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진화 - 2010 제17회 김준성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62
이근화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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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우리들...
단순히 나의 의견을 이야기를 할 때도 '우리는~'이라며 시작하는 집단적 주체성의 정서...
그래서 근화, 그녀의 진화는 우리들의 진화가 되었고, 나도 그녀와 함께 진화하는 독자가 되고프다. 그녀와 감정을 공유하는 시로 '소울메이트'는 어떨까?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비의 기억을 되돌려 주기 위해
흠뻑 젖을 때까지
흰 장르가 될 때까지
비의 감정을 배운다

(10쪽 - 소울 메이트 도입부)

젖을 줄 알면서 옷을 다 챙겨 입는다는 것 그 자체가 꽤나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유행에 민감한 제목에 혹해서 이 시를 읽을 이들도 있겠으나 시어 하나하나가 너무 좋다.
지상으로 도달한 이후로 더 이상 비가 아닌 비의 기억에 대해 공감해 주는 것도 우리 몫이다.
장르이되 장르가 아닐 '흰 장르'의 감정을 배우는 우리는 누구일까?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발을 사랑해

(16쪽 - 우리들의 진화 도입부)

시집의 제목이 된 '우리들의 진화'는 도입부가 그냥 은근히 머리 속에 맴돈다. 그냥 좋다.


우리가 가족이라고 해서 감정을 통일시킬 필요는 없겠지요 당신에게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지구의 영 점 영영팔삼 퍼센트의 물속에 포함됩니다

눈을 뭉치듯 구름을 뭉치는 당신을 위해
당신의 가슴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열 개의 손가락을 위해

사 곱하기 사
십육 곱하기 십육
엄지로 못을 박고 검지로 머리카락을 집어 올립니다

당신이 건져 올리는 감정에 우리는 서서히 빠져듭니다 조금 늙는다면 코가 영 점 오 센티미터 정도 길어지겠지요 우리는 풍요로운 냄새를 피울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 일 플러스 일을 중얼거리며
오늘은 평범하게 걸어다닙니다
자세히 안 보면 안 보이지만 내가
당신의 가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둘이 빛줄기처럼 쏟아지고
우리는 그것을 피로도 황금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웃다가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릎을 깨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내가 발 담그는 물은 영 점 영영팔삼 퍼센트의 물 속에 속하고 이 지구 위를 돕니다

감상적인 젤리피쉬의 헤엄은
감상적인 바다 속에서 내가
당신의 가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46쪽 - '내가 당신의 가족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전문)

근화 시인은 축시를 선사하지 않으면 결혼도 물릴 수 있다는 한 친구의 애교스런 협박에 바로 이 시를 들고 결혼식 축시를 읽었다고 했다. 내용이 어찌하든 제목만으로 충분했다. 시인을 친구로 둔 그 친구가 이 축시로 인해 더욱 더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우리는(?) 기원할 것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갔다
프랑크푸르트에는 f가 두 개나 들어가서
발음할 때마다 불편하다
두 개의 f를 발음 하다가
다섯 시 오십오 분을 놓칠 수도 있다

루프트한자를 타고 갔을까
하나의 f를 매달고 한 번의 화장실
두 번의 식사 세 번의 기지개를 켜고
신문을 꼼꼼히 읽고
창밖의 구름으로 아무것도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적금을 적립식 펀드로 바꾸라고
은행 직원이 전화를 했다
펀드의 f는 불안하다
네 시 반까지 은행시간도 불편하다
보도블록 같은 f

아파트 난간에 서서
날아가는 빨래를 본다
f같이 서서 죽은 새들을 향해
손을 뻗어 본다
새 같지만 f같은 마음에 도달한다

(68쪽 - 'f'의 전문)


멋지다!
굳이 마지막의 상형문자적 새의 죽음까지는 아니라도... 'f'라는 알파벳 하나로 고민하는 시인의 모습에 차분한 비판이 읽혀졌다. 세번째 시집에서는 26개의 시가 새롭게 써지기를 기대해 볼만 한 것 같다.
그리고, 시가 말한 4시30분은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 은행의 영업 종결 시간이 되지 못한다.
은행 영업시간이 올해 봄부터 30분씩 앞당겨져서 이제는 9시에 열어서 4시에 문을 닫으니, 이 시는 하나의 역사적 가치(?)를 기억하게 하는 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냥 신선했다.

