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집 애지시선 28
정군칠 지음 / 애지 / 2009년 8월
장바구니담기


바다의 물집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파도의 청징淸澄한 칭얼거림이 자꾸만 들려왔네
깍지 낀 손 풀어 그 울음 잠재우고 싶었으나
달빛은 바다 위에서만 출렁거리고
나는 서늘한 어둠의 한켠에 오래
오래 머물지 못했네-26~27쪽

달의 난간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生涯의 끝에 이르러 멈추었을 걸음 망설임의 흔적인 듯 바위 틈에 간신히 붙은 뿌리, 뿌리와는 달리 땅 쪽으로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온몸으로 지나간 길, 마음 한 번 비틀어 曲을 만들고 마음 다시 비틀어 折을 만들었으나 길 밖을 딛었을 자의 흔적은 허공뿐입니다

자주 바람 불어 달이 잠시 흔들렸으나 죽음마저 품어버린 바다는 고요합니다-98~9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발 내 말 좀 들어 주세요 - 어느 날 갑자기 가십의 주인공이 돼 버린 한 소녀의 이야기
세라 자르 지음, 김경숙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4월
품절


제이슨은 침대 안에 있었다. 나는 바닥에 앉았다. 아빠가 우리를 감시카메라로 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리가 같이 뒹군다거나 코카인을 흡입한다거나 서로의 젖가슴에 피어싱을 뚫는다거나, 그밖에 내가 자투리 시간에 하고 있을 거라고 아빠가 상상하는 수많은 일들 대신, 순진하게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 아빠가 얼마나 놀랄까.-83쪽

이게 내 삶이야. 바로 이게. 내가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때, 편의점에서 탐폰과 식빵을 집어 들고 소품목 전용계산대에 줄을 섰다가 졸린과 마주치면, 졸린은 그날 집에 가서 남편에게 말할 것이다.
"가게에서 디에나 램버트를 봤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알던 앤데, 아주 헤픈 애였거든요. 겨우 열세 살 때 중학생들 전체와 잤다지 뭐예요."
내게 친구가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대런 오빠와 스테이시 언니가 과연 나와 함께 살게 될지 모르겠다. 아빠가 그날 몬타라에서 잇었던 일을 생각하지 않고도 나를 볼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다.-120~121쪽

"좋은 질문이야. 나는······ 어디 보자······ 마흔 여섯이거든. 내 장담하건대,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만큼 얼빠진 짓을 많이 하지는 못했을 거야. 그리고 아직도 난 그 게임 속에 있으니까."
나는 마이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이클은 그저 가게를 운영하는 마음씨 좋은 중년 남자일 뿐이었다. 그는 잘 살아가고 있었다.-199쪽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빠를 잘 보란 거야. 아빠는 너나 나나 스테이시나 페이퍼 회사나 다 용서하지 못해. 진심으로는 못하지. 아빠 자신마저 용서 못할지도 몰라. 아빠는 그 중 어떤 것에서도 벗어날 수 없어. 그리고 진정한 삶을 누릴 수도 없오. 아빠는 심장발작을 일으킬 듯한 모습이 아니고서는 우리 모두와 식탁에 앉아 있을 수 없어."-23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물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65
신해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런 부담없이 평생토록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여자 친구...
시인 신해욱은 아주 이상적인 이성 친구가 될 수 있어 보인다. 물론 그녀의 남편(결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한 너그러운 영혼을 가진 자만이 자격이 있을 것만 같았다. 평생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아내는 그에게 축복일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말 한 마디와 눈빛은 편안 했고, 그녀 스스로 풍기는 향기와는 조금 달리 시어는 더욱 소녀스러웠지만 독특한 시선의 또다른 매력이 전해졌다. 
 


나는 등이 가렵다

한 손에는 흰 돌을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다.

우산 밖에는 비가 온다.

나는 천천히
어깨 너머로 머리를 돌려
등 뒤를 본다.

등 뒤에도 비가 온다.

그림자는 젖고
나는 잠깐 슬퍼질 뻔한다.

말을 하고 싶다.
피와 살을 가진 생물처럼.
실감나게.

흰 쥐가 내 손을 떠나간다.

날면,
나는 날아갈 것 같다.

(28~29쪽, '천사' 전문)

우산 밖에 비가 내리고, 등 뒤에도 비가 오고, 그림자는 젖는다는 데 비오는 날 그림자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 있는 탓일까? 아주 자주 등이 가렵다며 날개 쪽을 긁어 달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미소가 그려진다. 그녀도 스스로를 천사라 하지 않겠는가.


