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전쟁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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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반드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혹은 갈리아 전기)를 읽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힘들게 라틴어도 배웠지만 막상 라틴어 원전을 고르려고 하니 국내에서 구입하기도 쉽지 않고 아직 짧은 라틴어 실력으로 일일이 사전을 찾아가면서 보기엔 요원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번역본을 찾아보게 되었다. 대표적인 갈리아 전쟁기 번역본으로는 김한영씨가 번역한 것과 박광순씨가 번역한 2권이 존재한다.  

 

 만약 완역본(라틴→한글)이 존재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완역본을 골랐겠지만 아쉽게도 두 권 모두 완역본은 아니고 라틴→영어→한글 이렇게 번역된 중역본이다. 중역이란 필연적으로 오역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좋은 번역본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이면서 해당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번역하는 것인데 아쉽게도 라틴어에 능통하면서도 군사 전문가가 없는 듯 하다. 결국 두 권 중에 한 권을 고를 수 밖에 없었는데 나의 선택은 김한영이 번역하고 사이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이었다.

 

 그 이유는 번역자인 김한영에 대한 신뢰였다. 김한영으로 책을 검색해보면 수많은 책이 나오는데 그 중에 <빈 서판>과 <언어 본능>, <본성과 양육> 같은 명저를 번역해 왔으며 특히 <빈 서판>으로 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 번역상을 수상했다는 점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옮긴이의 글을 보니 영어 번역본 4권과 함께 라틴어 책도 함께 고려했다는 점 역시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였다. 또한 카이사르의 두 번째 단행본인 <내전기> 역시 김한영이 번역한 것만 있고 박광순이 번역한 책이 없다는 점도 일관성을 위해 이 책을 고르게 하였다.

 

 다만 범우사에서 나온 책도 장점이 있었다. 일단 출판사인 범우사는 꾸준히 좋은 역사책과 철학책을 출판하고 있는 출판사였고 박광순 역시 많은 좋은 책을 번역했으며 약 20년 전에 국내에 최초로 <갈리아 전쟁기>를 소개한 것도 범우사였다. 게다가 2006년에 나온 개정판에는 국방과학대학원 교수인 김헌영 대령의 도움으로 당시 로마 군의 편제와 전술 및 무기 등에 대해 추가할 수 있었다는 점은 매력이었다. 만약 <내전기>도 범우사에서 출판했었다면 범우사의 책을 선택했을련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둘 다 단/장점이 있으므로 어느 책을 고르더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책 내용을 살펴보면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약 8년 간의 갈리아 전쟁을 1년마다 1권씩 서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마지막 8권만은 카이사르가 직접 쓰지 못하고 친구이자 참모였던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 명심해야 할 점은 카이사르의 정치 선전을 위해 이 책이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일기와 달리 회고록 형태인 이 책은(기원전 52년 경 카이사르는 이 책을 썼다.) 아무래도 자신의 잘못은 가리되 치적은 과장하는 형태를 필연적으로 취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 카이사르는 삼두 정치가 끝난 후 폼페이우스와 정치적 대립 중이었으므로 단순히 후대에 기록을 남기겠다는 의도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 강화를 위해 이 책을 저술했다는 것이 일치된 학자의 견해이다. 하지만 자신을 '카이사르'라고 3인칭으로 지칭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갈리아 전쟁을 바라보려고 한 것 같다.

 

