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와 함께 ‘천년왕국’으로…

68년부터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 역사상 가장 종교적인 대통령을 만들다

▣ 정우량/ 자유기고가

지난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외교가 최대 이슈일 것으로 예상됐다. 조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전쟁 등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 당락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유권자들의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경제(20%)도 테러와의 전쟁(19%)도 이라크 전쟁(15%)도 아닌 도덕적 가치(22%)였다. 미국의 한 정치 분석가는 3G, 즉 하나님(God)·총기(Guns)·동성애자(Gays)가 선거를 결정지었다고 압축해 평가했다.

도덕적 가치가 왜 그리 중요한가


△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는 마침내 가자아 종교적인 대통령을 찾아냈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 2월5일 워싱턴에서 열린 전국조찬기도회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고 있다. (사진 / AP연합)

미국인들에게 도덕적 가치가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알려면 현재 미국 사회가 당면한 ‘사회 붕괴’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 이혼의 일상화로 가족이 해체되고, 자녀들은 폭력과 난잡한 성 문화에 노출돼 있다. 일부 주(州)는 동성간 결혼을 합법화했다. 대학 사회도 위태롭다. 여대생의 5분의 2는 거식증 또는 다식증 환자며, 6분의 1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남학생들 역시 건전한 학교 생활보다 술·마약 등에 빠져들고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 사회는 급속히 보수화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바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다. 그들은 미국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이 도덕적 타락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도덕적 다수’를 이끄는 제리 폴웰 목사는 9·11 사태 발생 직후 “모든 것이 이교도, 낙태론자, 페미니스트, 동성애자, 미국을 세속화하는 집단들이 저지른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다. 9·11은 앞으로 일어날 더 무서운 사건들의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나라다. 전체 국민의 77%가 기독교 신자다. 기독교 신자의 40%가 개신교, 25%가 가톨릭이다. 개신교 신자의 25%가 기독교 근본주의, 25%가 자유주의, 20%가 복음주의다. 최근 미국 교회의 보수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져 둘을 합쳐 기독교 근본주의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에 오순절파를 포함해 ‘기독교 우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 역사를 봐도 기독교와는 불가분의 관계다. 미국인들이 자랑하는 선조(Fathers)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순례 시조’(Pilgrim Fathers), 다른 하나는 ‘건국 시조’(Founding Fathers)다. 순례 시조는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뉴잉글랜드 플리머스에 상륙한 영국 청교도(The Puritans)들이다. 이들은 영국 청교도들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파에 속하는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들이었다.

종교개혁이 유럽을 휩쓸던 16세기 영국 헨리 8세는 1534년 영국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로마 교황이 임명한 사제들을 몰아내고 자신이 임명한 사제들로 바꾼 것일 뿐 교회 조직이나 전례 등은 옛날 그대로였다. 엄격한 칼뱅주의자였던 청교도들은 이에 반대했으며, 그 중에서도 분리주의자들이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다. 싸움은 16~17세기 내내 계속됐다. 탄압을 견디다 못한 청교도들은 네덜란드를 거쳐 아메리카로 향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1620년 11월11일 메이플라워호 선상에서 서로가 지킬 약속을 다짐했다. “신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증진 그리고 우리 국왕과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로 시작하는 ‘메이플라워 서약’은 한마디로 미국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그 뒤 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WASP)의 중심 세력이 됐으며, 복음주의와 결합했다. 미국이 서부 개척에 나서면서 내건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청교도적 복음주의가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한 것이다.

한편 건국 시조들은 다른 입장이었다. 그들 역시 기독교도였지만 종교보다 이성이 중요했다. 18세기 계몽주의를 신봉한 그들은 종교가 국가의 일에 개입할 때 생길 부작용을 경계했다. 그래서 종교는 하나님의 일을 맡고, 국가는 세속의 일을 맡는 정교분리 원칙을 정했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의회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하는 법을 만들 수 없다”는 ‘국교 조항’(Establishment Clause)이 그것이다.