나의 기분은 등 뒤에서 잔다
나의 기분은 머리카락에 감긴다
소리내어 읽으면 정말 알 것 같다
청바지를 입는 것은 기분이 좋다

얼마간 뻑뻑하고 더러워도 모르겠고
마구 파래지는 것 같다
감정적으로 구겨지지만
나는 그것이 내 기분과 같아서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

(101쪽 -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 뒷 부분)


매우 여성적인 시인...
지난 금요일 홍대 앞 북카페 '살롱 드 팩토리'에서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을 낭송하던 그녀의 평온한 모습과 차분했던 목소리가 기억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그녀의 목소리처럼 편안해서 좋다.
깊은 생각은 있의되 난해 하거나 헷갈리지 않아서 더욱 좋다.

이 가을에 새롭게 알게 된 시인, 우리들의 근화...
늘 건강하고, 앞으로도 더 좋은 시 많이 쓰는 진화하는 시인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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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와 함께 하는 낭독의 밤'에 초대되신 분들입니다.

새로운 시인을 만난다는 것은 깊이 있는 즐거움을 주곤 했다.
예스24에서 내가 오래도록 좋아하고 일부 친근한 시인들과 함께 시낭송회를 한다지만 나는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익숙하지 않은 세 미녀 시인을 만났다.



홍대앞 작은 공터(놀이터)와 주차장 골목 중간에 위치한 '살롱 드 팩토리', 멋진 북카페였다.



왼쪽으로부터 중성미의 신영배 시인, 소년처럼 밝고 경쾌한 신해욱 시인, 꽤 여성스럽던 이근화 시인...

미리 온라인으로 제출한 나의 질문에 성실하게 그것도 내가 원했던 답변(종이를 벗어난 시의 확장과 응용, 변형의 탈을 쓴 성장에까지 너그러운...)을 준 신영배 시인께 감사드리고... 낭독을 위해 참석 했었는데, 서툰 진행자 탓인지 원래 계획에서 변경되었는지 낭독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었다. 내가 오늘 낭독하고 싶었던 그녀의 시 하나를 남긴다.



기억은 기형이다

공중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머리카락의 밤 수십 개의 귓구멍으로 둘러싸인 머리통 하늘거리는 귓바퀴들 콧수염 속에서 자라는 눈알 등에 촘촘히 박힌 손톱 배꼽에서 빠져나오는 꼬리 비늘의 반대 방향으로 칼날을 넣고 다리를 긁는 손 바다에서 수족관으로 수족관에서 언덕으로 옮겨진 물고기인간 땅에 머리를 박고 두 다리가 붙은 바지를 입고 지퍼를 올렸다내렸다 내 사랑 

기억해봐 나무를 

(문지시인선 #364, 신영배 시집 오후 여섯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 55쪽)

초고속 등록을 핑계로 모임에 참석한 1차원적인 기록을... 모바일 타이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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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스바루 - 뉴욕 촌놈의 좌충우돌 에코 농장 프로젝트
덕 파인 지음, 김선형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어이 없게도 부시와 MB까지도 바이오 연료, 저탄소 녹색 성장을 부르짖는 세상...
환경만 오염된 것이 아니라 좋은 의미의 단어들마저도 오염될대로 오염 되어버린 21세기...
오염된 언어가 아닌 진짜 몸으로 실천하겠다는 친환경-저탄소-녹색-싱글남이 있었으니, 바로 덕 파인~!!

책의 제목처럼 그가 굿바이(farewell) 하고자 하는 스바루(My Subaru)는 무엇이란 말인가?
스바루~ 한글로 쓰면 얼핏 욕설 같기도 하고 ㅡㅡ;; 
그것은 미국에서는 매우 대중화된 4륜구동 자동차를 생산하는 일본 기업의 이름이라고 한다.
도요타 보다 약간 저렴한 휘발유 팍팍 소비하는 바로 그런 자동차...
십년 넘는 기자 생활을 함께한 분신과도 같았을 자동차와 결별선언 한다는 것, 대단하지 않은가?



스스로 작명한 뉴멕시코의 '펑키 뷰트 목장'에서 문명의 이기를 벗어날 것까지는 아니지만 자급자족과 탈도시의 꿈을 실천해 보기로 결심한 황야의 친환경-저탄소-녹색-싱글남의 삶... 목장에 둥지를 튼 부엉이 커플의 활발한 성생활을 거론하던 본문 첫 페이지에서부터 나는 이 스테미너 넘치는 싱글남의 성욕이 오지에서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독서는 그렇게 나의 속물적인 관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Never 과언이 아니다.

