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동노 외 옮김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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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 근현대사 관련 책을 읽다 보면 언제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를 만날 수 있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김동노 교수가 고백하듯이 ‘현대 우리 학계에서는 그의 입장에 기대거나 혹은 빗대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현대사 연구의 관례였을 정도였다.’(p.726)로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 근현대사학계에 미친 영향을 지대하다. 하지만 브루스 커밍스 자신도 고백하듯이 ‘나는 미국에서 연구를 하고 있고 나 자신을 순미국인으로 생각하고 있다’(p.21)는데 직접 한국 근현대사를 겪은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의 연구가 얼마나 객관적이고 과학적일 수 있는지 언제나 의심을 품었으며 또한 외국인의 저작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척박한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외국인이 이런 저작물을 내 놓을 동안 별다른 연구 성과물도 내놓지 못한 이른바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들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수많은 연구비를 받으면서도 고작 하는 일이라고는 <김일성 조작론>같은 완벽한 어용학자의 연구만 하고 있을 뿐이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조금도 없는 그냥 ‘돈 먹는 기계’, ‘생각 없는 권력의 파수꾼’에 다름이 아니었다. 물론 근래에는 젊은 학자들 중심으로 특히 정병준씨의 [한국전쟁]이나 [우남 이승만 연구], 그리고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등 드디어 <연구 성과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나오고 있는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결국 브루스 커밍스의 노작인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은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하지만 일단 700여 쪽에 이르는 책의 두께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마치 ‘과연 나를 넘을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 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설혹 브루스 커밍스가 이런 의도로 책을 썼다 하더라도 그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판해주마’라는 마음가짐으로 이 책에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일단 이 책의 1, 2장은 본격적인 한국현대사를 서술하기에 앞서서 미국 독자를 위해 간략히 한국의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데 할애하였다. 커밍스도 밝히고 있듯이 1, 2장은 대부분 다른 이의 탁월한 연구 성과에 의존(p.20)하고 있는데 먼저 <유교>에 대한 커밍스의 생각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p.27~28) 이에 대해 커밍스는 정적이고, 권위적이고, 반민주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외국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이런 커밍스의 지적은 날카롭지만 “그러면 유교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는 모호한 답변으로 회피하고 있다. ‘유교라는 시냇물 옆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격언과 믿음의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p.28)라고 하는데 골수부터 한국인인 나조차 알지 못하는 [거대한 강]을 커밍스는 어떻게 발견했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커밍스는 <민족>의 개념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p.33) 특히 ‘세계 여러 민족 중에, 종족상, 인종상, 언어상의 심각한 차이 없이 한 국가에 살고 있는 민족은 별로 없으며 한국은 실로 종족과 국가가 일치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동질적인 민족 중의 하나인 것이다’라는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민족>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민족>이란 생물학적 의미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강조해야 하는 단어로 여러 민족의 피가 섞인 우리도 최소한 정신적으로는 <韓民族>이라는 민족성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민족>이란 정신적 실체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어서 그는 양반 제도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p.75~78) 물론 본인의 집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집안이 <족보>를 애지중지하며 스스로를 양반 집안이라고 우기지만 사실상 ‘임진왜란’ 이후 양반 제도는 붕괴한 것이 옳으며 이를 알고 난 후 비록 집안 어른들 앞에서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족보를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또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양반들이 조선 후기에 나라를 속된 말로 ‘말아 드셨는데’ 이런 양반의 후예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벼슬이라고 사람 만날 때마다 “누구의 몇 대손입니다.“라고 자랑하고 다니는지 젊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커밍스의 지적에는 100%를 넘어 200% 동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여성의 지위에 대해 이야기가 계속된다.(p.86~88)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분명 문제 있는 것이고 점점 고쳐져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른바 “깨어 있는” 여성의 투쟁으로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고 유산 상속에 있어 남녀 자식 간에 평등하게 받으며 미망인의 경우 남편의 재산을 자식과 비교하여 50%를 가산해서 받는 법이 통과되었고 2005년 경에 이른바 <딸들의 반란>이라고 불리는 획기적인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마지막 보루였던 ‘종중 재산’의 경우에도 여성의 권리가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오랜 관습(과연 ‘관습’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속에 남성 우월주의는 남아 있으며 사회의 발전과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이런 편견들은 최대한 빠르게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제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커밍스는 