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벨기에의 대학도시 루뱅’(Leuven)의 시청광장 한 구석에는 청동으로 된 한 사람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실물보다 작은 크기의 이 동상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골목 앞에 있어 잘 눈에 뜨이지 않는다. 사제복을 입고 천상의 고고한 이상을 동경하듯,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 동상의 주인공이 남긴 흔적은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등 거의 전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바로 중세 최대의 인문주의자로 불리는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EU가 주관하는 대규모 교환학생 및 장학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프로그램도 바로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에라스무스는 태어난 고향의 이름을 붙여 에라스무스 폰 로테르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1466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한 신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가 살던 15~16세기는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발견,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마젤란의 세계 일주가 이뤄졌던 시대, 기사도의 몰락과 도시의 발전, 종교개혁의 서막이 올랐던 대격변의 시대였다. 그는 부모가 죽은 뒤에 수도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수도사 생활을 하다 25살에 카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사제는 교구에 매여 있어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지만, 에라스무스는 캉브레(Cambrai) 지역 주교의 비서가 되면서 수도원 밖에서 생활을 하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유럽 최대의 인문주의자이자 세계주의자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였는데,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삶은 에라스무스의 전 생애를 특징짓는 것이기도 했다. 1495년에는 파리에 머물면서 파리대학 신학부에서 공부를 했고, 영국으로 건너가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를 비롯해 영국의 인문주의자들과 깊은 교류를 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도 대학을 다녔고, 베네치아의 한 출판사에서는 책을 쓰며 지냈으며, 벨기에 루뱅에서도 글을 쓰며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가 학자로서 명성을 얻자 수많은 대학들이 그를 초빙하려 했으나 그는 차라리 베네치아의 인쇄소 교정원을 택하거나 영국 귀족의 가정교사나 부자집 식객으로 살기를 원했다. 만년에 그는 스위스의 바젤에 정착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그의 초상은 이 시기 당대 유럽 최대의 초상화가였던 한스 홀바인이 그린 그림이다.


<사진 : 루뱅시 광장 귀퉁이에 있는 동상>


그가 세계주의적 정신, 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이같은 자유로운 정신과 다양한 곳에서의 학문연구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 나라에도 정주하지 않았고, 머무는 곳은 모두 고향으로 알고 지낸, 최초의 의식 있는 세계주의자이자 유럽인이었던 그는 결코 다른 나라에 대한 어느 한나라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국가와 인종, 계층으로부터 선별한 고결한 사람들을 커다란 교양인의 동맹체로 불러 모으는 것, 이 숭고한 시도를 그는 자기 삶의 본래 목표로 받아들였다.”(스테판 츠바이크) 유럽지역의 대학생들에게 지역과 대학의 범위를 넘어 자유로운 학문연구의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종교개혁과 우신예찬’, 루터와의 갈등


에라스무스가 인문주의자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라틴어 인용문을 모은 <격언집 Adagia>를 출간하면서부터. 이 책은 식자라면 라틴어 문구 하나쯤은 인용해야 대접받던 당시의 지적 속물근성과 맞아 떨어져 전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자는 단순한 인용문 모음이 아니라 고전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해석과 논평이 덧붙여진 것이었는데, 르네상스가 그리스 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 인문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참고서가 되어 중세의 지적 세계를 허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격언집>을 출간한 이후 에라스무스는 1511년 영국의 토마스 모어 집에 머물며 일주일 만에 그의 대표작 <우신예찬 Moriae Encomium>을 써냈고, 이어 <기독교 전사의 소책자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를 펴내며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한 복판으로 들어서게 된다. <우신예찬>은 당대 교회에 대한 비판 때문에 금서로 취급받아 상당부분이 삭제된 채로 유통되었고 저자의 이름도 가려져 있었다.


사진 : 한스 홀바인의 에라스무스 초상은 헤라클레스의 업적들이라는 제목의 책에 손을 얹고 있는 그림인데, 에라스무스의 업적이 헤라클레스 만큼이나 위대하다는 존경의 표시를 그렇게 표현했다.


이 책은 우매함이라는 부인을 내세워 풍자적 방식으로 당대 현실을 비판한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바보들'의 목록은 수사학자, 법률가, 철학자, 귀족들, 금전착취자, 신부, 군주, 추기경 등 당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우매함이라는 부인은 가톨릭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명함이 이 분들의 정신을 단 한번이라도 점령한다면 이 성스러운 신부님들께서는 얼마나 많은 보물을 잃게 될까요. 그 엄청난 부, 하나님의 명예, 수많은 고관대작직의 분배, 셀 수도 없는 사면, 그토록 다양한 세금, 향락, 쾌락의 자리에 불면의 여러 날 밤, 단식, 기도와 눈물, 그리고 예배와 수천가지의 다른 힘겨움이 대신 들어서게 되겠지요.” 당대의 가톨릭의 부패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적 비판인 셈이다. 당시 교황을 피를 빨아먹는 거대한 거미로 묘사한 그림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우신예찬>을 통해 종교개혁의 불을 당기고, <기독교 전사의 소책자>를 통해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오로지 성서만이, 인간적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적 방법으로 교황중심의 교회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등장했다. 바로 1517년 비텐베르크의 대학 교회 문에 95개조의 논제를 내걸며 개혁을 외친 마르틴 루터다. 그는 학생시절 눈 앞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성 안나여, 저를 살려주신다면 수사가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한 뒤 실제로 수사가 된 인물로, 가톨릭 교회에 대해 그들은 돈 통에서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간다고 가르쳤다고 비판하며 종교개혁의 불을 당겼다.