공화당을 ‘깜둥이당’으로 욕하던 이들이…

건국 뒤 계속되는 이민 유입으로 미국 사회가 다원화하자 기독교도 변해야 했다. 대처 방법을 놓고 분열했다. 한쪽은 현실을 수용하는 온건한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변화를 타락으로 보고 이에 저항했다.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에서 그같은 경향이 두드러졌다. 남부는 상대적으로 이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참된 기독교 신자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불렀다.


△ 1968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옮겨간 네오콘은 기독교 근본주의에 기반한 대외정책을 펴고 있다. 왼쪽부터 부시 행정부의 대표적 네오콘으로 분류되는 딕 체니, 로널드 럼즈펠드, 존 볼튼, 폴 울포위츠.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역경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들에게 신앙적 확신을 제공한 것이 바로 존 넬슨 다비의 종말론이다. 19세기 영국인 목사 다비는 성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주장하면서 참다운 기독교 신자들만이 고난을 피할 수 있고, 세상이 멸망한 뒤 예수께서 재림하셨을 때 지복천년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이후 기독교 근본주의는 세력이 약해졌다. 개신교에서 자유주의가 교세를 확장하고, 가톨릭권에서 이민자들이 대거 들어와 가톨릭 신자들이 크게 늘었다.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가톨릭을 집중 공격했다. 이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는 배타적 분리주의로 인식돼 일반인들로부터 멀어졌다.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자신들이 박해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으로 더욱 결속했으며, 여기에 남부라는 지역적 고립감이 더해져 전투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면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본래 현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정치는 종교와 관련 없는 부정한 일로 치부하며, 오직 하나님 말씀만 따르며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말 정확히 말해 1968년 리처드 닉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닉슨이 내걸었던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 때문이다.

당시 공화당은 1920년대 말 이래 40년 동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재임 8년을 빼곤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에 계속 패배했다. 닉슨은 선거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수적인 남부 표를 얻는 방법뿐이라고 판단했다. 1960년대 미국 사회는 흑인 민권운동, 베트남전 반대 등으로 진보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을 제정해 흑인에게도 백인과 동등한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부여했다.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자신들이 지지해온 민주당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남북전쟁 이래 남부는 공화당을 ‘링컨당’ ‘깜둥이당’이라고 부르며 배척하고 줄곧 민주당을 지지해왔다. 그런데 민주당이 동부 진보 세력에 점령당하고 흑인과 소수민족의 편에 서자 크게 실망했다. 바로 이때 닉슨이 미국 사회의 도덕성 회복, 주(州)의 권리 보장 등 남부가 매력을 느낄 만한 보수적 이슈를 공약으로 내걸자 남부는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

이스라엘 극우파와 밀착

닉슨이 중도 하차한 뒤 남부는 다시 한번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를 지지했다. 카터는 남부 출신에 독실한 침례교 신자여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보기에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카터는 대통령이 된 뒤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을 실망시켰다. 특히 중동 평화 정착을 위해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을 맺도록 중재한 데 분노했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평화는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 11월2일 조기 투표가 실시되고 있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이번 선거에서는 '도덕적 가치' 가 중요한 변수였다. (사진 / 로이터연합)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남부는 카터 대신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표를 몰아줬다. 레이건을 지지한 남부의 민주당원을 가리켜 ‘레이건 민주당원’(Reagan Democrat)이라고 불렀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공화당 편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현재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공화당원의 33%를 차지할 뿐 아니라 강한 결속력으로 공화당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으로 있던 12년 동안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미국 사회를 보수화하는 데 큰 성과를 거뒀다. 1992년 백악관이 다시 민주당에 넘어가자 ‘그릇된 세계관을 가진’ 클린턴을 공격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클린턴이 섹스 스캔들로 궁지에 몰렸을 때 탄핵 직전까지 몰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선거에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가장 신뢰하는 지도자인 아들 부시를 백악관에 보내는 데 성공했다.

