 느끼지는 어려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동네 형들”에게서 배웠던 자들만이 온전히 성석제의 독자다. 그래서 성석제의 세계는 다소간은 마초적 세계에 가까이 가 있다.

우석훈의 <나와 너의 사회과학>(김영사)는 사회과학방법론에 대한 입문서격의 책이다. 우석훈은 몇 개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는 있지만, 그게 생계유지의 방편은 못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경제학 분야의 ‘생계형 저술가’로 나선 모양이다. 생계형 저술가가 성공하려면 책 자체가 뛰어나야 하는데, 새로운 상상과 접근법은 있어도 정보의 구체성과 서술의 객관성은 조금 의심스럽다. 그가 최근 들어 펴내는 책들은 제 나름의 체계 속에서 집필된 것이겠지만, 대개의 책들이 장광설이 너무 심하다. 이 책도 아주 쉬운 입문서라고는 해도, 불필요한 췌사와 너스레가 너무 많다. 중간까지 읽다 멈춘 <디버블링>(개마고원)도 쓸데없는 구라를 빼면 그렇게 두꺼워질 이유가 없다. 고 김진균 교수의 <사회과학과 민족현실>(한길사)가 수입학문으로서의 사회과학이 민중과 민족의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80년대적 입문서라면, <나와 너의 사회과학>은 발랄한 상상을 촉구하는 21세기적 입문서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가 제시하는 개념이나 방법론이 새롭지는 않지만, 개념의 새로운 해석은 참고할 만하다.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4.0>(컬처앤스토리)은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 시리즈의 단초를 제공한 책이다. 그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서 극복되고, 시장의 문제는 시장에 의해 극복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편다. 좌파의 히스테리도 우파의 오만도 모두 문제이고, 자본주의를 지탱해온 야망, 기업정신, 개인주의, 경쟁 같은 가치들은 여전히 지속하며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사람이 말하는 4.0의 실체는 모호하다.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가 어떤 모습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쉽게 동의되지도 않는다. 더구나, 2008년 경제위기를 초래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합리적 선택’이었다는 주장은 더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당시 미국인들은 나름의 합리적 판단으로 부동산 투자를 했던 것이고 이 판단은 틀리지 않다는 주장인데, 이런 ‘과감한 주장’은 일반적 통념과는 사뭇 다르다. 흔히 말하는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이 책에서는 거부된다. 조선일보의 자본주의4.0의 결론도 기업과 자본가의 ‘기부가 희망이다’라는 허망한 내용이니, 글쎄, 이 러시아출신 경제평론가의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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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편의 글은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다룬 김현미 교수의 논문과 2013년 체제를 주제로 한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의 글이다. 한국 사회의 중산층 이하 계층의 삶이 위기에 처한 이유와 대안적 모색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계몽적이다. 민주정부 10년은 물론이고 보수정부 4년에서도 삶의 위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나아진다’는 것이 경제적 삶의 풍요든, 문화적 삶의 질이든, 일상의 행복이든, 분야와 방향에 상관없이 현실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지나친 비관론인가. 이른바 ‘안철수 현상’은 한국정치의 제도화 수준이 그만큼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 밥 먹는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깽판은 겨우 이 정도의 문제조차도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나는 별로 이 나라의 국민이고 싶지 않다.