임진왜란으로 사실상 조선의 모든 법률, 세제 체계가 무너지고 말았으며 이로서 조선을 멸망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p.106~107) 과거 본인이 고등학교에서 국사 수업을 들을 때 선생님께서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어야 되었다”라는 말씀을 들을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제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지켜오던 탁월함, 덕(virtue)는 사라지고 말았는데 차라리 이 때 조선이 멸망하고 한 번 깨끗이 개혁을 한 후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았다면 20세기 초반에 이렇게 우리의 조상들이 고생하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설사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 반란이 일어났더라도 지배 계층을 이루는 ‘지주, 양반 계층’의 비협조로 성과를 달성하기는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본격적으로 <치욕의 역사>를 배우게 되는데 먼저 우리나라에서 계급제,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이 고작 10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p.170)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그런 만큼 아직도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에는 계급제와 노예제도에 대한 기억이 있으며 결국 오늘날의 <양반>이 되기 위한 소과인 “수능”, 대과인 “고시”에 많은 학생이 지원하며 이에 떨어지면 실패자 취급을 받고 이렇게 교육이 과열되는 것도 이렇게 계급제, 노예제도가 폐지된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이른바 <친일파>, <부역자>들의 이름이 하나 둘 등장하는데 그중 특히 언급하고 싶은 사람은 “윤치호”다. 윤치호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과거 좋은 책을 찾아 다니 던 중에 <윤치호 일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윤치호 일기는 일종의 <판도라의 상자>이다. 기독교계의 친일 행동을 이끌었던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이른바 “지식인”이 왜 친일을 하게 되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물지도 못할 거라면 짖지도 마라”는 그의 주장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란 존재가 <친일파>가 되는 의식을 단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3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제 3장의 시작은 <잃어버린 역사>부터 시작된다.(p.199) 한일 양국에서 1935~45년 사이의 역사가 “지워진” 것은 아직 한국에서는 친일파 청산이 끝나지 않았으며 일본은 아직 제국주의의 충동이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커밍스의 지적에 깜짝 놀라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지적은 옳은 것 같다. 아직도 <역사 바로 세우기>는 갈 길이 먼 것 같고 얼마 전 친일파 재산 환수 소송을 보면서 언제쯤 친일 잔재 청산이 이루어질까하는 안타까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커밍스는 남한에서 논쟁이 많은 식민시대의 <근대화>에 대해 설명한다. 아직도 잊을 만하면 일본 고위 관료나 한국의 교수들이 “한국은 일본 덕분에 근대화, 산업화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국민의 감정은 매우 폭발적이다. 물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커밍스가 주장하는 수송 및 통신시설의 확충(p.236), 한국내 산업혁명(p.241)에 대해서는 솔직히 인정하기가 싫다. 그리고 “성장의 이익은 전부 일본으로 갔으며 한국은 일본의 도움 없이도 어차피 급속하게 발전했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한다”(p.211)고 지적하면서 타이완과 비교하는데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편협하지만 “그건 너희 미국인이 필리핀 착취하면서 내세우는 논리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이런 너의 논리는 미국이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냐”라고 반박하고 싶다. 결국 이런 일본의 강요된 산업화 모델은 관료제-권위주의 발전 모델로 한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며 특히 당시 지배 계층인 양반 계급은 일본에 협조적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알 수 있었다.(p.215) 또한 한국 기독교의 경우 오직 출세의 수단인 <영어>를 위한 수단(p.223)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뭐 이건 지금도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요새 기독교는 “표”를 위한 수단이란 점만 다를까? 나는 아직도 김영삼이 주말에는 꼬박 꼬박 교회 다니면서 임기 막판에 사형을 집행한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이어서 커밍스는 과거에 대한 급진적 부정이 한국 사회를 분열로 이끌었다(p.224)고 주장한다. 이런 지적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왜?” 한국에서 과거에 대한 급진적 부정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 같다. 뭐 커밍스의 모국인 미국이야 역사도 짧고 침략하는 역사와 승리하는 역사로 이루어져 있어서 과거에 대한 급진적 부정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한국의 역사는 미국과 정반대이다. 백날 유구한 역사 자랑해보았자 결국 나에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식민지배뿐 아닌가? 게다가 유구한 문화와 전통을 이끌어 오던 양반 지주 계층은 오히려 일본에 빌붙어 가혹하게 수탈하고 있으니 누구든 과거에 대한 부정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리고 일제시대를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커밍스가 언급하는 것(p.252~253)는 그저 “그랬군…. 그래서 그런 것이었군…”이라는 한탄 밖에 나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인가…. 마치 나라도 당시 살았다면 앞에서 커밍스가 언급한 과거에 대한 급진적 부정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이런 일제시대를 통해 얻게 되는 교훈은 명확하다. “지 한 몸 지가 간수하라” 이것이다. 홉스가 지적하듯이 “개인의 생명과 재산권”을 지켜 주지 못하는 국가는 이미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백날 충성하고 지배계층의 말을 잘 들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다수를 배반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있다. 누가 나를 배신할 것이 뻔하다면 내가 먼저 배신하는 것이 나은 방법 아닐까? 괜히 요새 젊은이들이 전쟁 일어나면 외국으로 도망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전부 그들이 과거의 <역사>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인 것이다.