 비록 서술이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유일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그리고 게르마니아를 서술한 책이라는 점과 카이사르의 '간결함, 고상함, 명료함'을 느낄 수 있는 문체와 카이사르의 전투기술과 리더쉽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현재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만 나는 카이사르의 문체가 간결하고 명료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고상하다는 점은 느낄 수 없었으며 이 책은 전투기술에 대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음이 명확하다. 만약 병법서라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의 기록을 완전히 믿을 수 있다면 카이사르는 8년 간의 전투 과정에서 5년째에 당한 1번의 패배(그것도 자신이 직접 당한 것이 아니고 카이사르 부재시 부하 장수가 당한 패배이다.)를 제외하고는 전승하였다. 이는 무슨 전략과 전술의 승리는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물리쳤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군대 구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승리로 보인다. 즉, 상비군 체제가 아닌 갈리아 인에 비해 많은 훈련을 받고 조직화된 군대 조직과 뛰어난 공성 능력을 가진 로마군의 차이가 전쟁에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 인들은 공격할 때는 두려움을 모르고 공격하지만 한 번 공포를 느껴 전열이 무너지면 도망치기에 바빠 로마 군대의 표적이 되었다. 게다가 상비군 형태를 이룬 로마군대는 언제나 전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지시가 있으면 행군을 통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한 적군을 급습할 수 있었다. 오늘날 많은 전쟁사 연구자들은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게 된 원인은 이런 기동력에 있다고 본다. 이처럼 전투 준비가 완비된 상비군은 전투력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이라고 보여진다.

 

 이어서 로마인의 기술력은 당대 최고라고 보인다. 특히 알레시아 공성전에서 보여준 로마인의 진지 구축 능력은 오늘날 봐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와 같은 진지 앞에서 당시 기술력으로는 단순히 몸으로 돌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이런 진지 구축 능력은 그 중요도가 퇴색하였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탱크가 개발되어 전격전 형태로 이루어진 2차 세계대전 이후 진지 구축보다는 전격전 수행 능력이 더 중요한 전쟁 수행 능력이 되었다.

 

 다만 갈리아 인들의 저항 역시 인상 깊었다. 물론 이 책이 카이사르가 썼기 때문에 로마 중심적이기는 하나 7년째에 갈리아 인들이 자유를 위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점은 인간이 얼마나 자유를 소망하는지 잘 보여준다. 과거로부터 군대를 통해 다른 나라나 민족을 점령하는 것은 성공한 사례가 없다. 인간은 언제나 자유를 소망하는바 모든 억압에서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다만 소수의 성공 사례는 정복자가 직접 그 땅에 정착하는 경우에만 이루어 졌는데 이와 다른 로마의 이런 점령 정책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끊임없는 반란으로 갈리아는 오히려 로마 제국의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결국 서로마 제국은 갈리아 용병 대장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갈리아 전쟁기>는 카이사르 특유의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를 통해 오늘날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쓰여진 책이다. 다만 좀 더 주석과 그림과 지도가 많았으면 하는 것이 아쉽고 특히 수록된 지도가 가독력이 떨어진다는 점은 개정판에서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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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완역본(라틴→한글)이 존재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완역본을 골랐겠지만 아쉽게도 두 권 모두 완역본은 아니고 라틴→영어→한글 이렇게 번역된 중역본이다. 중역이란 필연적으로 오역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좋은 번역본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이면서 해당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 번역하는 것인데 아쉽게도 라틴어에 능통하면서도 군사 전문가가 없는 듯 하다. 결국 두 권 중에 한 권을 고를 수 밖에 없었는데 나의 선택은 김한영이 번역하고 사이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이었다.

 

 그 이유는 번역자인 김한영에 대한 신뢰였다. 김한영으로 책을 검색해보면 수많은 책이 나오는데 그 중에 <빈 서판>과 <언어 본능>, <본성과 양육> 같은 명저를 번역해 왔으며 특히 <빈 서판>으로 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 번역상을 수상했다는 점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옮긴이의 글을 보니 영어 번역본 4권과 함께 라틴어 책도 함께 고려했다는 점 역시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였다. 또한 카이사르의 두 번째 단행본인 <내전기> 역시 김한영이 번역한 것만 있고 박광순이 번역한 책이 없다는 점도 일관성을 위해 이 책을 고르게 하였다.