김현미는 하우스 푸어 등으로 대별되는 중산층의 위기가 ‘재생산 위기’라고 말한다. “한국의 빚더미 중산층은 사회적 재생산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빈곤계층의 삶의 불안정성과 위기도 문제지만, 중산층의 위기를 심각하게 토론해야 하는 것은 중간 정도의 자산가 계층도 이제 스스로의 재생산을 이루어내지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삶의 재생산 영역이 급격하게 시장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장화 상황 속에서는 인공출산, 산후조리원, 육아, 사교육, 취업 사교육, 취업과 사회적 삶의 상승을 위한 건강과 패션(성형, 스타일), 장례와 상조서비스까지 모든 것에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해야 한다. 중산층의 재생산 위기는 바로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진다. “재생산 영역의 상업화는 인간의 물적, 감정적, 인지적 존재성 자체를 아웃소싱하여 개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70년대 석유파동 당시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저 먼 아랍세계에서 벌어진 일로 시골마을의 전등을 호롱불로 교체해야 했다. 아마도 한국민이 세계화를 몸소 체감하게 된 것은 바로 이 1차 석유파동이 아니었을까. 가보지도 않은,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의 일이 시골 무지렁이의 삶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의 확인. 2008년 초 미국발 금융위기도 그렇고, 지금의 유럽 재정위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세계화라는 구조속에서의 우리의 삶은 더욱 심각한 불안정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김현미에 따르면, 그것은 재생산 위기를 타개해보려는 ‘개별화된 가족전략’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노동자는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고, 이를 메우기 위해 시장에서 물질적/비물질적 재화를 구매한다. 가계대출금 상환과 높은 사교육비 때문에 재정난에 빠진 중산층은 다시 주식, 펀드, 부동산 등 불예측성이 높은 재테크에 몰두하거나 맞벌이, 겹벌이 등을 통해 소득을 증가시키고자 한다. 안정성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 분야는 가장 투기적이고 불예측적인 시장상황에 의해 그 질이 좌우되는 불안정한 영역으로 전락했다.”  

그러니까, 월급으로 '비용'을 지불해 사회적 삶을 재생산하기 어렵게 된 중산층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주식과 부동산에 손을 대 '투기적 돈벌이'에 나서게 되고, 그러다 세계경제의 위기라는 또다른 복병을 맞아 워킹푸어, 하우스푸어로 전락한다는 얘기다. 이는 굳이 사회학자의 분석을 빌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가 주변에서 몸소 체험한 현실일 것이다. 재생산 위기는 개별화된 노력을 통해 해결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아이들 밥한끼 주는 무상급식도 ‘정치적 사안’이 되는 나라에서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찾기란 어렵다.” 그래, 참 어렵다. 한나라당과 그 당 지지자들이 대오각성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김현미는 “고비용 저효율의 소모전 속에서 끊임없이 공회전을 하는 중산층이 이제 삶의 질과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국가의 책임에 대해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다분히 선언적인 대안에 그치고 있다. 그 정치적 선택의 정책적 결과는 아마도 복지의 확충이 될 것인데,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참으로 요원하다. 사회적 재생산을 개인과 가족이 온전히 감당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사회적 재생산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공적 자원이 투여되어야할 사회적 재생산 영역이 시장에 의해 지배될 때 중산층은 당연히 ‘빚더미’에 오르게 된다.” 그 비용을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가 함께 떠맡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사회적 재생산의 탈시장화, 국가에 의한 사회적 재생산이 이뤄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포스트 MB 시대에 요구되는 대안적 방향이다.   

김대호는 2012년 대선과 총선을 계기로 형성될 ‘2013년 체제’를 전망한다. 그는 지금의 한국사회를 규율하는 것은 멀리는 분단 냉전구조를 형성한 ‘1953년 체제’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상화를 추구한 ‘87년 체제’라고 규정한다. 87년 체제는 어떠한 경제사회 모델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외시하고, 독재권력을 방지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추구하는데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는? “독재방지에 치중한 나머지 공공의 핵심인 정치적 안목, 책임성, 국가경영능력등이 매우 약화된 체제”로서, “정치의 혼미와 무능을 틈타 공공적 마인드는 취약하지만 재력, 조직력, 전문성, 여론조작력 등을 가진 관료, 재벌, 토건족, 언론집단, 직능협회 등의 정치사회적 힘이 급성장” 했으며, “진보적 선출권력은 이 거인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포박, 포섭당하는 위기상황”이라는 것이다.  

MB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완성한 시스템에 박정희적 요소(단속경제)와 현대건설과 서울 시장 시절의 저돌적 추진력과 변칙, 편법“을 결합한 정부다. 김대중 시스템은 기업, 금융, 노동, 공공부문 구조개혁으로 이뤄졌는데, 금융개혁의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은행은 서민과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중개기능을 외면하고 부동산 투기를 위한 자금공급원으로 전락했고, 고용유연성은 대기업과 공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만 관철되었다. 중국특수로 돈을 번 대기업들은 고용을 늘리기 보다는 임직원의 보상을 강화하고, 종업원의 고액연봉을 보장함으로써 노조를 순치시켰다. 대기업 노조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면서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은 급증했다.  