부시는 40세가 될 때까지 무절제한 생활을 해왔다. 알코올 중독이 될 정도로 술을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을 끊고 신앙에 빠져들었다. 부시를 ‘거듭난 기독교도자’로 이끈 사람은 유명한 부흥목사 빌리 그레이엄이다. 부시는 백악관을 방문한 기독교 근본주의 신자들에게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백악관 오벌 오피스(대통령 집무실)가 아니라 술집 한구석에 처박혀 술을 마시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종교적인 대통령이다. 백악관 아침 회의는 기도로 시작한다. 부시의 연설에는 성서를 인용한 부분이 반드시 들어 있다. 비단 부시뿐 아니라 백악관 참모진과 행정부 안에도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이같은 강력한 인적 자원을 무기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종교적 믿음을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낙태 허용 반대, 줄기세포 연구 반대, 반페미니즘, 복지예산 축소, 종교 교육 강화 등이 그것들이다.

미디어 활용하며 교세 확장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대외정책이다.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은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 손잡고 부시의 일방주의 외교를 강력 지지하고 있다. 네오콘은 본래 반소(反蘇) 트로츠키주의자들로 민주당에 속했으나,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반전 분위기가 절정에 달하면서 민주당이 좌경화하고 소련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기울자 공화당으로 이동한 사람들이다. 대부분 유대계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며, 극우파인 리쿠드당과 밀착해 있다.

네오콘의 리쿠드당 지지는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종교적 지향과 그대로 일치한다. 예수 재림을 위한 조건인 이스라엘 건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약속한 영토 회복, 예루살렘 성전 언덕에 ‘세 번째 성전 건설’이다. 새로 성전을 건설하자면 성전 언덕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파괴해야 한다. 사원을 파괴하면 적그리스도 이슬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마침내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된다. 이로써 세상에 종말이 오고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천년왕국의 새 세상이 시작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미국에서 급속히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교회 중심으로 선교하는 자유주의 성향 개신교와 달리 텔레비전, 라디오, 출판, 인터넷 등을 주로 이용한다. 텔레비전 선교는 ‘텔레밴절리즘’(televangelism)이란 신조어를 낳을 만큼 인기가 높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유명한 목사들은 대부분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사를 소유하고 있다. 출판 선교도 놀랍다. 종말론을 소설 형태로 쓴 팀 라헤이의 <뒤에 남은 사람>(Left Behind) 시리즈는 전체 12권 가운데 5권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총 5800만권이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지난번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은 고정표를 확실히 지키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2000년 부시는 선거인단 득표에선 승리했지만 전체 유권자 득표에선 앨 고어에 55만표나 뒤졌다. 부시의 일급 참모 칼 로브는 2000년 선거에서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의 유권자 400만이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다고 보고, 이들이 투표장에 나가게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개표 결과 부시가 전체 득표에서 케리에 350만표 앞선 것을 보면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표가 부시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초교파 국제기독교 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지난 11월2일 전세계 교회 가족을 대신해 미국 교회에 보내는 공개 편지를 통해 미국 대선에서 일부 보수적 교회가 당파성에 빠졌음을 지적하고 교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이 편지에는 “하나님이 누구 편이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교회는 시대의 변화가 필요할 때 도덕적 양심이었다. 미국 교회는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위한 도덕적·영적 나침반을 제공해야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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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 공동코뮈니케’를 추억함

4년전 “이젠 살았다”며 기뻐하던 북한 고위관료는 왜 보름만에 흑빛 얼굴로 바뀌었을까

▣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1988년 그의 아버지가 미 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부시(bush)란 그저 ‘덤불숲’에 불과했다. 물론 그 앞에 the를 붙여봤자 ‘아프리카 오지’를 넘어서지 않았다.

2000년 10월12일 나는 평양을 방문 중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 밤 북한 고위관료들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나중에 남북 장관급 회담 북쪽 대표가 된 김령성 민화협 부회장이 종이 한장을 들고 뛰듯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조-미 공동코뮈니케’가 들려 있었고 그의 얼굴은 ‘이젠 살았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공동코뮈니케는 북한과 미국간의 제반 현안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며, 특히 클린턴 미 대통령의 방북을 위해 조만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를 전범으로 고발했다

평양의 고위관료들이 끝없는 터널 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출구 근처에 도달한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만도 한 것이었다.