 

 다만 범우사에서 나온 책도 장점이 있었다. 일단 출판사인 범우사는 꾸준히 좋은 역사책과 철학책을 출판하고 있는 출판사였고 박광순 역시 많은 좋은 책을 번역했으며 약 20년 전에 국내에 최초로 <갈리아 전쟁기>를 소개한 것도 범우사였다. 게다가 2006년에 나온 개정판에는 국방과학대학원 교수인 김헌영 대령의 도움으로 당시 로마 군의 편제와 전술 및 무기 등에 대해 추가할 수 있었다는 점은 매력이었다. 만약 <내전기>도 범우사에서 출판했었다면 범우사의 책을 선택했을련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둘 다 단/장점이 있으므로 어느 책을 고르더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책 내용을 살펴보면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약 8년 간의 갈리아 전쟁을 1년마다 1권씩 서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마지막 8권만은 카이사르가 직접 쓰지 못하고 친구이자 참모였던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 명심해야 할 점은 카이사르의 정치 선전을 위해 이 책이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일기와 달리 회고록 형태인 이 책은(기원전 52년 경 카이사르는 이 책을 썼다.) 아무래도 자신의 잘못은 가리되 치적은 과장하는 형태를 필연적으로 취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 카이사르는 삼두 정치가 끝난 후 폼페이우스와 정치적 대립 중이었으므로 단순히 후대에 기록을 남기겠다는 의도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 강화를 위해 이 책을 저술했다는 것이 일치된 학자의 견해이다. 하지만 자신을 '카이사르'라고 3인칭으로 지칭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갈리아 전쟁을 바라보려고 한 것 같다.

 

 비록 서술이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유일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그리고 게르마니아를 서술한 책이라는 점과 카이사르의 '간결함, 고상함, 명료함'을 느낄 수 있는 문체와 카이사르의 전투기술과 리더쉽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현재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만 나는 카이사르의 문체가 간결하고 명료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고상하다는 점은 느낄 수 없었으며 이 책은 전투기술에 대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음이 명확하다. 만약 병법서라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의 기록을 완전히 믿을 수 있다면 카이사르는 8년 간의 전투 과정에서 5년째에 당한 1번의 패배(그것도 자신이 직접 당한 것이 아니고 카이사르 부재시 부하 장수가 당한 패배이다.)를 제외하고는 전승하였다. 이는 무슨 전략과 전술의 승리는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물리쳤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군대 구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승리로 보인다. 즉, 상비군 체제가 아닌 갈리아 인에 비해 많은 훈련을 받고 조직화된 군대 조직과 뛰어난 공성 능력을 가진 로마군의 차이가 전쟁에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 인들은 공격할 때는 두려움을 모르고 공격하지만 한 번 공포를 느껴 전열이 무너지면 도망치기에 바빠 로마 군대의 표적이 되었다. 게다가 상비군 형태를 이룬 로마군대는 언제나 전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지시가 있으면 행군을 통해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한 적군을 급습할 수 있었다. 오늘날 많은 전쟁사 연구자들은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게 된 원인은 이런 기동력에 있다고 본다. 이처럼 전투 준비가 완비된 상비군은 전투력에 있어서 중요한 조건이라고 보여진다.

 

 이어서 로마인의 기술력은 당대 최고라고 보인다. 특히 알레시아 공성전에서 보여준 로마인의 진지 구축 능력은 오늘날 봐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와 같은 진지 앞에서 당시 기술력으로는 단순히 몸으로 돌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이런 진지 구축 능력은 그 중요도가 퇴색하였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탱크가 개발되어 전격전 형태로 이루어진 2차 세계대전 이후 진지 구축보다는 전격전 수행 능력이 더 중요한 전쟁 수행 능력이 되었다.

 

