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진/우맘 > 기생은 흥을 먹고 태에 사는 법이거늘!
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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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은 흥을 먹고 태에 사는 법이거늘."

궁시렁거리는 타박네의 말에 얼쑤, 하는 추임새와 함께 머리 속에서 딱! 하고 북통 두들기는 소리가 절로 울린다. 책을 열고 세 번째 페이지에서 이 문장을 만나는 순간,  '신기생뎐'에 대해 갖고 있던 단순한 호감은 열렬한 애정으로 바뀌었다.
흥을 먹고 태에 사는 기생이 소재이고 주제여서 그런가? 작품은 줄곧 밀양아리랑처럼 흥에 겨웁고 스란치마 밑 타래버선처럼 그 태가 범상치가 않다. 

기생 이야기, 소설로 풀어내자면야 그렇게 풍부하고 감칠맛 나는 재료가 또 있을까. 하지만 재료가 풍성하다고 맛깔나는 상이 차려지는 것은 아닐터. 호박의 이쁜 연두빛을 살리며 얇게 입혀진 밀가루 옷처럼, 기생이라는 관음증 일변도로 흐르기 쉬운 소재에 작가는 '삶과 사랑'이라는 얄따란 옷을 솜씨 좋게 입혔다.
각 장을 등장 인물이 하나씩 도맡아 연작 소설 형태를 띄는 것은, 어찌 보면 장편을 쉽게 풀어가는 방편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 인물 모두를 어우르는  넓은 시야가 없으면 섣불리 덤빌 일이 아니다. 각 장의 주인공이 너무 도드라지지도 흐릿하지도 않게 적절한 무게감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렇다고 개성 없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해도 않될 것이다. 매번 그타령이 그타령이면 쉽게 질릴 것이나 그렇다고 전체적인 흐름이 없이 제각각 딴소리들을 해대도 정신 사납겠지. 그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작가는 참 맵시 있게 잘도 해냈다.
타박네, 오마담, 미스 민, 기둥서방, 집사....그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구구절절 소설 같은 얘기를 펼쳐드는데도, 그것이 그냥 이야기 같질 않고 꼭 내 곁에 앉혀놓은 양 온기가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제일 정이 가는 인물은 역시 타박네다. 한 가지 일에 오래 몰두하면 누구나 도를 깨우친다고 하더니만, 타박네, 부엌어멈 반평생에 정말 지껄이느니 다 명언이다. 그것도 귀에 짝짝 달라붙는.

그렇지, 작가는 기생이야기에 밀가루 옷만 잘 입힌 게 아니다. 쑥갓 한 잎, 홍고추 조금, 고명도 어찌나 보기 좋게 얹었는지. '발맘 발맘', '왜자기다', '아리잠직', '콩켸팥켸', '잘코사니'.....보기에도 좋고, 입속에서 굴리다가 삼켜봐도 재미있는 우리 말이 빛깔 좋은 고명처럼 군데군데 얹혀있다. 난생 처음 만나는 단어인데도 그 속내가 단박에 읽히는, 그래서 빙긋이 웃음이 배어나오는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모국어인가. 도대체, 얼만큼의 내공이 쌓이면 모국어를 이리 아기자기,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까? 작가가 새삼 우러러 보였다.

사는 것, 사랑하는 것을 오랜만에 신명나고 맵시 있게, 흥겹고 태나게 얽혀 고민해본 듯 하다. 뿌듯하고 후련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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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노아 > 인간을 들여다보다.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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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포루투갈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름만 보고 일본인인 줄 알았어요^^;;
제법 두꺼운데, 문장 부호가 하나도 없어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챕터 끝날 때까지 놓기가 아주 망합니다..;;;;
그러나 재밌어서 또 손을 놓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민망할 만큼 파고들어간 작품이에요.
그렇지만 그 시선이 늘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매우 독특한 유형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네요.
마지막 대사가 너무 섬짓했던....(스릴러 같았어요~)
읽고,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랍니다~

만약 정말로 온 세상이 다 눈멀어서, 사회의 모든 것이 정지하고 무법천지가 되고 생존만을 위한 싸움만 허용된다면,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 그리고 자부심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 결코 추하지 않게 살아남을 수 있을 지도 솔직히 자신이 없구요.  그래서 주인공 의사의 아내의 '현명함'에 반했습니다.  온 세상이 다 눈 멀고 혼자만 눈뜨고 있는 자의 고독과 불안을 과연 우리는 견디어 낼 수 있을까요.  또 온 세상이 다 눈을 떴는데, 나 혼자 눈 감을 시간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감당해낼까요.