11일 뒤인 10월23일 약속대로 미 국무장관은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울브라이트 한 사람을 위해 모란봉 경기장에서 10만명이 출연하는 카드섹션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자 끝이었다. 보름 뒤에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들 부시는 북한이 터널 밖으로 나오는 것을 반대했다. 양국간의 공동코뮈니케는 휴짓조각이 되었고 클린턴은 평양에 가지 못했다. 그 뒤 4년 동안 북녘 사람들에게 덤불숲은 철의 장막과 다름없었다.


△ 냉랭한 북-미 관계는 계속될까. 지난 6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3차 6자회담에 참석한 김계관(왼쪽) 북한 수석대표와 제임스 켈리 미국 수석대표. (사진 / 연합)

2003년 3월20일 새벽 부시의 군대는 이라크를 침공했다. 3월27일 나는 그를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고발했다. 재판은 시작되지 않았으나 1년 뒤 미 상원은 부시가 유죄라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두 가지 이유, 즉 대량학살무기와 테러조직과의 연계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확인한 것이다. 역사의 법정은 이미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유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영화 <화씨 9/11>의 감독 마이클 무어는 부시의 재선에도 불구하고 손목을 그어서는 안 될 17가지 이유 중에 3선 연임 금지 조항으로 이번이 그의 마지막 임기라는 사실을 들고 있다. 자살하지 말고 4년만 더 참자는 말이다. 무어 감독의 인내심은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4년을 기다리기도 어렵고 4년 뒤엔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부시에 대한 반감은 케리라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야릇한 기대감을 낳는다. 그러나 이 역시 근거 없는 낙관이다. 다른 나라의 주권과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무시로 짓밟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길은 자주노선밖에 없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저지르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고, 미국의 부당한 개입과 간섭을 물리치는 자주노선이 절실하다.

부시는 미국 백인의 88%가 지지하여 재선됐다지만 부시를 부시답게 만든 데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다. 센 몸한테는 고개 숙이는 게 상책이고 간과 쓸개를 내주더라도 센 놈한테 붙으면 안전과 떡고물을 챙길 수 있다고 믿는 노예근성이 부시를 더 강한 부시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노예근성을 반성하자

정의가 마침내 이긴다는 믿음이 있다면 미국의 대선 결과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잘못 걸어온 지난 50년을 반성하고 잘못 만들어져온 낡은 한-미 동맹을 새로운, 대등한 한-미 관계로 발전시키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역사의 기관차를 덤불숲이 가로막은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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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시련 속에 강해지는가.

사람은 왜 편안함 속에 보수화되는가.


 

 

 

 

 

 

 

 

 


 [6. 10 항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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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조선 난민들의 몸부림을 들어라

[학술- 다시, 동아시아!]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씨와 윤경원 교수의 만남… 스스로를 ‘난민’으로 인식하는 자의 몸부림

▣ 정리 유현산 · 김수현 기자 bretolt@hani.co.kr
▣ 통역 강혜정/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국제협력위원장
▣ 사진 류우종 기자

이 대담은 발랄하게 시작할 수 없었다. 작가이자 도쿄경제대 교수인 서경식(53)씨.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에서 태어났고,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조선을 짓밟은 일본은 그에게 온갖 차별을 선사했지만, 그는 일본어로 읽고 쓴다. 그의 형인 서승·서준식씨는 ‘조국’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가 간첩 낙인을 받고 십여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누구인가, 재일조선인은 누구인가. 한국에 번역된 네 번째 책 <소년의 눈물>(돌베개 펴냄) 출간에 맞춰 귀국한 서경식씨에게 그것을 물었다. 대담자로 재일조선인 문제를 포함해 역사와 탈사회 사상을 연구하는 단체인 TSTH-NET 공동대표 윤경원(50) 숙명여대 교수가 나섰다. 서씨의 언어는 묵직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저녁 대용으로 회의실에 차려놓은 김밥은 밤늦도록 줄지 않았다.