 다만 갈리아 인들의 저항 역시 인상 깊었다. 물론 이 책이 카이사르가 썼기 때문에 로마 중심적이기는 하나 7년째에 갈리아 인들이 자유를 위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점은 인간이 얼마나 자유를 소망하는지 잘 보여준다. 과거로부터 군대를 통해 다른 나라나 민족을 점령하는 것은 성공한 사례가 없다. 인간은 언제나 자유를 소망하는바 모든 억압에서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다만 소수의 성공 사례는 정복자가 직접 그 땅에 정착하는 경우에만 이루어 졌는데 이와 다른 로마의 이런 점령 정책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끊임없는 반란으로 갈리아는 오히려 로마 제국의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결국 서로마 제국은 갈리아 용병 대장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갈리아 전쟁기>는 카이사르 특유의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를 통해 오늘날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쓰여진 책이다. 다만 좀 더 주석과 그림과 지도가 많았으면 하는 것이 아쉽고 특히 수록된 지도가 가독력이 떨어진다는 점은 개정판에서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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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임응식 - 카메라로 진실을 말하다 예술가 이야기 3
권태균 지음 / 나무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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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책에 대한 리뷰를 쓸 때면 책에 대한 내용에 한정해서 쓰는 것이 정석이지만 이번에는 이른바 대한민국'뽀샵'대전이라고 불리는 최고 권위의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대한민국사진대전은 한국사진작가협회 주최로 매년 실시하는 국내 최대의 사진 대전인데 과거 대한민국사진대전의 입상작들이 거액의 사례비를 받은 한국사진작가협회 임원에 의해 부당하게 선정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 사진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아래의 사진을 보고 합성이라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제28회 대한민국사진대전 대상을 받은 작품으로 '정담(情談)'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이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밝게 웃는 할아버지와 세 어린이의 모습을 찍은 이 작품에 대해 "가족과 인간애를 잘 파악해 부각시킨 수작"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아주 말은 잘한다. 다른 것은 둘째 치고라도 아래 표시된 3번을 보면 아이 밑에 보리밭이 보인다. 그런데 배경은 전부 까만색이다…. 딱 봐도 합성 아닌가? 이 외에도 어설프게 합성하여 그림자가 없는 작품, 구도가 전혀 안 맞는 작품, 인물의 좌우가 축소된 작품 등이 이른바 국내 최고 권위의 대한민국사진대전에서 입상하였다.



 

 대상을 받으려고 한국사진작가협회 임원에게 3000만원을 건내주고 한국사진작가협회 임원은 심사위원을 모텔에 집결시켜 미리 정해진 수상작을 외우게 하는 등 완전 복마전이 따로 없고 대한민국사진대전은 대한민국'뽀샵'대전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합성사진을 골라내기 힘들다면 이를 어느정도 규제할 규정이 필요한데도 규정을 손질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사진대전을 통해 돈을 받아 처 먹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사진대전의 권위는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일찍이 임응식 선생님께서 현실에 바탕을 둔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은 기록과 진실을 담은 예술이어야 한다. 사진은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참혹한 것이든"이라고 말씀하셨는바 한국의 사진 장르를 기록물의 차원에서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창설하신 임응식 선생님께서는 과연 오늘날 한국사진작가협회를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실까? 그리고 앞으로 임응식 선생님의 대표작인 <구직>과 같은 작품을 오늘날 다시 보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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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연대기 3 (양장) - 쇠퇴와 멸망 비잔티움 연대기
존 J.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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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타락한 저급한 제국" 이는 1869년에 출판된 W.E 레키의 [유럽 도덕의 역사]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평가한 문장이다. 이런 견해가 [로마제국 쇠망사]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을 만난 18~19세기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라고 보인다. 이렇게 악랄한 평가는 18~19세기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인들이 외국을 보는 시각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글쓴이의 평가대로 서유럽에서 학문의 빛이 거의 꺼져 있었던 암흑기에 비잔티움 문명이 고대 그리스와 라틴 유산을 대부분 보존해 준 덕분에 서유럽 세계가 큰 혜택을 입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안하무인 격이다. 이를 읽는이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글쓴이의 노력은 이 책을 통해 빛을 발하고 있다.