이어서 4장이다. 특히 4장의 초반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커밍스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게 만드는 이른바 <미국 책임론>이 등장한다.(p.263) 이런 한국 분단에 대한 미국 책임론은 이 책에서 수많은 근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가장 먼저 미 군정의 하지 장군은 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수 백명의 보수주의자들을 지원하게 되었으며(p.273) p.281에서 커밍스는 “미국과 러시아가 한국을 떠났더라면 좌익정권이 재빨리 권력을 접수했을 것이며, 그 정권은 혁명적인 민족주의 정부가 되었을 것이고, 중국이 그랬고, 베트남이 오늘날 그러는 것처럼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온건해져 국제 사회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라는 과거라면 금기시될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김구에 대해 묘사한 부분(p.278)에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너무도 다른 김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그에 대한 묘사는 오늘 테러리스트에 대한 묘사와 다른 점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이어서 군대와 경찰이 일본에 부역했던 자들이 그대로 고위층에 존재했으며(p.284) 오늘날 한나라당의 전신인 한민당이 친일파들의 집단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p.285) 특히 오늘날 시사할 만한 점이 있는 것은 <서북청년단>에 대한 설명(p.293)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 깡패, 깡패 정치”로 대표되는 어용 단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잔존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촛불집회를 방해하는 단체 특히 HID는 서북청년단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얼마 전에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갈 때 나이 드신 분이 술 취해서 괜히 고속버스 운전기사에게 시비 걸면서 “자유당 시절이면 너희들 다 죽었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었다. 이것을 봐도 아직도 그 잔재는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언급이 이어지는데 이는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를 참고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5장은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단 “내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온다”라는 언급이 참으로 내전의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역시 정병준의 역저 <한국전쟁>이 더 많은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지만 인상 깊은 점만 언급해보면 한국전쟁 낙동강 방어선의 격전지를 이루었던 포항(p.375)이 바로 나의 군부대가 있던 곳이었다. 가끔 육본에서 유해 발굴단이 와서 근처 야산을 뒤엎고 다니다가 유해를 발견하곤 했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하여 함흠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의 협공을 받고 무적을 자랑하던 미 해병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흥남부두에서 철수했다는 점 또한 교묘하게 넘어가고 있다.(p.402) 글쓴이도 미국인이니 아무래도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는 점은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글쓴이는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서 평등화를 강제하였다(p.423)고 주장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 평등화를 강제한 점은 있지만 이에 대한 참고문헌을 실었더라면 좀 더 인상 깊지 않았을까? 그 외 한국 전쟁의 <학살>과 그에 대한 <미군의 방조>(p.379)에 대해서는 역시 김동춘의 역저 <전쟁과 사회>를 참고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이 부분은 아마도 다른 많은 분들의 의견이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언급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결국 <한국전쟁>은 커밍스가 말하는 대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수많은 피를 흘렸지만 조국은 통일되지 않았으며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으며 산업화의 기반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남북한의 균열과 반목은 더욱더 심해지게 되었다. 결국 상처뿐인 전쟁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6장은 전부 브루스 커밍스의 아내인 우정숙(메러더스 우 커밍스)의 의견이다. 그러니 특별히 언급한 것은 없지만 단지 “기적은 없었다”(p.483)라는 의견으로 만족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주된 목적은 <경제>적인 면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살펴보기 보다는 다른 면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데 있지 않은가?