열두 살에 죽은 친구의 글씨체로 편지를 쓴다.
안녕. 친구. 나는 아직도
사람의 모습으로 빕을 먹고
사람의 머리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오늘은 너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구나.

냉동실에 삼 년쯤 얼어붙어 있던 웃음으로
웃는 얼굴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구나.

너만 좋다면
내 목소리로
녹음을 해도 된단다.

내 손이 어샛하게 음직여도 너라면 충분히
너의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답장을 써주기를 바란다.

안녕. 친구.
우르르 넘어지는 볼링핀처럼
난 네가 좋다.

(
30~31쪽, '보고 싶은 친구에게' 전문)

신해욱 시인의 연필 잡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나는 미소 지었다. "독특 하시네요?" 그녀는 답했다. "그래서 제가 글씨를 이쁘게 못 써요." 아니다. 나는 그녀의 글씨가 매력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밝고 경쾌한 성격처럼...
친구들의 글쓰기를 흉내 내길 즐겼다는 소녀가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초등학교 시절 동창녀의 죽음이 삶과 죽음을 넘나드며 평화로운 우정을 논한다. 멋지다!

오늘 점심으로는 물고기 밥을 먹었다.

길고 우아한 목을 가진 물고기를 상상하는 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목선을 종이 위에 그리고
오랫동안
배가 고프지 않기를 기다린다.

종이는 물밑에 가라앉고
죽은 물고기는 가볍다.

심심한 노래를 부른다음
죽은 물고기와 함께
소금을 나눠 먹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47쪽, '물의 가족' 전문)


물고기에게 목을 붙여 보고 싶다는 상상이 시인답다. 그렇게 상상이 시작되면 술술 멋진 시가 나올 수 있는 시인이기에 그녀가 더욱 아름답다. 앞으로는 내가 즐겨보는 문학 계간지에서 그녀의 이름을 특히 궁금해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64
신영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녀는 하늘 보기 보다는 바닥을 보고 걷는 여자였다.
매우 중성적인 이름과 중성적인 콧날... 그러나, 분명한 미인이었다.
표제시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를 읽기 전에 그녀가 매우 긴 여자라는 것도 멋스럽다.
내가 아는 시인의 빈한함은 편견이었다. 그녀에게선 오히려 여유가 느껴졌다. 


옥상에 앉아 있던 태양이
1층 유리창으로 내려온다.
유리 속을 걷는 구두는 반짝인다

귀가 접힌 어떤 사람들은
계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간다
계단으로는 지상에 없는 음악이 올라온다

작품은 지상에 걸리지 않는다

나의 아름다운 바지는 다리가 하나이다
지퍼 하나, 주머니는 넷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하체가 지하로 빠진 골목은
골반에서 화분을 키운다
지상에 없는 향기가 흙에 덮여 있다

나는 천천히 걸어 여섯 시 꽃에 닿는다

닫히는 문에 손을 찧으며
여섯 시 꽃으로 들어가 여섯 시 꽃에서 나온다

길가에서 아이들이
발끝을 비벼 머리를 지우는 장난을 한다
머리를 지운 아이들은 사라진다

멀리 떨어진 머리를 주우러
나는 길어진 내 그림자 위를 걸어간다
귀가 지하에 잠겨 있을
내 그림자의 끝으로

(10~11쪽,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전문)




A 죽겠을 만큼 길다. A 똑같다. A 계속이다. A 강요한다. A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A 다시없이 밉다. A 왜 소리를 치지 않나? A 떠오르지 않는다. A 건너다 본다. A 사랑하였다. A 푸른 채로 있다. A 실색한다. A 흥분이 없다. A 통하리라. A 익으리라. A 본능이다. A 오고 만다. A 늘어졌다. A 썩는다. A 조용히 썩는다. A 울기나 한다. A 짖지를 않는다. A 이상하다. A 오지 않는다. A 헤어진다. A 먹는다. A 알 길이 없다. A 오지 않는다. A 다름없다. A 열리리라. A 패쇄되었다. A 주저한다. A 귀찮다. A 견디기 어렵다. A 만났다. A 붉고 검다. A 미지근 하다. A 아무것도 없다. A 들여다 본다. A 틀림 없다. A 이동한다. A 어쩔 작정인가. A 응시한다. A 크고 슬프다. A 분간할 수 없다. A 반복한다. A 질러본다. A 5분이다. A 오는 것이다. A 설명할 수 없다. A 어쩌라는 것인가. A 관계없다. A 버티고 서 있다. A 피할 수 없다. A 답답해야 한다. A 끈다. A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A 아무것도 없다.