 

 특히 3권에서는 드디어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와 멸망을 다루게 된다.(소제목 역시 쇠퇴와 멸망이다.) 이렇게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와 멸망은 십자군 전쟁과 콘스탄티노플의 지리적 요건과 교역로의 변화, 대포의 등장과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람들의 이중적 모습이 큰 원인이 되었다. 가장 먼저 십자군 전쟁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십자군 전쟁을 아래와 같은 경로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보면 알겠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십자군 전쟁군이 지나가는 경로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십자군이 말만 십자군이지 실제로는 약탈자였다는 점이다. 같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비잔티움 제국을 지나면서 십자군은 식량을 약탈하고 백성을 학살하며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성전도 약탈하여 수많은 그리스드교 유물이 사라지고 수많은 여자를 강간하는 등 점령군과 다름이 없었다. 이와 같은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수도를 잃고 망명 정부를 세우는 등 더 이상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할 힘을 잃고 말았다. 정말 인간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일으킬 수 있는 전쟁 중 최악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라 본다. 이에 대해서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2권>을 추천한다. 만화책인데다가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 쉽게 십자군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것이다.(다만 1, 2권 다음에 3, 4권은 언제쯤 나올련지….)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의 지형적 위치를 언급할 수 있다. 사실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수도로서 수비하기엔 천혜의 조건이나 공격적으로 제국을 확장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은 도시였다. 언제나 서유럽과 동방 이슬람 사이에서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두 군데 모두를 막기엔 비잔티움 제국은 이미 그 힘을 잃은 상태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은 동방 이슬람 세력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관세 등을 통해 재정을 손쉽게 확충할 수 있었으나 이후 해상 교통이 발달하여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배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기 때문에 제국의 재정은 악화 일로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대포의 등장과 베네치아, 제노바의 이중적 모습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1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콘스탄티노플이 난공불락이었던 이유는 3면이 바다에 접해있어 해로로의 접근이 힘든데다가 육로로는 당시 로마의 기술력이 총 집약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성벽은 안으로부터의 변절자가 있지 않고서는 점령이 거의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점령자인 메머드 2세는 대포를 가져와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 콘스탄트노플은 그 생을 다하게 되었다. 또한,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고 같은 그리스도교의 형제이지만 언제나 교역 이익에만 관심이 있어서 비잔티움 제국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하긴 같은 종교라고 해서 이익이 없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를 흘리라고 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긴 하다.)

 

 이와 같은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글쓴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최후를 굉장히 처절하게 써 놓았지만 이렇게 망한 나라가 한 두개 던가? 나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타락한 저급한 제국"이란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비잔티움 제국이 타락하고 저급한 제국이란 면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당시 시대와 비교해 보아도 수많은 궁중 암살과 음모, 배반이 일어나고 무능한 황제가 유능한 황제보다 많았던 점은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준다. 또한 글쓴이는 <살라딘>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국가에 대해 좋지 않게 보는 듯 하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서유럽을 이슬람 문명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글쓴이의 평가에서도 보이지만 사실 그리스도교는 굉장히 타락한 상태였고 문명이나 문화 수준 역시 이슬람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또한 번역에서도 한 가지 지적해야겠다. 이슬람교의 예언자로 마호메트라고 이 책에서는 표시하는데 마호메트는 영어식 표현이고 아랍어 표시법대로 <무함메드>로 표시하는 것이 옳은 표시법이라 할 것이다.(예컨데 우리가 독도라고 부르는 것을 외국에서 다케시마라고 표시한다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비록 순서는 바뀌었지만 이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통해 전통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을 바라보던 시각을 배워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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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연대기 2 (양장) - 번영과 절정 비잔티움 연대기
존 J.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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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역사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역사, 특히 여러 영웅이 각축을 벌이는 전쟁사는 읽는이로 하여금 재미와 흥미를 선물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재미와 흥미를 원한다면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 책을 읽는 이유는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명제 아래 역사를 통해 오늘날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비잔티움 연대기>는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2권의 소제목은 [번영과 절정]이다. 즉, 여기서는 수많은 뛰어난 황제가 등장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예컨데 테오필루스, 바실리우스 1세, 현제 레오 6세,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 요한네스 치미스케스, 바실리우스 2세 불가록토누스, 이사키우스 콤네누스 등은 비잔티움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위대한 황제들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비잔티움 제국의 위기는 닥쳐오는데 이는 역시 크게 3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제국 안정에 가장 큰 걸림돌은 뭐니 뭐니 해도 권력 불안이었다.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어느 제국보다도 황제의 암살, 온갖 궁중 음모와 쿠테타가 가장 많았던 제국이 바로 비잔티움 제국이었다.(p.645)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황실 핏줄이 끊겼던 적이 많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황제가 능력만 되면 수많은 여자를 거느릴 수 있었던 동양과 달리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세번째 재혼부터는 큰 죄가 되었기 때문에 현제 레오 6세도 후사를 얻기 위해 4번이나 결혼하면서 부득이하게 교회와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뒤를 이은 황제 역시 정통성이란 면에서는 약점을 가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쿠테타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어서 동양과 서양의 종교와 사상 차이라고 생각된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유교의 충(忠)을 강조하여 황권 강화에 이용했던 반면에 서양의 그리스도교는 황제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사상이 부족했는 듯 싶다. 물론 그리스 정교에서는 황제는 12사도와 동급으로 인정 받았지만 적극적으로 백성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그 무엇이 부족한 것 같았다.