오로지 태양열이 풍부하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뉴멕시코...
월마트의 지배에서 벗어나 단계적으로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풍부한 영양의 염소였다. 정착하자마자 투산에서 염소 자매를 구입하여 돌아오던 친환경-저탄소-녹색-싱글남은 갑작스러운 큰 비로 물이 불어난 밈브레스 강을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건넌다. 염소 자매와 함께... 어린 시절 동물원에서 본 게 전부인 염소를 선택한 삶은 도시에서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던 것에 비할바가 아니다. 코요테부터 염소를 지키기 위해 총을 준비해야 했고, 병든 어린 염소 나탈리를 위해 직접 수의사가 되기까지 한다.

롱아일랜드에서는 아무도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기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장보기 목록에 이런 물건들이 오른다. 오렌지 주스, 와사비, 전기구이 통닭, 아이스크림...
이제 나는 부시 지지자들이 소유한 가게드를 훑어보며 다음과 같은 물건을 찾는 사람이 되었다. 건초, 엽총 탄창, 살아있는 병아리들, 아이스크림... 마지막의 아이스크림은 빨리 목록에서 지우고 싶어 나는 안달이 났다. 제발 내 삶에서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해해주면 좋겠다. (63쪽)


이제는 제법 폼 잡고 자신만의 친환경 황야토피아가 모양을 갖춰가는 것 같아 두 손 불끈 쥐고 읽기에 열을 내려는 순간, 아직 아이스크림을 떨구지 못하다니... 그래서 더욱 진솔한 인간미가 느껴짐과 동시에 바람도 맥없이 휘익~ 빠져 나간다. 그래, 모든 걸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을테니까 이해해 주기로 하자.

"저는 애국자입니다." 이것이 식용유 엔진 정비사가 페르시아 만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창고에서 내게 해준 말이었다. "어느 날 거기 착륙하는데, 우리한테 발포하고 있는 저 사람들이 우리가 자동차에 넣고 다니는 원유를 팔아서 재원을 댄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말도 안 되는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자동차에 뭐 다른 걸 넣을 수 있는지를 좀 봐야겠다 싶었어요." (94쪽)

휘발유 승용차인 스바루와 굿바이 한다는 것은 당장 차를 안탄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스바루 대신 포드 트럭을 구입하여 식용유로 구동할 수 있도록 개조한다. 걸프전 참전용사 출신의 대안에너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데, 그의 식용유를 사용하게 된 동기가 덕 파인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고, 정치적 색깔로 달랐지만 그래도 잘 뭉쳐 일을 끝낸다.

허비가 이 프로젝트의 고귀한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어이, 드릴을 석탄과 가스에 좀 꽂아주겠나?" 그가 내게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국가 송전망을 추방함으로써, 내 인생에서 석유를 없애고자 일하고 있다는 사실. 초기 단계에서는 흠 없는 이미지를 흐리는 유독성 보라색 물질이 끼어 있다 해도, 미래에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것. 한 번에 하나씩 해결해나가자. (166쪽)

자작나무와 같은 영원한 히피 노인이 이웃에 있다는 것은 무척 행운이었다. 높은 풍차 탑에 올라 태양열 전지판을 설치하는 작업 중에 태풍이 불어와 생명의 위협도 느꼈다. 지하수를 퍼 올리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으며, 물 웅덩이가 생기자 인근의 뱀이란 뱀들이 죄다 몰려오는 공포 상황이 연출되었다. 방울뱀을 물리치기 위한 덕 파인의 피눈물 나는 노력은 유머로 포장되어 있다. 태양열 활용의 멘토로 두려움 없는 환경 운동가 허비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궁금했던, 이 혈기왕성한 남자의 여자 문제는 어떻게 진행될까?
어린 염소 나탈리가 병들었을 때, 인터넷으로 긴급 약품을 주문하지만 택배 직원은 배달을 못하겠다고 주저 앉아 버리고, 그때 혜성처럼 등장하여 데이트를 신청한 여인이 있었으니...  철인3종 경기 참가의 전력에 빛나는 위풍당당 금발의 루피였다. 환경운동단체 간사인 그녀는 덕 파인이 기자 시절 내놓은 어떤 책의 독자로서 데이트를 신청했고, 이 비열하고 염치없는 싱글 친환경녹색남은 데이트 장소로 펑키 뷰트 목장을 지정한다. 물론 오는 김에 배달받지 못한 소포까지 가져다주면 고맙겠노라는 아름다운 주문까지...