윤경원: 최근 한국에서 과거사 문제가 불거져나왔는데 과거사는 식민지 시대가 남겨놨던 60만 재일 조선인을 빼고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식민지배의 유산만이 아니라 그 유산을 지속해왔던 한국 사회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20세기가 남겨놓은 식민지 시대와 세계 전쟁의 유산을 청산하고 있는지, 최근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 도쿄경제대학 교수시고, 작가로서 활발할 활동을 하고 계시는 서경식 선생님을 모시고 여러 가지 얘기를 듣게 된 점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재일동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이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고 강조해오셨는데, 그러한 노력에도 그 명칭에 대해 관심 없는 게 현실입니다. 다시 한번 재일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 서경식

서경식: 저는 재일조선인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한국분들한테 위화감을 주는 단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 전체에 대한 호칭을 조선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민족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국가가 한국입니다. 민족 전체를 시야에 담기 위해서도 재일조선인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의 존재가 드러내는 역사성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배 때문에 건너오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재일조선인이 존재하는 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그 역사의 산증인이 재일조선인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전후 처리’라고 표현합니다만, 동아시아 전후의 문제와 관련된 역사성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이 잘못된 식민지 지배를 했고 잘못된 침략전쟁을 했다는 역사가 명확해졌다면, 재일조선인이 차별받고 스스로의 정체성 때문에 아픔 겪고 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재일조선인은 1910년 이후 일본으로부터 일본 국적을 부여받았고, 해방 뒤 1952년에 그 국적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국적을 부여받고 그 뒤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던 재일조선인이 어느 국적에 해당하겠습니까. 그때 재일조선인의 조국은 남북으로 갈려서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한번도 북쪽에 대해서도 남쪽에 대해서도 일본 스스로 식민지 지배를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1952년 바로 그 순간에 난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자기 민족의 근대사와 해방 뒤 역사 안에서 재일조선인을 중시해오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한국인들이 근대사를 재일조선인까지 포함한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싶어요.

윤경원: 재일조선인의 역사성 문제를 두 가지로 요약해주셨습니다. 하나는 식민지 시대 산증인, 또 하나는 전후 처리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재일조선인이 한국 근대사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주셨는데, 그런 부분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 지워질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는 것이 1970년대 이른바 ‘서경식, 서승 간첩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지배, 냉전,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 구조 속에서 유지돼왔습니다. 지금은 정치적 상황이 바뀌었지만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독재 체제의 피해자로 평가를 한다거나 냉전의 희생물로 평가하는데, 재일조선인이라는 입장은 빠져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일본어를 하는 재일조선인들을 보면 우리는 욕하고 조롱하기 바빴다. 서경식씨가 말하는 민족과 역사는 국민국가의 틀에 찌들어 사는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히 우리의 경직된 관념들을 찔러대며 형들의 옥고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왜 민족의식이라는 표현을 버리고 ‘우리의식’(우리라는 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는지 설명해주었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져도 공동의 역사적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가 가지는 의식 말이다.

서경식: 그 질문에 답변드리기 위해 60년대라는 시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52년 재일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면서 난민 상태일 때 세 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차별을 받는 난민 상태 그대로 일본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1959년부터 시작됐던 ‘귀국운동’입니다. 일본에서는 귀국운동, 한국에서는 북송운동으로 표현합니다. 1959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9만5천명 정도의 동포가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회주의 건설에 꿈을 위탁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일본 사회에서는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하나의 선택이 있다면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교 수립이 안 된 시점에서 한국에 간다면 다시는 일본으로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귀국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것이 1965년인데, 바로 그때 저희 형제는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희 형제는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한-일 조약은 재일조선인 집단 안에 한국 국적자와 그외 조선적을 만들어 분단을 가져왔고, 특히 한국국적자에게 비교적 안정적인 ‘협정영주권자’라는 지위를 부여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당시 박정희 정권과 당시 일본 정권이 협력해서 재일조선인이라는 민족집단을 냉전적 사고로 찢어놓은 시도와 다름없습니다.