진보좌파는 복지확대, 청년고용할당제와 같은 공공부문의 적극적인 역할, 정리해고 및 비정규직 반대 등의 예외없는 정년보장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과잉자유’에 대한 규제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거창한 명분과 소망과는 달리 현실적 대안이 되기 어렵다. “이 시대 수많은 빈곤과 갈등, 절망, 죽음의 확실한 원흉인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와 시장’은 단지 규제가 적어서, 경제주체들의 자유가 과잉이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김대호의 입장은 거칠게 정리하자면, 진보적 현실주의라는 레테르를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진보좌파의 주장은 ‘새로운 규제’를 통한 대안이겠으나, 그것이 불러올 ‘풍선효과’를 보지 못하거나 외면하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성매매 근절을 위해 집창촌을 철거해야 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현실적 허구’인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가령, 다음과 같은 주장은 진보좌파 내지 시민사회의 주요 세력들이 경청할 만하다. “민주, 노동, 민중, 시민 세력은 보수와 마찬가지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는 큰 그림(국가비전) 없이, 대체로 자신이 부당하게 빼앗기고 억눌려온 약자라는 확신을 깔고 상하좌우(공동체 전체)를 살피지 않은 채 자기 권리찾기에만 매진해온 것 아닐까?” 부당하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것은 정당한 행위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것의 방법론이 역설적으로 부당하게 빼앗는 방식이 되어서는 그 역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른바 진보진영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적 행위에 매우 취약한 사람들이며, ‘결국 역관계가 결정한다’라는 논리로 비타협적 투쟁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것은 잘못된 진단이 아니다. 민노당/진보신당, 민노당과 참여당의 통합 결렬 과정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정치적 갈등의 조정과 타협’에 무능한 인간들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래 맞다, “빼앗긴 권리를 찾아 각개약진만 하면 그것이 곧 공공성이 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아마도 참여정부와 노무현이 좌우에서 협공을 당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을 것이다. 보수는 그렇다치고, 진보진영에서도 비판을 받은 것은, 이 정부의 한계와 실책도 있지만, 비타협적 권리찾기 투쟁만을 소명의식으로 삼았던 많은 진보진영 활동가들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력 결핍’에도 책임이 있다.  이제는 국가의 재구성, 유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김대호의 말대로, 새로운 2013년 체제는 “국가경영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잘 조직된 정치집단과 지식인 집단”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준비된 조직이 있는 집단은 어디인가. 이명박 정부는 “압도적 지지율과 국회의석수, 보수친화적인 검찰과 사법부와 재벌대기업, 시장지배적 언론"이라는 민주화 이래 최대의 호조건 속에서도 "거의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했다." 대기업-거대신문사와 방송-의회를 장악하고도 유능한 정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MB만큼 좋은 여건(?)을 가진 집권세력은 아마 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하게도 안철수 역시 국가를 재구성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들 수 있는 집단이 없고, 민주당도 그러하다. 현재의 진보정당에게 '유능한 정부'를 기대하기란 더더욱 난망하다. 김대호는 ‘자아성찰, 지공무사와 구동존이’의 정치적 상상을 말한다. 포스트 MB시대의 대안적 방향으로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겠으나, 막상 현실로 눈을 돌려보니 여전히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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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리 2011-09-2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김대호 소장의 글은 실천문학 2011년 여름호에 게재된 백낙청 선생님의 '2013년 체제를 준비하자'와 프레임이 비슷한 것 같네요.. 백낙청 선생님의 저 글에서 김 소장님의 2010년 다른 글을 몇번 인용하시긴했던데.. 저는 제 얘기(?)같아서 그런지 엄기호 선생님의 '이게 사는 건가';;; 글을 재밌게 봤어여~ㅎㅎ

모든사이 2011-09-29 21:5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백선생의 2013년 체제론에 대한 구체적 응답형식으로 쓰여진 글 같으니 아마 프레임이 비슷하지 않을까. 엄기호, 이 양반은 차암 글을 잘 쓰는 것 같다는 생각. 너절한 인터넷 논객에 비해 성찰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네.