"좋아." 내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섹스와 우정과 우리가 함께 했던 일들 다 고마워. 그런데 달걀 값은 1달러 25센트야."
"어머 그렇게 깎지 마. 시내 생협에 가면 3달러89센트라고." (183쪽)


이 대화는 루피와의 공식적 결별 뒤에 친환경 달걀을 팔아먹는 거래의 장면이다. 쿨하다!!

궁할 때는 모든 여자에게 친절하지만, 본디 남자란 이용해 먹는 여자 따로 있고, 이용 당해주고 싶은 여자 따로 있는 법, 루피 또한 내 예상대로 단지 스쳐가는 여인일 뿐이었다. 몇몇 다른 여자를 경유하여 그가 이 책에서 해피엔딩을 이끌어 내는 진정한 여인은 미셸!!

내가 딕체니라고 이름붙인 코요테는 미리 주도면밀하게 조사를 한 게 확실했다. 나와 미셸의 관계가 진척되는 경과를 관찰하고, 우리 스캐쥴은 물론 연애의 내밀한 세부 사항까지도 지켜봤을지 모른다. 그놈은 우리 침실을 근접 염탐할 수 있는 거리에 비밀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고 살고 있었다. (189쪽)

코요테의 습격에도 넘치는 재치, 적당한 사생활 노출, 그리고...

"이 흰독말풀꽃 좀 봐."
꽃을 보긴 했지만, 난 그냥 그녀만 바라보고 싶었다. 지구와 참된 교류를 맺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었다. (225쪽)

염소 혹은 코요테와 함께 춤을 추는 바로 이 황야의 저탄소-녹색-싱글남...
오지에서 여자 꼬시는 방법은 인터넷을 통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채팅에서의 농장 자랑?
혹시, 손수 개발한 '친환경 유기농 섹스'를 빌미로? ^^;
아무튼 드러나지 않는 개발이 있으리라... 섹스앤시티가 아니라 섹스앤팜~

이 책 곳곳에 수록된 수 많은 촌철살인의 명언들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 하나...

엔진 연료로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는 건 오늘날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기름은 오늘날 석유나 석탄 타르 제품만큼이나 중요해질 수도 있다. -루돌프 디젤, 1913년 사망 (89쪽)

P.S.
지난 봄,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집의 매끄럽지 못한 번역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이 책 하나로 번역자 김선형 선생에 대한 마음이 풀렸다. 언어유희가 넘쳐났을 어려운 책 번역을 향한 열정과 노력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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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입구에서 오후2시에 늦은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식전에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는 동안 눈을 즐겁게 해준 것은 주차장 골목이었습니다.

바로 제5회 와부북패스티벌이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대충 훑어 보았는데, 어지간한 전집류는 50% 할인, 낱권 구입은 30% 할인... 문학과지성사 시집시리즈는 균일가 2천원... 작년에 행사 마지막 날엔가 들렀을 때 1천원 균일가 판매로 기억되는데 어쨌거나 많이 저렴하지요?

상수역 방향에서는 무대를 설치하고 연습 중이던데, 오늘 밤부터 공연이 있으려나 봅니다.
기타 행사장 주변 카페나 상상마당 등에서 작가와의 만남 등 여러가지 행사도 많이 준비되어 있으니 주말산책 코스로 권장합니다. 별다른 주말 계획 없으신 분들은 길거리 할인으로 좋은 책 구경 많이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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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독식의 암담한 현대 사회... 인구에 비해 충분하고도 넘치는 아파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벌어도 집 한 채 소유할 수 없는 주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 대책없는 사회의 근본 원인을 고민할 때마다 신영복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명문을 떠올리곤 합니다. 말씀으로만 들어왔기에 언젠가 글로 정리되면 좋겠구나 싶었었는데, 오래 전에 잘 정리해 놓으셨던 글이 성공회대학교 교육대학원에 교재에 수록되어 있더군요. 아주 명쾌한 비유의 글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입력해봅니다.  