 

 이어서 종교 갈등 문제이다. 여기서 드디어 성상 파괴 문제는 일단락 되지만 이제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완전히 분열되게 되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이 단일한 통일 제국을 이루려는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 책에서도 말하듯이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사이의 끗발 싸움은 계속되어 왔었다. 교회법에 따르면 교황이 총대주교보다 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비호를 받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끗발 역시 로마 교황과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비록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서로를 존중하던 중에 편협하고 완고했던 훔베르트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파문시키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역사는 아주 가관이다. 교황이 유부녀와 바람이 나고 교황권을 함부로 남용하며 위선자들로 가득찬 교회는 말 그대로 악의 소굴이었다. 아마 카톨릭이든 기독교든지 지우고 싶은 역사일 것이다. 특히 면세권을 가지는 큰 수도원이 난립하여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국력을 약화시켰는바 이는 오늘날 세금을 면제받는 종교인들 역시 반성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이렇게 말하면 분명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세금 뗀다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펄쩍 뛸 목사님들이 분명 계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힘쎈 자'들 문제였다. 그 당시에도 광대한 토지를 가진 대지주가 많았는데 이로써 평소에는 세금을 내고 전시에는 군인이 되는 자영농이 점점 줄게 되었다. 특히 그들은 황제가 후사가 없이 죽자 꼭두각시 하기 좋은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자영농을 보호했던 법률을 전부 폐기시키고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대지주이자 명문가인 두카스 일족의 안도로니쿠스 두카스는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일부러 황제가 전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로마누스 4세가 셀주크투르크 술탄에게 포로가 되게 하였다. 사실 이 전투는 절대 질 전투가 아니었다. 역사가들 마다 견해가 나뉘지만 로마누스 4세는 최소 6만에서 최대 60만명을 이끌고 있었고 셀주크투르크는 1만 5천 명이 전부였다. 그런데 오직 로마누스 4세가 '힘쎈 자'들의 기득권을 보호하지 않을 군사 귀족 출신 이라는 것 때문에 황제를 배반하였고 그 결과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참패하여 광대한 곡창 지대이자 인구 밀집 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셀주크투르크에게 뺏기게 되어 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내리막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힘쎈 자'는 오늘날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스로 보수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오히려 군대에 가지 않고 원정 출산하고 재산을 해외에 빼돌리는 상황이 비잔티움 제국과 비슷하지 않는가? 이제 마지막 3권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을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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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연대기 1 (양장) - 창건과 혼란 비잔티움 연대기
존 J.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이 양장본 Set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서평을 통해 살펴 본 바 여기서는 제 1권에 대해서만 살펴볼까 한다. 1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르는 것부터 470년 뒤 샤를마뉴(알고보니 이름이 샤를이고 마뉴는 존칭으로 붙이는 말이라고 한다.) 대제가 800년에 서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것까지의 이야기이다. 그 중에서 이 책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크게 기독교 분열 문제와 황제 등극 문제 그리고 이민족 침입에 대한 방어 문제이다.
 