(100쪽, '점의 구성' 전문) 

이상의 '권태'에서 서술부 가져오기를 했다고 밝힌 이 詩는 에로틱하다. 어느 누구도 정답을 해석할 수 없으며, 각자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 특성은 오로지 시인에게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차분한 목소리로 음의 고저 없이 평이하게 읽는 시인의 목소리가 Envy의 A Warm Room의 리듬과 함께 부드러움으로부터 점점 강렬하게 울려 퍼진다. 시인의 선곡이 귓가를 맴돌며, 읽는 즐거움을 듣는 즐거움으로 발전 시킨다.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창문을 열면
귀에서 귀로 냄새가 퍼졌다

그 발바닥을 보려면
얼굴을 바닥에 붙여야 하지
아무도 공중에 뜬 자국을 보지 못한 때
문자가 내려와 땅을 디디려는데
바람이 그것을 가져왔단 말이지

구더기처럼 그림자가 떨어졌다

한 줄 남기고 다 버려 우리들의 문학수업

시외로 가는 차량 근처에 너를 떼어버리고 오다
멀리멀리 가주렴 문장아, 내가 사랑했던 남자야

살갗 같았던 문장과 이별하고도
아름다운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나는
목만 끊었다 붙였다

태양 아래 서서 혼자 부르는 노래
내 그림자 길이만큼 땅을 판다
내 그림자를 종이에 싼다
내 그림자를 땅에 묻는다
내 그림자 무덤에 두 번의 절
그리고 축문

오늘 나는 그림자 없이 일어선다
흰 눈동자의 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을 완성할 즈음
내 발목을 잡는 검은 손
어제 장례를 치른 그림자가 덜컥 붙는다
발끝을 내려다봐

끊은 목 아래
꿈틀거리는 애벌레들

이별은 계속된다

바람이 문자를 가져간다
이것은 창가에 매달아놓은 육체 이야기

붙이고 붙인 살덩이를 끊고 끊어
차분히 내려놓을게
공중에 뜬 발바닥 아래로

다 내려 놓을테니 다 가져가란 말이지

(101~103쪽, '발 끝의 노래' 전문)
 

그림자만을 추적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시인이 부럽다. 끝으로 짧으나 충격적이었던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시...

공중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머리카락의 밤 수십 개의 귓구멍으로 둘러싸인 머리통 하늘거리는 귓바퀴들 콧수염 속에서 자라는 눈알 등에 촘촘히 박힌 손톱 배꼽에서 빠져나오는 꼬리 비늘의 반대 방향으로 칼날을 넣고 다리를 긁는 손 바다에서 수족관으로 수족관에서 언덕으로 옮겨진 물고기인간 땅에 머리를 박고 두 다리가 붙은 바지를 입고 지퍼를 올렸다내렸다 내 사랑

기억해봐 나무를

(55쪽, '기억은 기형이다' 전문)




나는 이제 신영배의 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을유세계문학전집 13
에밀 졸라 지음, 최애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밀 졸라 일대의 역작 '루공-마카르 가'시리즈의 열여섯 번째에 자리 잡은 '꿈'은 비교적 따분하고 재미가 없는 소설이다. 재미로 소설 읽기를 추구하는 독자라면 피해가는 것이 좋겠다. ^^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아그네스 문... 19세기 중반, 얼어붙은 우아즈 강과 피카르디 지방의 평원을 뒤덮은 눈으로 시작된 문장은 마치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의 치밀한 묘사처럼 매력적인 건축물 분석처럼 읽혀 진다. 그러한 묘사 끝에 등장하는 추위에 떨며 쓰러지는 어린 소녀가 있었으니 성당 옆에서 사제복 장인으로 생활하는 위베르 부부에 의해 발견 된다. 9살 업둥이 소녀 앙젤리크는 '황금빛 전설'을 읽으며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기쁨으로 아름답게 성장한다.