미국사람 2011-10-1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래간만에 왔는데 책을 읽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글을 잘 쓰시는 군요. 일딴 꾸벅...

창비는 안읽어본지가 10년이 훌쩍 넘는군요. 구하기 힘든 곳에 살아서.. 요즘도 70-80년대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대충 보니 딱딱하기는 예전과 마찬가지. 대학시절 참으로 힘겹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용이 아주 비관적인데 하긴 80년대는 어땠읍니까? 주변에 감방가는 애들로 넘쳐났었는데요. 그러니 너무 비관은 하지맙시다. 그리고 다음 정권은 누가 잡더라도 이명박보다는 낳을 것이라 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네요.

모든사이 2011-10-24 18:13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방문 감사드립니다. 제가 요즘 리뷰를 별로 올리지 않아 읽을 만한게 별로 없을 텐데... 비관이라, 네 그렇네요. 턱없는 낙관보다는 차라리 비관이 나은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만. 세상이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지겠지요? 내일 모레 선거 결과를 보면 이런 소박한 낙관이 맞을지 그렇지 않을지 알게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알라딘이 종로에 새로 오픈한 헌책방에 다녀왔다. 종로에 있는 대형 헌책방이라...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보통 헌책방은 도심이 아닌 부도심이거나 변두리에 있게 마련이고 퇴락한 분위기와 머리가 허연 주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분위기가 대부분이기 때문. (신촌의 정은책방은 매장을 열 때부터 주인과 인사를 트고 지냈는데, 까맣던 머리칼이 그새 허옇게 변해 있었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고, 그래서 지금 더 헌책방 스럽다.) 그런데, 알라딘의 종로 헌책방은 깔끔한 분위기에 잘 정돈된 서가, 헌책 보다 더 많아 보이는 새 책들, 그리고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헌책방이라기보다 출판사의 재고처리용 매장 같았다. 

누군가는 이 곳이 '종로서적'에 대한 향수를 마케팅으로 끌어들였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 진단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교보에 비해 매장 넓이나 구비된 책의 절대적 양에는 못미쳤지만 옛 종로서적은 푸근한 분위기가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양우당 서점도 그랬다. 종로에서 시위를 하다 종로서적 뒷골목으로 도망쳤을 때, 시위대가 건물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셔텨를 내려 전경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줬던, 마음씨 좋은 건물 수위 아저씨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종로서적이라는 이름은 그런 향수를 풍긴다. 알라딘 헌책방 손님의 상당수가 나이든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런 진단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곳은 다수의 한국·일본·서구소설들. 빈약한 인문사회과학서, DVD와 CD 매장, 깔끔한 실내와 탁트인 쉼터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이빠진 세계문학전집(펭귄판, 문학동네판),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일본 현대 작가의 소설들이 많이 보였다. 열린책들이나 현대문학에서 나온 소설들도 많았다. 인문서나 사회과학서들은 이미 철지난 것들이거나 그다지 내구성이 없어 보이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컨대, 매력적인 도서목록을 갖춘 곳은 아닌 셈이다. 더구나 출간된 지 5년 내지 10년 미만의 책들이 많아서 헌책방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 나남출판사판 <겐지이야기>, <아르센 뤼팽 전집> 몇 권,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세 천황이야기> 정도를 샀다. <겐지이야기>는 한길사판과 나남판, 그리고 수 십년 전에 나온 판본 세 가지가 있는데, 각기 1권만 갖고 있던 터라 이참에 2, 3권을 추가로 샀다. 일본의 천황에 대해서는 <근대 일본의 천황제>(이산)와 메이지 유신에 관한 다수의 책을 흥미롭게 본 바 있어 저절로 손이 갔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세명의 천황을 다루고 있는데, 번역자가 근대일본에 정통한 일본사 전공자여서 신뢰가 갔다. 허명 뿐인 천황이 이 세명의 근대천황을 거치면서 어떻게 ‘발명’되고 ‘무책임의 구조’가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일본근대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서 가와바타의 <잠자는 미녀>를 꺼냈다. 이 사람은 가스배관을 물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유미적 취향으로는 늙음이 주는 육체의 퇴락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그렇듯이 일본 작가의 자살에는 자신의 미학과 이데올로기, 삶에의 태도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물론,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그럴 수 없지만 말이다. <잠자는 미녀>는 어쩌면 늙음의 추레함을 견딜 수 없었던 가와바타의 내면을 짐작케 해주는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67세의 노인이 사창가를 찾아 다섯 명의 젊은 아가씨와 차례로 잠을 자는 이야기.