60년대 형들 얘기로 옮겨가면 우리는 본국 사람들의 투쟁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일조선인 안에서도 차별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소극적인 의미뿐 아니라 한국에서 진행되는 민주화·통일운동에 재일조선인으로서 참여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제 형인 서승, 서준식씨가 한국으로 유학간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습니다. 형들은 북한이 일본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보낸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구속됐습니다. 이 간첩사건 안에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내에서 지역적으로 분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의 가족 안에 총련계 사람도 민단계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적으로 찢어놓을 수 없는 재일조선인을 국가보안법으로 찢어놓으면서 가두었던 것이 저희 형들을 포함한 재일조선인 간첩단 사건입니다. 정확한 수는 기억할 수 없지만, 형들을 시작으로 해서 수백명의 재일조선인들이 한국에서 체포되고 구속됐습니다. 그 사람들이 받았던 혐의들 중 공통된 점은 일본에서 총련계 인사와 접촉했거나 대화 중 이적행위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재일조선인으로 생활하는 한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국가보안법은 남과 북,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장벽일 뿐 아니라 국내와 국외, 조국과 재일조선인을 나누는 장벽이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 윤경원

윤경원: 넓은 의미에서 재일조선인을 반난민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반난민이라는 규정을 통해 좀더 많은 ‘우리’를 애기할 수 있을 겁니다. 난민 논의는 일본의 전후 책임을 둘러싼 논쟁에서 나온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과거의 전쟁 책임과 현재 일본 국민의 의식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책임의 주체와 반난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요.

서경식: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의해 난민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 국민 대다수에게 그런 인식은 없어요. 자기들 국가가 난민으로 만든 존재에 대한 의식은 없습니다. 제 저서 중에서 ‘반난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간 난민들처럼 먹을 것이 없고 살 곳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추방된 상태라는 의미에서 사용했습니다.

책임주체의 논리와 관련지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설명드리죠. 1990년대에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들이 존재를 드러냈는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산증인으로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 충격 안에서, 그러면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이런 존재들과 관련해 어떤 책임이 있는가 하는 논의들이 불거졌습니다. 그런 논의들이 결실을 맺지 못해서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대부분 내가 어떤 책임이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일본 국민들은 자신의 발언이나 행동이 국가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 생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 사회에서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재일조선인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라는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 반난민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하지만 그런 저의 시도는 예상한 것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과 난민으로서의 의식을 이야기하던 서경식씨에게 윤경원씨는 북-일 수교를 찬성한 이유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북-일 수교와 함께 납치사건이 밝혀지면서 재일조선인은 일본인들의 물리적인 폭력까지 견뎌내야 했다. 서씨는 당시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온갖 차별을 꿋꿋이 버텼던 재일조선인들까지 일본 국적을 얻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고심 끝에 얻은 결론은 “우리의 반식민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전세계적인 반식민 투쟁을.

윤경원: 일국주의적 관점에서 책임주체가 얘기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난민적인 자기인식이 이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열된, 분단된 존재로서 자기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자기가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생활을 하는가라는 면에도 각인돼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국, 고국, 모국의 어긋남, 모국어와 모어의 어긋남 등을 유대인의 경험을 통해 풀어내고 계신데요.