7장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커밍스는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당시 국회의원에 대한 신랄한 비판(p.504~505)은 참으로 인상 깊었다. 괜히 국회의원이 구캐우원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았다는 점(p.538)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직 미국은 한국의 정치적 안정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으며 사실상 군부 독재를 방치하였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광주 사태에서 더욱 더 잘 드러난다.(p.540, 551) 아직 많은 문서가 기밀로 묶여 있어서 진실을 알기는 힘들지만 분명 미국의 개입 혹은 최소한 방조가 있었다는 점은 옳은 것 같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약소국의 애환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보면 현재 주 호주 대사로 임명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우상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한국에서는 친미파가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이어서 8장은 북한에 대한 언급인데 다른 것은 다 버리더라도 “공산주의 병 속에 담긴 성리학”, “마오쩌뚱의 옷을 입은 주희”라는 것은 알고 넘어가야 갈 것 같다. 즉 커밍스는 북한의 정신 속에는 가족주의로 대표되는 유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9장은 잘라서 버려도 될 부분이다. 10장은 “북한은 수십년 간 미국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핵위협을 받았으며, 폭넓은 핵억제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북한 자신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p.694)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994년 전쟁 위기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1954년에 이승만이 한국에서 수소폭탄 사용을 요구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고작 이 정도 생각 밖에 못했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불행이다. 또한 북한 전력의 70%가 전진 배치된 것은 전쟁 초기 남한의 군대나 민간인과 뒤섞여 핵무기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는 지적(p.702)도 흥미롭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북한이 전진배치를 한 것은 남침의 의도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런 숨겨진 사실도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정치외교학과 수업을 통해 이른바 핵무기는 <상호간의 완벽한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쟁 억지력으로 작용하고 <핵 확산 금지조약>을 통해 다른 나라의 핵 개발을 막는 대신 “핵을 가지지 않는 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약속을 했다고 하던데 이 책을 보면 역시 국제관계에서 약속은 언제나 어길 수 있는 공수표에 불과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p.707에서 커밍스가 2008년을 예상한 것과 현재를 비교해 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커밍스는 “미국과 북한이 마침내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며 북한의 핵에너지 프로그램은 핵확산금지체제를 완전히 따르게 될 것이며 우리는 북한이 원자폭탄 생산에 충분한 양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했는지 여부를 마침내 알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런 커밍스의 예상은 2008년 현재 어떻게 생각되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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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eyo Takakuwa - Provance
히데요 타카쿠와 (Hideyo Takakuwa) 연주 / 론뮤직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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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이제 4학년 졸업반으로 1, 2학년들은 여름 방학을 맞아 어디로, 누구와 여행간다는 계획짜기로 바쁘지만 한 여름에 중앙도서관에서 TOEIC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영어'로인해'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공부하면서 많은 회의가 들었고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특히 유럽으로 떠나고 싶었는데 현실 앞에서 나의 꿈은 좌절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요새 장마라서 계속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어서 나의 마음은 더욱 더 우울해질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훌쩍 떠날 수만 있다면…'

 

 그러던 중에 프랑스의 유명한 휴양지인 프로방스(Provance)란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앨범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이 앨범의 표지를 보면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 나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본인 또한 굉장히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서 책을 본 적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했었으며 표지의 주인공이 굉장히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이유로 앨범을 꺼내서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일단 이 앨범의 아티스트인 히데오 타카쿠와(Hideyo Takakuwa)를 알게 되었다. 사실 일본 영화나 음악에 대해 문외한이 나로서도 그가 참가한 수많은 영화와 TV드라마, 애니메이션 음악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특히 [춤추는 대수사선][오!