이 소설에서 섹스는 한 장면도 나와 있지 않지만, 에로틱한 분위기가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그 에로티시즘은 깨어있는 노인과 잠들어 있는 젊은 여자의 선명한 대비에서 온다. 67세의 노인 에구치는 사창가를 방문하는데, 그곳의 규칙은 섹스는 안되고 깨지 않고 내내 잠만 자는 젊은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잠자는 미녀를 깨워서도, 장난을 쳐서도 안된다. 에구치는 그렇게 이곳을 다섯 번 방문해 모두 여섯명의 여자와 잠을 잔다. 그 중 한번은 잠자는 두명의 여자와 함께였다. 에구치의 노인됨은 여자의 싱싱한 몸과 대비되어, 노년의 추레함이 도드라진다. 동시에 이것은 남자의 능동성 대 여자의 절대적 수동성의 대비이기도 하다. 무방비 상태로, 옆에 누가 있는지, 밤새 자신과 같이 잠을 잔 사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잠을 자는 미녀(들), 그러고 보니,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여성은 일본식 에로영화의 단골 소재다.

여인들은 에구치에게 어떤 응답과 대응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 이상의 관계와 그 관계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서사’는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에구치의 내면으로 향한다. 그의 옆에는 진홍빛 비로드 커튼 아래서 알몸으로 잠을 자는 여인이 있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도, 섹스를 할 수도,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나눌 수도 없다. 에구치는 다만 여인을 바라보고 가만가만 만져보고, 몽상에 젖을 뿐이다. 이 몽상은 그가 노인이기에 과거로 향한다. 그가 첫 키스를 했던 여인, 결혼식 뒤 아내와 함께 자신의 집에 도착했을 때 보이던 만발한 꽃들, 출장간 지방에서 만나 잠시 외도를 했던 젊은 여인. 이 소설의 재미는 욕망의 존재와 그 욕망의 실현불가능성을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서글프게 보여주는 데 있다. 가와바타이 상상력은 물론 남성 판타지에 입각해 있다. 동시에 지배적인 남성 대 무기력한 여성이라는 비대칭적 성-권력의 발현이기도 하다. 가와바타의 ‘미학적 상상’은 이런 정치적 독해를 빨아들일 만큼 독하다.

이 소설과 함께 실린 <한 팔>도 판타지이긴 마찬가지인데, 이 역시 욕망의 극단적 형태로서 ‘육체성의 소유’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한 팔을 떼어준다. 살아있는 여인의 한 팔을 품에 안고 집에 돌아온 남자는 여인의 팔과 대화를 하고, 자신의 팔을 떼어 그 자리에 여인의 팔을 붙이기도 한다. 여인의 모든 것은 오로지 한 팔에 집약되어 그녀의 모든 것을 대신한다. 욕망이 어떤 극한에 이르면 대상의 모든 특성이 집약된 어떤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를 것이다. (프로이드의 전치(displacement)?)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한 부분에 집약시켜 그것을 욕망의 대상에게 헌정하는 것. 결혼식 반지는 이것의 상징적 의례 도구이리라. <설국>의 작가다운 지극히 탐미적인 소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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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11-17 0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래전에 나카무라 신이치로라는 작가의 <아름다운 여신과의 유희>(유숙자 옮김, 현대문학)라는 소설을 읽은게 연상되네요.. 정명환 선생이 그 소설에 대해 아주 진지한 비평을 쓰신걸 봤는데, 잘 공감은 안됐지만 노년까지도 성문제란 중요한 문학적 테마구나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