 일단 기독교 분열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비잔티움 제국 황제는 언제나 이단 문제로 골머리를 썩여 왔다. 초창기에는 아리우스파 이단 문제가 있었으며 이어서 단성론과 양성론 사이의 문제가 있었다. 먼저 아리우스파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의 견해를 따르는 종파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처럼 영원하고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특정한 시기에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서 창조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완전한 인간이라 해도 '아들'은 '아버지'에게 언제나 복종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본성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Trinity)를 재확인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나 이후 계속되는 이단 문제는 제국의 분열을 가져왔다. 사실 상식적으로 보면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삼위일체론은 억지스러운 면이 많다. 그래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에도 게르만족에게 널리 퍼졌으며 특히 이슬람교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참고로 여호와의 증인도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이어서 단성론과 양성론 문제인데 단성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견해이고 양성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결국 단성론이 이단으로 선고받았으나 이는 이단 정죄를 위한 공의회 참석 인원이 양성론자 위주였고 특히 그들을 매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서 제국의 힘이 분열되자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단의론(그리스도는 두 개의 본성을 가지지만 단일한 의지를 가진다는 내용)를 펼쳐 그들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하였으나 단의론은 양자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았다.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파와 단성론자를 정죄함으로써 종교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기던 찰나에 이제는 성상 파괴 문제가 다시 붉어졌다. 십계명에 의하면 우상 숭배를 하면 안되는 것 이었는바 레온 3세 황제는 성상을 파괴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서로마 교황이 이를 비난하면서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의 분열이 초래되었고 제국은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실 십계명을 잘 살펴보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당시 만연되어 있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었지 성상도 만들지 말라고 보기는 힘들다. 어찌되었건 시도 때도 없이 종교 문제는 황제의 커다란 골치거리 였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결속을 방해하였다. 이를 보면 우리 나라는 종교 문제로 현재 큰 갈등을 겪지 않는다는 점이 축복으로 보인다. 종교 문제는 신념과 연관되어 나라를 분열케 하고 이는 곧 국력 약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2MB는 너무 대놓고 기독교 편향 정책을 펴는 바 멀지 않은 미래에 종교 갈등이 심화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연 우리도 종교 문제로 피를 보아야 할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2MB는 역사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까?

 

 이어서 황제 등극 문제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보면 언제나 황제 등극 과정이 암살, 쿠테타 등으로 얼룩져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황실 핏줄이 잘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일처다부제를 통해 형제끼리 싸움이 있었을지언정 황실 핏줄이 완전히 끊겨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자가 황제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국교였던 로마 제국의 경우 일처일부제였고 그 결과 황실 핏줄이 끊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게다가 동아시아와 달리 황실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황족으로 여겨 왕위 계승권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황족 여자의 경우 언제나 황제 위를 노리는 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황제가 죽으면 언제나 피냄새가 진동하게 되었다.

 

 또한 마지막 문제는 이민족 문제였다. 초창기 문화면이나 군사력면에서 근처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던 로마 시절에 비해 비잔티움 제국은 근처에 제국에 위협이 될 만한 적국이 많았다. 동쪽에는 아르메니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이슬람 세력이 있었으며 카타니아 지방에는 '신의 징벌'이라고 불리던 훈족 아틸라 등 이제 군사적으로도 비잔티움 제국은 이를 압도하지 못하였다. 비록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절에 벨리사리우스라는 명장의 힘으로 이탈리아를 다시 수복하였으나 이미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어를 사용한데 비해 이탈리아는 여전히 라틴어를 사용하는 등 이미 문화적으로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하여 결국 이탈리아 지방은 유스티아누스 사후 다시 이민족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를 보면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로마/그리스 시절의 모든 영광을 잊어 버리고 악덕만 남은 나라라고 혹평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비잔티움 제국은 종교 문제, 황제 등극 과정에서 얼룩진 피,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는 바 비잔티움 제국은 이런 혼란 속에서도 그리스/로마 문화를 계승하여 이를 보전하였고 동쪽에 있는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제 2권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와 몰락을 이어서 계속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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