어느 날 저녁, 앙젤리크는 때때로 즐겼듯이, 자신의 손에 키스를 하던 중에 분명 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너무도 부끄러워 당황하여 돌아섰다. 그리고 아그네스가 그녀의 몸짓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그네스는 그녀의 육체를 수호하는 성인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앙젤리크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소녀가 되어 있었다. (51쪽)    

소녀가 아그네스에 빠져들 무렵, 위베르는 파리에 들러 소녀의 친모가 아주 행실이 나쁜 푸카르 부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온다. 15세가 넘어야 합법적 입양이 가능한 그 시절이었고, 위베르틴이 비공식적인 후견인이 되기 위한 문서가 서명되었다는 사실을 막 확인하고 돌아오는 순간, 위베르는 소녀에게 친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이제 앙젤리크는 위베르부부의 딸이 되었다. 

"행복은 너무도 단순해요. 우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행복해요. 왜냐고요?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게 다예요! 어렵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기다리는 사람이 찾아오는 날, 어머니는 아시게 될 거예요. 우린 곧 서로 알아보게 될 거예요. 한 번도 그를 본 적은 없지만 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 그는 그러면서 대답할 거예요. 그러면 다 끝나는 거예요. 영원히. 우리는 어떤 궁전에 가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 침대에서 잠을 자겠죠. 오! 너무도 간단해요!"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그만해!" 위베르틴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꼬리를 잘랐다. (78쪽)


어머니 위베르틴의 다그침에도 여유로운 미소로 고집스러운 앙젤리크의 사랑론... 딸을 사랑하여 감싸는 위베르...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사제복에 수놓기라는 가업을 잘도 익혀가는 앙젤리크, 백합꽃 자수를 완성시키고 흐뭇해 하는 아름다운 처녀... 카트린의 지혜와 엘리자베트의 겸손함과 아그네스의 순결함을 간직하고 싶었던 그녀... 그리고, 남모를 비밀!

꿈속에서 그녀는 그가 그녀의 침실 커튼의 희끄무레한 히드 덤불 사이로 소리없이 들어오는 것을 분명 보았다. 그녀의 뇌리는 꿈속에서든 깨어 있을 때든 온통 그로 가득했다. 그는 그녀의 그림자 곁에 늘 함께 있는 정다운 그림자였다. 그녀는 비록 혼자였지만 꿈속에서는 두 그림자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만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위베르틴에게 모든 것을 말해 왔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위베르틴에게조차 비밀이었다. (105쪽)

매사 즐겁고 행복하며, 새하얀 빨래처럼 순결한 이 처녀의 한 마디가 아름답다.
 
"어머니, 잠시만, 잠시만요!······ 수건들 위로 이 커다란 돌을 얹어야겠어요. 이 도둑질 잘하는 개울물이 옷을 갖고 달아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109쪽)

오전, 개울가에서 빨래를 즐기는 그녀를 훔쳐보던 노동자.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다가 순간의 실수로 캐미솔이 급류에 떠내려 갈 때, 혼신의 힘으로 질주하여 그것을 구해다 주는 청년 노동자. 그리고 오후, 널어 놓은 빨랫감들이 바람에 휘날려 곤혹스러울 때 또 다시 나타나서 도와주는 그 청년 펠리시앵은 자신이 유리 채색공이라고 소개한다. 남몰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선행을 즐겨오던 앙젤리크를 향한 펠리시앵의 스토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사랑 고백은 그녀를 더욱 움추려 들게 만들었고, 그녀를 향한 그의 접근 방식은 자수를 의뢰하는 것으로 변형되었지만 갈수록 냉냉해지는 그녀 때문에 가슴은 더욱 아프다. 하지만 더 아픈 것은 사실 앙젤리크였다.

모녀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은 그녀들을 알아보고 칭송했다. 검소한 면직으로 옷을 입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어머니, 흰색의 얇은 원피스를 입고 대천사의 우아함을 풍기는 딸. 그녀들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렇게 의자 위에 올라서 있던터라 너무도 눈에 띈 나머지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그럼요, 부인, 그럼요. 저 청년은 주교님의 아들이에요! 그걸 모르셨수?······ 참 잘생겼어. 게다가 부자이기까지 하고. 아! 원한다면 도시를 통째로 살 수 있을만큼 부자지. 백만장자야. 백만장자!" (196쪽)
  

서서히 드러나는 청년의 정체, 전형적인 신데렐라 소설의 전환점을 도는 듯 싶었지만, 그들에게는 역시나 전형적인 방해물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이미 부모들에 의해 준비된 정략 결혼이 아니겠는가. 