서경식: 현재 전세계에 난민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최소한 1억명 이상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예외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 모습의 진실을 드러내는 존재들인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현재 세계 대다수 국민들은 ‘조국’ ‘모국’ ‘고국’이 자신에게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는 조국은 자기 선조의 출신지, 자기의 뿌리가 되는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국은 자기가 국민으로서 소속돼 있는 국가기구죠. 고국은 자기가 태어난 땅입니다. 제게는 조국은 식민지 지배를 받기 이전의 조선반도입니다. 그리고 제가 국적을 두고 있는 곳은 대한민국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일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게 세 가지는 다 어긋나 있습니다. 게다가 재일조선인은 자기의 조국을 침략하고 지배하고 그럼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각각이 어긋나 있고 겹쳐지지 않는 존재들이 인류 전체로 봤을 때 예외적일까요. 난민들은 어긋나고 겹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기구는 조선반도를 출신지로 하는 많은 사람들 중 일부 사람들의 국가기구에 불과합니다. 이 세 가지의 일치를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고 의심해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열돼 있다는 것은 불쌍하거나 슬픈 것이 아니라 21세기적인 인류의 존재양식이라고 봅니다. 이 분열을 국가주의로 통일하고 하나로 묶는 것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재일조선인을 포함한 재외동포의 요구와 바람을 담아내려면 현재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잠깐 모국어와 모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어로 글을 쓰면서 한자로 모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대체되는 경우가 많지만,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모어는 자기가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는 첫 언어입니다. 재일조선인 대다수에게 그들의 모어는 일본어입니다. 모국어는 글자 그대로 자기가 속한 국가가 국어로 삼고 잇는 공용어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모어가 모국어와 일치하는 예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저의 형인 서승씨도 모어는 일본어입니다. 60년대에 한국으로 유학해서 모국어인 조선어를 습득하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저는 식민지배로 인해 뿌리가 마를 뻔했던 모국어의 권리를 일본에게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한 나라의 국어를 가지고 있는 국민에게 모어 마이너리티가 모어를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모어를 즉각적으로 모국어로 번역해버리는 것은 모어와 모국어가 당연히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어를 모국어로 갖고 잇는 대한민국 국민 안에 다른 모어를 가지고 있는 재일조선인 같은 사람도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다언어 사회, 다문화 사회로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윤경원: 한국 방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죠. 선생님 책이 그동안 4권 정도 번역됐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책이 한국에 번역되는 것에는 어떤 느낌, 어떤 기대가 있는지요.

서경식: 만일 국내에 있는 사람들이 제가 지금까지 계속 말씀드렸던 바와 같은 단일민족주의적인 국가관이나 언어내셔널리즘, 폐쇄적인 국가주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생각들이 조금씩 바뀌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윤경원: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창조하는 인간과 감상하는 인간의 단절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 단절을 간단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토로하십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무슨 어떤 의미인지요.


△ 1971년 4월 대선 직전에 터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주인공 서준식(왼쪽), 서승 형제. 재일조선인의 특수성과 함께 이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 한겨레21)

서경식: 칠흑 같던 80년대 형 둘이 옥중에 묶여 있고 부모님께서 차례차례 돌아가셨을 때 조금이라도 숨을 쉬고 싶어서 유럽을 여행하면서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저는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라는 조각을 보게 됐습니다. 이 작품은 실은 옥중에 있던 서준식씨가 책으로 그 조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편지에 쓴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온몸으로 반항하며 가치를 창조하면서 싸우는 인간과 단순히 미술로서 감상하고 있는 인간인 나 사이에 단절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당시 한국의 옥중에서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인간과 나라 밖에서 먹을 걱정은 안 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대비시킨 것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단절을 언제나 의식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진정한 투쟁의 밖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 단절이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을 해버리면 저는 진정한 투쟁 밖에 인생이 끝날 때까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지금은 진정한 투쟁 밖에 존재하지만 나의 투쟁도 언젠가는 합류할 것이라는 바람을 담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재일조선인들이 지금 전개하고 있는 몸부림이나 북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언젠가는 합류하리라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대담이 끝나갔고 대담자들이나 통역자나 기록을 맡은 기자나 파김치가 됐다. 그리고 슬슬 그의 ‘몸부림’을 어떻게 한국어로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걷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통역을 맡은 강혜정씨가 마지막 말을 옮기며 “감동적인 말로 끝내시네”라고 혼잣말 하는 것을 기자는 엿들었다.

윤경원: 선생님이 서 계신 자리에서 하는 몸부림이 새로운 형태로 어떤 희망을 향해서 나타나는 게 ‘전야’라는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왜 전야이고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지요. 어떤 활동 계획을 갖고 계신 건지요.