초기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친분을 유지하며 종교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공개적인 지지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고, 에라스무스는 교황에게 루터를 파문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대주교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질만큼이나 개혁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달랐다. 루터가 가톨릭 교회와 전면적인 전쟁과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혁명가이자 선동가라면, 에라스무스는 관용과 타협, 공존과 화해를 역설한 온건주의자이자 대화를 통한 해법을 찾는 외교관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강경론과 비타협적 자세가 교회 내 보수 강경세력의 입지만을 강화할 것이라 우려했다.


(사진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가 그린 30년 전쟁의 모습)



탄핵당한 평화, 종교전쟁과 에라스무스


두 사람 사이의 불화와 논쟁은 종교개혁을 둘러싼 방법과 교리상의 논쟁이지만, 동시에 종교전쟁이 임박할 정도로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루터는 교회에 대한 공격을 선동하며 더 과격한 개혁으로 나아가면서 에라스무스를 그리스도의 가장 지독한 적이라 증오하며 결별하게 된다. 에라스무스는 루터파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며, 이후 닥쳐올 종교전쟁의 서막에 대한 두려움을 담아 루터에게 편지를 쓴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분별 있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교만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그리고 폭도와 같은 그 태도가 온 세상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오. 당신의 의지로 인해 이 폭풍이, 내가 그토록 이루고자 싸워왔던 그 화해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나를 분노케 하고 있소.”


에라스무스는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에게만 전쟁은 아름다워 보인다고 말하며, 1517유럽의 모든 국가와 민족들에게서 비난받고 쫒겨나며 죽임당한 평화의 탄핵을 말하는 <평화의 탄핵 Querela pacis>을 출간한 바 있었다. 신교와 구교간의 갈등이 전쟁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평화와 화해를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루터는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장 철회 요구를 거부하면서 결국 파문을 당했다. 1530년 에라스무스의 관용과 타협의 정신에 입각해 신구교간의 화해를 시도했던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도 무위로 끝나면서 유럽사는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긴 살육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의 역사를 상기해보면 현실에서의 에라스무스주의는 결국 패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급진적인 루터파와 기성 교회의 보수적 입장 사이에서 그의 평화와 인문주의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를 황제가 자문위원회 자리를 제공하고, 영국의 헨리 8세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가 초청장을 보내고, 유럽의 다섯 개의 대학이 교수직을 수여하고, 세 명의 교황이 존경의 편지를 보내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국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교도 지도자 토마스 뮌처는 루터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농민군이 수도원과 교회를 약탈하도록 부추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톨릭 도시 루뱅의 시민들은 에라스무스를 루터의 페스트균이라 비난을 퍼부었고, 대학생들은 그가 강의하던 강단을 뒤집어 버렸다. 신교도의 도시인 바젤에서도 그는 쫓겨나야 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혀 고전을 공부하고 해석하는 인문주의를 통해 초국가적 이성’, ‘유럽이라는 공동의 조국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는 대립과 갈등의 와중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에라스무스의 패배는 한 명민한 지성의 실패라기보다는, 대립과 증오, 폭력과 반폭력이 맞서는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일 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 사후 유럽 신구교 국가 내부에서, 또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은 대략 8백만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낸 것으로 추산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이 전쟁이 종결되면서 종교와 양심의 자유라는 근대적 이념이 수립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오랜 고통과 희생 위에서야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유럽이라는 공동의 조국, 에라스무스의 후예들


에라스무스 평전을 쓴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그를 평화사상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의 제자 몽테뉴가 통찰과 관용을 계속해서 전파한다. 스피노자는 맹목적 정열 대신 정신적 사랑을 요구하고, 디드로, 볼테르, 레싱, 그리고 회의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 그들이 동시에 모두를 이해하는 관용을 위해 편협에 맞서 싸운다. 실러의 문학에서는 세계 시민의 정신이 활기차게 일어나고,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요구한다. 톨스토이와 간디, 롤랑에 이르기까지 타협의 정신은 논리적 힘으로 폭력의 자위권 앞에서 자신의 도덕적 권리를 요구한다.” 칸트의 영구평화론, 로망 롤랑의 반전주의와 같은 근대적 평화주의는 바로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통합의 선구자인 장 모네는 2차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3, 유럽이 다시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별국가를 넘어선 국가연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유럽통합운동을 불을 지폈다. 로베르 쉬망, 콘라트 아데나워 등의 정치지도자들이 유럽통합 운동에 앞장 선 것도 이런 배경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와 협력의 질서를 만들기 위한 유럽연합(EU)의 출범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유럽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흘러왔던 에라스무스적인 것에 기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화합과 평화야말로 에라스무스가 평생의 삶을 통해 추구한 가치였던 것이다. 과거 그에게 도시를 떠날 것을 요구했던 루뱅의 시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운 것도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이 갖는 현재성 때문일 것이다.


(사진 :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에라스무스 초상화, 여기서 그는 한손에 잉크를, 다른 손에 펜을 쥐고 있다. 유럽 인문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림)


그가 남긴 유산은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에서 더 뚜렷하다. 1987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2013년까지 300만 명의 학생들이 혜택을 누렸고, 후속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에는 2018년의 경우, 85만 명/95천 개의 기관이 참여해 235백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누리며 유럽 전역의 대학을 누비고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던 유럽이라는 공동의 조국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