나의 여신님], [신장의 야망] 등에서 OST에 대해 인상 깊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이 음반과 함께 프랑스의 휴양지 프로방스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이 음반을 들어본 결과 주로 플룻으로 연주하는 뉴에이지 음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뭔가 알 수 없는 악기 소리가 들렸는데 찾아보니 켈트지방의 민족악기인 '틴 휫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로서 나로 하여금 바로 휴양지와 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해 주었다. 뉴에이지 특유의 신비감과 차분한 음악이 조화를 이루면서 비오는 날 커피 한잔과 함께 하는 이 음반은 표지에 나와있는 것과 같은 휴식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비록 아직 현실의 압박으로 여행을 떠날 수 없지만 이 음반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프랑스의 프로방스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으며 언젠가 반드시 이 음반과 함께 프로방스를 여행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없다면 이 음반과 함께 휴식을 취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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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Gagnon - TOWA-NI
앙드레 가뇽 (Andre Gagnon) 연주 / Kakao Entertainment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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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Andre Gagnon의 6년만의 새로운 음반이 나왔다. 사실 클래식과 팝뮤직의 조화를 추구하는 뉴에이지 음악이란 것이 심리치료, 스트레스해소, 명상음악 등으로 사용되지만 나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었다. 솔직히 20대로서 한창 경쾌하고 즐거운 음악을 좋아할 때라서 왠지 졸립게 느껴지는 뉴에이지 음악은 썩 나하고 맞지 않은 것으로 느껴졌었다.

 

 그러던 중에 이 음반을 듣게 되었다. 바빴던 주중과 달리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주말에 커피 한잔과 함께 이 음반은 스트리밍을 통해 듣게 되니 진정한 뉴에이지의 맛을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평소에 감성이 부족한 나지만 피아노 선율 가운데서 느껴지는 몽환적이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음반이었다. 개인적으로는 5번째 트랙인 [Mist(안개)]가 가장 맘에 들었다. 지금 현재도 비가 오기 때문일까 왠지 안개 속을 헤메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Andre Gagnon는 캐나다 출신인데 앨범 수록곡을 보면 영어는 아니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음반을 내면서 제목을 국어가 아니라 일부러 영어나 프랑스어를 쓰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일까? 어쨌든 뉴에이지 피아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만큼 장마 때문에 집 안에서만 있어서 우울하다면 커피 한잔과 이 음반을 친구 삼아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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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our Ma Soeur En Allée] by Andre Gagnon
    from 바람나무, 생각가는대로 2008-09-19 03:25 
    그러다가.... 사는 것이 눈물임을 알았다. Pour Ma Soeur En Allee.mp3 Le Pianiste by Andre Gagnon
 
 
 
콜럼버스 마케팅 - 크리에이티브 마케터를 만드는 1% 다른 생각
복준영 지음 / 토네이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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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기존의 마케팅 이론이 과거 산업시대에는 매우 유용한 이론이었다는데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웹 2.0시대에 접어들고 소비자가 프로슈머(Prosumer)로서 그 역활과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점차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이 책의 글쓴이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CJ와 SK텔레콤에서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면서 웹 2.0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존의 마케팅 이론에 대해 과감히 물음표를 던지고 [콜럼버스의 달걀]이 보여준 발상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특히 기존의 마케팅 이론과 배치되는 '후발주자가 시장을 장악한다', '실패는 예방될 수 있다' 등 많은 발상의 전환을 제시하고 있다. 솔직히 원래 '후발주자가 시장을 장악한다'라는 소제목을 만났을때 의아해하였다. 조금이라도 경영학이나 마케팅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장선점우위의 법칙이라는 말을 최소한 1번 이상씩은 들어보았을 것 아닌가? 이에 대해 이 책에서는 과거 시장을 선점했던 소니 워크맨(Sony Walkman)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며 MP3는 1993년 한국의 새한정보시스템이 개발했으나 현재 애플의 아이팟(Apple iPod)으로 대체되었다는 예를 들고 있다. 이와 같이 글쓴이는 실제의 예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맞는 마케팅 기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케이스 스터디]라는 것을 통해 애플(Apple), 구글(Google), T모바일(T mobile), 미라이공업을 분석하여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애플의 경우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가정, 가구 단위를 기반으로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환경을 만들었고 그 결과 매출은 급증하고 24조 원을 넘어섰고 음원 장사로만 2조 원을 벌어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외 구글의 경우 창조성혁신성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인식시켜서 성장엔진으로 삼고 있다. 본인의 경우 얼마전에 본 영화에서도 대학생이 가장 입사하고 싶은 회사가 구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정도로 구글은 창조성과 혁신성으로 대표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유명한 미라이 공업의 경우 잔업이 없고 일년에 150일 이상 휴가를 주는 등 직원의 복지에 신경을 쓴 결과 수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 처럼 이 책은 시대에 맞게 콜럼버스도 깜작 놀랄 만한 크리에이티브 마케터가 되라고 한다. 분명 과거부터 금과옥조로 신봉되어 온 여러가지 마케팅 이론이 그 적합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의문에 대해 글쓴이는 직접 회사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마케팅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과 함께 소비자가 진화하고 있는 만큼 마케터도 진화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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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서평단 알림