질문은, 각자 스스로에게 해보고 답해야겠지요.  저는 부끄럽고 자신이 없어 고개만 돌리다가, 아직 밝은 내 눈에 안도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그리고 정신의 눈이라고 가정을 하면 또 얼마나 섬?하고 무서운 지...

정직하게, 착하게 살아 '버릇'해야겠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순간에 '판단'을 해야할 때가 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습관'처럼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운 내가 되기를 원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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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노아 > 끊임없는 노력들에 박수를...
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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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무슨 상을 받았다더라, 그 상이 꽤 권위있는 상이다더라.... 라는 부제가 달리면, 어쩐지 부담스러워진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순수문학으로 지루하지는 않을까... 라는 선입관 때문에.

그러나 그런 선입관은 대개 깨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편견조차 나의 게으름이 불러오는 산물일뿐.

이 책을 선뜻 펴들게 만든 것은 일등은 아니었지만 함께 당첨된 작가 중에 박민규씨와 윤영수씨의 이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작품을 꽤 좋아하는 편이어서 눈번쩍!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한강씨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끝에서부터 책을 보았다^^;;;

박민규씨의 갑을고시원 이야기를 먼저 보고 앞으로 쭈욱 넘어온 터라서, 사실 일등 받은 한강씨 작품을 제일 나중에 본 셈인데, 일등할 만하다고 공감했다. 재밌고, 감탄했으니까.

다른 작가분들도 대체로 재밌었는데, 한 두어분 정도만 지루했다.(이름은 말하지 않겠어용...)

생각해 보니, 수상작가들이 모두들 이미 집필 활동을 활발히 하고 계시는 현역 작가라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분들도 이런 이런 문학상을 받으면 초심의 마음 그대로 기쁘고 설레이고 그랬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겸허한 마음도 들고 그런다.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낮아지고 겸손해야 한다고...

요절한 이상은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존재하여 길이길이 그 이름이 각인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기뻐할까?

아무튼,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무슨무슨 문학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에 조금 더 관심이 가게 되었다. 

1등 수상자에게 단편 하나를 더 실어주는 것도 독특했고, 그 작품들을 바라보는 심사위원들의 평을 듣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었다.  물론 수상자들과 도전자들은 꽤 긴장했을 테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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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노아 > 코끼리를 쏘다.
코끼리를 쏘다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실천문학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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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서정적이다.  이 책을 신청한 까닭은 친한 지인의 부탁 때문이었는데, 학교 도서관을 애용(이용?)하던 참으로 학교에 신청해서 보게 된 책이다.

재생지를 사용한 누런 빛깔의 책장은 유독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다.  옛스럽고, 가볍고, 뭔가 운치가 있어 그런 느낌의 종이를 좋아한다. 

이 책은 크게 5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오웰이 식민지 경찰로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글. 2부는 작가로서 오웰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 3부에는 파리와 런던의 뒷골목에서 최하층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던 경험을 생생하게 담겨 있으며, 4부는 일상에 스며 있는 정치성을 예리하게 통찰했다. 마지막 5부에선 유럽 문학에 대한 오웰이 피력한 단상들을 모아 놓았다.(책 소개에서 복사해 옴^^;;;)

개인적으로,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져서 특히 2부는 따분하게 읽은 편인데 1부는 인상 깊게 본 편이다.

영국인으로서 식민지에서 억압받고 사는 민중들을 바라보는 가진 자의 입장에서도 그는 인간 자체에 대한 고뇌와 애정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일본'이라고 하는 국가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민족 감정이 앞서고 역사적 오욕이 먼저 떠오르지만, 그 시절에서도 식민지 조선인을 변호하기 위해,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애쓴 인물들도 분명 있었다.  또 지금도 조상들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일본인들도 분명 있다.  그것으로 과거의 죄가 속죄되거나 덮어지진 않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고마운 일이다.  이 책을 보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저자의 더 유명한 책들은 아직 보지 못했다는 자각이 퍼뜩 들고 있다. 1984년이나 동물 농장 등 말이다.  대학 수능 시험 언어 영역 지문에도 나왔는데 말이다.