서경식: 전야라는 단체의 이름을 제안했던 것은 접니다. 현재 일본의 상황이 정말 전쟁 전야로 느껴지기 대문입니다. 그런 사태가 전개됐을 때 일본 안에서 살고 잇는 재일조선인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는 저 자신도 상상하기조차 싫은 악몽입니다. 전야가 가지고 잇는 특징 중 하나는 발기인 이사 중 나와 같은 재일조선인이 몇 사람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소수파, 마이너리티가 가지고 있는 위기감 등을 일본 사회에서 깊고 넓게 전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70년대 이후 패배를 경험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잘 쓰는 레토릭이 뭐냐면 전망이 없다면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루쉰의 말을 떠올립니다. 희망은 있는 거라고도 없는 거라고도 할 수 없다…. 그건 달리 말하면 인간은 희망이 있어서 걸어가는 게 아니라 걷는 가운데 희망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걷지 않으면 희망이 절대로 없다는 이야기겠죠. 저는 아무리 전망이 안 보여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국의 사람들이 전야의 활동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지원도 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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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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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유] 일본에서 노동운동으로 경찰에 70여번 연행, 경성으로 강제송환, 2번의 탈옥, 경성트로이카 주도, 고문후유증으로 옥사. [김삼룡]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재유와 만남, 인천 하역노조에서 활동, 검거된 후 옥살이 중 해방맞이, 해방 후 남로당 주도, 원산 노동운동의 전설인 이주하와 함께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 남산근처에서 총살당함, 경성트로이카의 일원. [이현상] 한국전쟁 휴전 후 지리산 빨치산 사령관, 북으로부터 버림받고 지리산에서 토벌대에 피격, 경성트로이카의 일원.

소설 '경성 트로이카'는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배의 강도를 더해감에 따라 수많은 자칭 민족주의자들의 변절로 반도에 짙은 어두움만이 가득하던 1930년대에서 40년대 초반에 국내에서 저항세력의 주류를 이루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다룬 책이다. 경성트로이카로 대변되는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과 더불어 이관술, 미야케 교수, 박헌영을 비롯해 동덕여고 동창인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등 여성 사회주의자들까지도 소설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오는데, 어찌보면 소설이라기 보다 한 편의 역사다큐멘터리를 보는 듯이 그려진 그들의 모습은 비단 영웅처럼 초인적이지도 않으며, 빨갱이라 이름 붙여진대로 냉혈한들도 아니다. 애초에 민족주의라는 것이 이념적 구분도 아니거니와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으로 이념의 성격을 띈다하더라도 이미 30~40년대에는 대다수 민중들의 해방에 대한 희망조차도 꺾어버린채 대부분의 국내 민족주의 인사들이 변절한 상황에, 조선공산당의 괘멸 이후 암암리에 지하활동을 하던 변혁세력의 주도적 이념으로 자리잡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념적 지표의 빈 자리를 채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에서야 아름다운 벗들의 되살아옴을 보며 즐거울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철저하게 희망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굴하지않는 신념과 동지애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역사에 헌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만 그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도 나타나지만 한때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었을 당시, 북에서는 조만식 선생과 교환을 하자는 제의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이 들어선 남쪽에서는 물론이고, 소련과 북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민족의 역사라는 수레바퀴가 올곧게 굴러가는데 꽃잎처럼 흩뿌려진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책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한국현대사의 아쉬움과 더불어 그들의 역사적 헌신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지난 역사를 현재의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 이재유가 그 당시 주장했다는 주5일 근무, 의료보험, 다각적 사회보장제도가 지금 대한민국에 실현되고 있다고 대한민국이 사회주의국가는 아닌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하기에 역사적 아쉬움과 왜곡으로 가득찬 한국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에 대한 재평가는 되살아온 벗들을 맞는 우리들의 책임이라 생각된다. 변절한 수많은 자칭 민족주의자들의 변절의 불가피성에 대한 항변을 듣기 전에 버림받은 시대의 주도세력에 대한 정당성 부여가 우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책을 덮은 내내 들었다.

중국의 현대문인이자 변혁가인 루쉰은 희망은 있는 거라고도 없는 거라고도 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희망이 있어서 걸어가는 게 아니라 걷는 가운데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명제일 것이다. 식민지 암흑시기, 되살아온 그들은 그 암흑 속에서 새벽처럼 밝아오는 해방이라는 희망을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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