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독서클럽] 활동을 하면서 이른바 '철학' 서적들을 읽기 시작하였었다. 나의 '철학' 독서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순서로 진행되었다. 처음 고대 철학은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독서가 진행됨에 따라 나의 지적능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할 정도로 그 난해함은 나로 하여금 질리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과연 '철학'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마치 '철학'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인 [철학의 탄생]이란 것을 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달리 철학은 '소크라테스'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며 이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머리속에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인상이 너무 큰 나머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무시하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는 나의 부족함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의 철학은 충분히 오늘날에도 그 존재가치를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현대 과학과의 비교는 나를 충격에 몰아넣게 되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현대 물리]라고 함은 '상대성 이론''양자역학'을 이야기한다. 나에게 있어서 수많은 절망을 안겨주었던 '상대성 이론''양자역학'이 바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그 존재가 예견되고 있었었다. 특히 헤라클레이토스가 오늘날 모든 물리학자의 꿈인 '대통합이론'의 기초가 되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의 통합을 제시하였던 것(p.271)과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오늘날과 거의 비슷한 '원자론''우주론'을 제시하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흔히 양자역학을 이야기 하면서 '불연속성'을 이야기 하지만 이런 것 조차 과거 데모크리토스의 직관(p.475)에 의해 그 존재가 주장되었다는 점도 당시 철학자들에 대해 경의감을 가지게 만든다.

 

 이어서 간단히 각 철학자의 견해를 살펴보자면 탈레스의 경우 틀린 의견도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며 올바른 관찰에서도 잘못된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으며 아낙시만드로스를 통해 '무한자'의 개념(p.104)이 철학사에 소개되었으며 그의 견해는 현대 물리학과 유사점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낙시메네스를 통해서는 질적변화가 양적변화로부터 발생한다(p.113)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피타고라스는 단순히 '피타고라스의 정리' 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의 통합을 시도(p.181)했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크세노파네스를 통해 신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책임성 있는 인격으로 독립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p.194) 또한 '변화', 그리고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날 수 있었으며 임페토클레스를 통해 절대적 지성주의와 감성주의를 비판(p.362)한 것과 현대와 비슷한 원자와 우주론(p.373, 383)을 주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정점을 이루는 데모크리토스를 통해 그가 주장하는 '불연속성''원자론'이 현대 물리와 얼마나 비슷한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에서는 탈레스를 비롯하여 총 10명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기록은 원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다른 사람의 책 속에도 인용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글쓴이는 엄청난 노력 끝에 다른 책들에 인용된 철학자들의 말들을 끌어모아서 완전한 하나의 '철학'체계로 모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다른 점도 뛰어나지만 이런 글쓴이의 노력이야말로 높게 평가받아야할 것이라고 특히 생각한다.  그리고 단순히 철학을 제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은 현대 과학과 일일이 비교한 점도 놀랍다. 솔직히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초끈이론' 같은 것은 공대 출신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그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나 이 책의 글쓴이는 자연과학 학부에서 공부한 경험을 토대로 철학과 자연과학과의 만남과 비교를 원숙한 솜씨로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옮긴이가 말하듯이 자연과학 없는 철학은 지적 유희와 공염부로 전락하기 쉽고 철학 없는 자연과학은 과도한 일반화와 편협하고 섣부른 독단론으로 치닫기 쉽다는 것은 나와 같이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나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조심해야 될 충고일 것이다.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 대해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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