작가가 내가 살았던 동 세기에도 살았던 인물이라는 게 어쩐지 신기하다.  그리 오래 전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안도감? 그런 기분...

아마도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준, 그의 이름값을 만들어준 책들도 차분히 읽어봐야겠다.  이번처럼 중간에 집중력을 잃지 말고 열심히 읽어야지.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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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조선인 >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줄 수 없다구요?
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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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만 열여덟 되던 해 가을, 드디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라는 통지를 받았다. 당시 우리 사회의 기준상 주민등록증이 생긴다 해도 만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지만(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선 주민등록증이 꽤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미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아이들은 이마에 주민등록증을 떡 하니 붙인 채 아직 못 받은 친구들보고 자기를 언니라고 부르라며 뻐겼고, 발급통지를 받은 애들은 조금이라도 어른스러운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부모님 몰래 드라이기와 화장품을 챙겨 사진관에 달려가곤 했다.

나 역시 설레임을 가지고 주민등록증 날라오기만 기다렸는데 황당한 일이 생겼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발급 불가 통지가 날라온 것. 신청서상의 이름과 호적상의 이름이 다르다나? 내 이름엔 '곧을 정'자가 들어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호적등본엔 '참 진'자가 기록되어 있었고, 동사무소에 문의를 해보니 호적상 이름으로 다시 신청서를 제출하든지, 호적등본을 정정하라는 것이다. 전산화가 이루어진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엔 정정신청을 위해 호적지까지 가야 했다.  나야 고등학생이고 부모님 두 분 다 가게를 비우기 어려운지라 차일피일하다가 족보에도 안 오른 이름이니 그냥 '진'으로 이름을 바꿔 신청하자는 얘기까지 나왔고, 난 그 말이 너무 서럽게 여겨져 방문 걸어잠그고 대성통곡을 했었다. 결국 아버지가 짬을 내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갔더랬는데, 무슨 서류가 하나 누락되는 바람에 그 다음달엔 어머니와 큰오빠가 또 대구에 내려갔더랬다. 호적정정이 완료된 후에서야 다시 주민등록증을 신청해야 했기에 결국은 해를 넘겨서야 주민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땐 이미 한 해 일찍 학교를 들어온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주민등록증이 나온 뒤라 뻐길 상대가 없어 몹시 억울해 했던 기억이 난다.

90년대 초반엔 어머니를 잡으러 집으로 형사가 들이닥쳤던 사건도 있었다. 어머니가 사기 전과가 10개도 더 달린 수배자라는 것이다. 제대로 신발 신을 새도 없이 다짜고짜 연행하려고하는 형사에게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여 '그래, 경찰서에 가서 따져보자. 만약 내가 니들이 찾는 정영자 아니면 다들 내 손에 옷 벗을 줄 알아라' 고래고래 소리 질러가며 끌려가셨다. 가족이며 친척들이 몽땅 경찰서로 쫓아가 항의를 하고,  지문 조회로 어머니와 그 사기꾼이 동명이인임이 확인된 후에도 온갖 조사에 시달리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어머니는 풀려나셨다. 알고 보니 전산화 작업을 하다가 어머니와 이름과 생년이 같은 사기꾼 기록이 어머니 기록에 오기된 것이었고, 이처럼 억울한 사정을 가진 이는 의외로 많아 뉴스 르포로 다루어지기도 했더랬다.

생사불명 야샤르를 읽으며 우리 집이 겪은 두 사연이 떠올라 마냥 웃으며 읽을 순 없었다. 사람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서류로만 증명 가능한 세상이 우리가 사는 사회이다. 터키의 한 공무원의 사소한 실수로 야샤르가 부정된 것처럼, 전산시스템의 오류로 나의 존재가 아예 삭제되거나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지즈 네신의 풍자는 관료주의를 겨냥한 것이지만, 지문날인으로도 모자라 생체정보가 담긴 전자신분증 도입이 현실화되고 있는 오늘날은 더 통렬히 풍자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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