"아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결혼 계획이 서 있었던 거지. 모든 게 결정되었던 것 같아. 코르니유 신부님이 오는 가을에 그가 부앵쿠르 가문의 클레르 아가씨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고 확언을 해 주시더구나······. 부앵쿠르 저택 알지? 저기, 주교 관저 옆에. 그 집안은 주교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란다. 쌍방 모두 가문으로나 재산으로나 그보다 더 좋은 걸 기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 이 결혼에 대해 신부님의 칭송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217쪽)

이 소설에는 젊은 남녀의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었다. 이베르틴의 위대한 사랑은 부모를 등지고 가난한 위베르와 결혼 하기에 이르렀고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저주를 받았었다. 장모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사위 위베르는 수양딸의 고통에 참지 못하고 울부짖는다.

그는 울었다. 그리고 울면서 외쳤다.
"아! 당신은 지금 저기 위층에 있는 우리 아이에게 형벌을 내리고 있는 거요······. 당신은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처럼 펠리시앵이 우리 아이와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아. 당신은 그 아이가 당신처럼 겪기를 원치 않고 있어." (263쪽)


허락받지 못한 사랑에 병든 처녀,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이제 영혼 속으로 악이 침투해 오는 다섯 창문인 감각에 기름을 바를 시간이었다. 엄지손가락에 성유를 적시고 그 감각이 살고 있는 그녀의 육체 다섯 부분에 기름을 바르기 시작했을 때, 그의 손에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맨 먼저 눈에, 감은 눈꺼풀 위에, 오른쪽 왼쪽 차례로, 주교는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십자가를 그으며 라틴어로 기도문을 외었다.
"네가 네 눈으로 저지른 죄가 무엇이든 이 성유와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주 하느님께서 네 죄를 사해 주시기를."
음탕한 시선, 불명예스러운 호기심, 광경의 허영, 사악한 독서, 수치스러운 근심을 위해 흘린 눈물, 그러한 시각의 죄악이 속죄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황금빛 전설' 외에 다른 책을 읽은 것이 없었고, 상당 건물의 후진이 그녀에게 다른 세상을 향한 시선을 차단해 버렸으므로 시야를 뻗을 다른 지평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오직 열정에 대항하는 복종의 투쟁 속에서만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296~297쪽)

드디어 허락된 그들의 결혼...

양쪽으로 늘어선 신도들의 울타리 사이로 앙젤리크와 펠리시앵은 성당 문을 향해 느리게 행진했다. 승리를 거둔 지금 그녀는 꿈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들어가기 위해 저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던 세계를 향해 눈부신 빛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늦추며 활기찬 집들과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술렁이는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무도 허약해졌고,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거의 안아 들다시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보석과 여왕의 옷이 가득한 그 왕자의 저택을, 신혼의 방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그 저택을 상상했다. 그녀는 숨이 차서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몇 걸음 더 나아갈 힘을 차렸다. 그녀의 시선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머물렀다. 그녀는 그 영원한 결합이 행복했다. 대성당 문의 문턱,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꼭대기에서 그녀는 비틀거렸다. 행복의 끝점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존재의 기쁨이 마감하는 곳이 거기였던가?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몸을 일으켜 펠리시앵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그 입맞춤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318~319쪽)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결코 해피엔딩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은 마냥 슬프지 않은 꿈의 실현으로 해석된다. 죽음 뒤에 본문은 짧게 그 죽음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주교는 죽은 영혼의 해방을 도왔으며, 어머니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위베르 부부는 용서 받았으며, 자신의 꿈을 이루고 행복 속에서 숨을 거둔 그녀는 결코 불행하지 않은 최후를 맞았으며, 모든 것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은 행복이었음을 펠리시앵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밀 졸라의 필력에 기대하며 뭔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추적해 온 나의 독서는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주의 소설이 어떻고, 유전과 교육과 환경의 메커니즘이 어떻고 하는 찬사는 학자들의 신설 놀음이 아닌가 싶다.

※ 해방의 을유년에 시작된 을유문화사가 세계문학전집을 재기획 한다고 해서 많이 기대했었다.
아마도 민세문집(민음사세계문학전집)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재도전 하는 것 같은데, 민세문집 214권을 우여곡절 끝에 완독한 독자의 입장에서 처음접한 을세문집이 다소 실망스럽다. 5년간 준비했다는 을세문집 시리즈가 하드커버 말고는 민세문집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저 따라하기에 집착하는 듯 싶다. 돌아가신 정진숙 선생님의 꿈이 헛되지 않도록 보다 획기적인 전략으로 맞서주기를 바란다. 독자로서 정말 최고의 시리즈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