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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 소통의 기술, 세상을 향해 나를 여는 방법
유정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강한 인상에 자신감 넘치는 중년 여성이 당당하게 팔장을 끼고 정면을 바라보는 표지...
다소 중성적인 이미지의 얼굴이 그녀의 직업에 대한 상상력을 극대화시켰다. '성공한 보험 아줌마인가?', '급부상 여성 벤처인 이야기일까?', '강남 입시학원의 스타강사인가?'
사진으로 상상에 빠진 나는 하단의 출판사 로고에 시선을 꽂았다. 아니, 문학동네가 뭐 이런 자기 개발서를? 그렇게 편견으로 가득한 상상을 하던 나는 황당하게도 책 제목을 맨나중에 읽고 말았던 것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이 책은 매력없는 표지로 인해 반쯤 죽고 들어간 책이었다. 아나운서 출신답게 논리 정연하고 핵심을 찌르는 글들이 거침 없는 흡인력으로 나를 빨아 들였다.
스몰토크로부터 눈사람의 행복까지 그녀의 2세인 어린 장호와 근호 형제가 종종 등장하는 친근함은 폭소와 행복의 멜로디이자 소통과 인터뷰의 핵심을 적절하게 전달했다. 본문을 대충 몇 개만 살펴 보자~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느 날 백악관을 찾아온 한 군사전문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가 떠난 뒤 비서에게 몹시 기분 좋은 어조로 '그 사람 참 말을 잘하는 사람이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전문가가 한 것이라곤 조용히 루스벨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가끔씩 '그렇군요' '아, 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등으로 응수한 것 뿐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통에 대한 관심, 특히 듣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지 또 하나의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아침 국무회의에 들어오는 각료들에게 평소에 하는 아침 인사인 양 이런 말을 해보았다고 한다.
"내가 어젯밤에 우리 할머니를 죽였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것 같은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도 대통령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에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엄청난 고백을 하는 최고 통수권자의 말에, 각료들은 마치 날씨 이야기나 진부한 인사에 대꾸하듯 평범한 아침 인사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44~45쪽)
막연히 헌혈이 필요하다고 감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정확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헌혈하고 있으며 현재 상황에서 혈액이 얼마나 부족한지, 대한헌혈협회나 보건복지부 등 전문기관에서 나온 수치를 제시해야 한다.
의식의 표면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면 이제 청자는 입장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와 제안 받은 행동을 수행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화자는 이때 청자에게 명확한 지침을 제공함으로써 행동의 변화를 망설일 수도 있는 청자가 수행에 나설 수 있도록 돕는다. '헌혈이 그 정도로 필요한 것이구나'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청자가 그 대열에 동참할 수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는 빈혈이 있어 피를 뽑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생각을 불식시킬 수 있는 전문적인 의학 정보를 제공해야 하며 어디에 가서 어떻게 헌혈을 해야 하는 것인지 헌혈하는 절차를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 밖에도 헌혈했던 사람들의 체험담 등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청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130~131쪽)
말을 잘 못하는 데는 표준화된 틀이 있는 것 같다. 거짓이거나 무언가를 감춘 말, 진심이 아닌 판에 박은 듯한 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말, 실은 자신의 의견에 불과하면서 검증된 사실인 것처럼 하는 말, 안 해야 할 말,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말,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는 말, 현학적이거나 어려운 말, 대중에 영합하거나 잘 보이기 위한 말, 치명적인 오류를 담은 말 등이 그 예이다. (137쪽)
말하자면 스스로에게 신용장을 발부하는 행위이다.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대화로부터 잠시 벗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방법sin-licences 또한 자주 쓰는 방법이다. '지금 이런 전문적인 이야기가 적절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잠깐만 언급해 보면'이라고 하면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것임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또한 부정적 반응이 나올 것을 알고 있다고 인정하는 방법cognitive disclaimer이 있다. '여러분께서 이 사람을 정신 나간 인간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제 논리를 들어보시라' 등등. (164~165쪽)
찬성측은 이제 왜 길거리에서 흡연이 금지되어야 하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그냥 그게 싫어서' '나는 안피우니까'가 아니라 길거리 흡연을 금지했을 때의 사회적 이해득실 등을 따져 꼼꼼히 논거를 뒷받침해야 한다.
필수 쟁점이란 수많은 잠재적 쟁점 가운데 찬성측이 자신들의 논제를 증명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주요 쟁점을 말한다. 깨끗한 공기를 마실 권리, 건강 문제, 길거리 흡연을 금지하는 국가가 늘어나는 추세 등 논증을 위한 쟁점은 다양하다. (234쪽)
지난 10년간 정부 당국자들은 대북정책에 있어 국민의 뇌리에 '퍼주기'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문제 정의를 남기지 못했고, 대언론 정책에 대해서는 '대못질'이라는 개념에 대적할 만한 문제 정의 만들기에 실패했다. 물론 '퍼주기'라는 개념은 지난 정부의 햇볕정책에 부정적인 언론이 만들어낸 말이지만 정부는 이를 넘어선 개념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비록 '친생명'이라는 옷을 입은 낙태반대론자에게 '반생명'으로 공격당할지라도 낙태찬성론자가 진정으로 펼치고자 하는 취지는 '선택옹호'이다. 이처럼 결과적으로는 '많이 주고' '문을 걸어 잠근' 것이라 해도 적어도 '퍼주기'나 '대못질'만은 아닌, 정책의 선한 개념이 존재하는 것인데, 당국자들은 이를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햇볕정책은 퍼주기가 아닌 '나누기', 대언론 정책은 대못질이 아닌 '거리두기'라는 개념 정의가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 확실히 자리잡아 국민들과 공유되었다면, 대선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45쪽)
이 책은 급한 성격 등을 이유로 논쟁과 토론에서 속마음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오해만 불러 일으키는 나의 단점에 대해 논리적인 분석을 이끌어낸 책이기도 하다.
지금 시점에서는 온갖 부조리의 중심에 서 총리인준을 기다리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추천사가 옥에 티로 남은 책이기도 하지만, 지면 강좌가 이 정도로 깔끔한데, 서울대학교에서 직접 진행되는 그녀의 커리큘럼에 몸을 맡긴다면 얼마나 강력할까?
문학동네가 이 책을 출판한 이유도 전혀 생뚱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독서였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책 중에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