※사진은 2006년3월11일밤, 개인산방에서 붓글씨 쓰시는 모습입니다. 글만 있으면 밋밋해서... ^^;


수도꼭지의 경제학

C교도소 4동 상층의 세면장에는 수도꼭지가 8개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용할 수 있는 꼭지는 2개뿐이었습니다. 나머지 6개는 T자형의 손잡이를 뽑아버리고 스패너로 단단히 조아 놓았기 때문에 먹통이었습니다. 맨손으로는 그것을 풀 수가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재소자는 너나없이“물 본 기러기”이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귀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밥과 맞먹는 것이 물입니다. 단 한 번도 물을 물 쓰듯 써보지 못한 우리들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욕심입니다.

하루 세끼 설거지에서부터 세수 빨래는 물론이고 목욕은 감히 생심을 못한다 하더라도 냉수마찰은 어떻게든 하고 싶기도 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방에 있는 주전자나 물통은 물론이고 그릇이란 그릇마다 물을 채워놓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물을 많이 챙겨 놓은 날은 마음 흐뭇하기가 흡사 그득한 쌀뒤주를 바라보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만큼 물이 귀했습니다. 여름철은 말할 필요도 없고 겨울이라고 해서 찬물 목욕이나 담요빨래를 시켜만 준다면 마다할 사람이 없는 처지이고 보면 물을 가운데에 둔 관과 재소자의 줄다리기가 사철 팽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8개의 수도꼭지 중에서 2개만 남기고 나머지 6개를 먹통으로 잠가버리는 것은 어느 교도소건 관례가 되다시피 한 통상적인 통제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원천을 봉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언뜻 가장 완벽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어느새 엄청난 누수가 일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맨 먼저 일어난 사건은 성하게 남겨둔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분실되기 시작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처음 몇 번 동안은 관에서 없어진 손잡이를 다시 갖다가 꽂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꽂기가 무섭게 이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수도꼭지는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로 윗부분의 나사 한개만 풀면 손잡이가 쉽게 분해될 수 있는 얼개였으며, 손잡이만 가지면 먹통꼭지를 틀어서 얼마든지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잡이의 분실사건이 계속되자 이제는 아예 나머지 성한 꼭지의 손잡이마저 분리하여 담당교도관이 책상서랍에 보관하였습니다. 이제는 물을 합법적으로 쓰기 위해서도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숨겨 둔 손잡이의 가치는 더욱 커졌습니다.

다른 출역사동의 세면장에 있는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분실되기 시작하였고 공장이건 목욕탕이건 심지어 직원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수도꼭지가 분실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 방에도 물론 비밀리에 입수하여 감추어 두고 사용하는 수도꼭지가 한 개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법 끗발이 센 K군이 자기 혼자만 사용하는 손잡이가 한 개 더 있었습니다. 4동 상층의 11개 사방 가운데 수도꼭지를 한두 개 감추어 두고 있지 않은 방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잘 나가는 방’에는 두어 개씩 보유하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2개 또는 3개씩의 개인용 꼭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혹시 분실할 수도 있고 검방이나 검신 때 발각되어 압수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벌로 한두 개쯤 더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수도꼭지는 어느덧 친한 친구나 평소 신세를 진 사람에게 귀한 선물이 되기도 하였고 더러는 상품이 되어 다른 물건과 교환되기도 하였습니다. 수도꼭지는 이제 수도꼭지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수도꼭지는 물을 떠나서도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4동 상층에 몰래 감추어 두고 사용하는 수도꼭지가 모두 몇 개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대충 계산해 보더라도 11개 방마다 한두 개씩 그리고 끗발 있는 재소자가 네댓 명이라 치면 거진 20여 개의 수도꼭지가 있는 셈이 됩니다.
세면장에 설치되어 있는 8개의 수도꼭지에 비하면 무려 두어 갑절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꼭지는 여전히 부족하였습니다. 우선 그 방에 몰래 감추어 두고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 꼭지의 관리자한테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하였고, 개인용을 빌리기도 한두 번이지 미안하고 속상하는 일이었습니다.

4동 상층의 1백여 명의 재소자가 불편이나 불평 없이 물을 쓸 수 있기 위해서는 대체 몇 개의 수도꼭지가 있어야 하는지 계산해 보았습니다. 1인당 1개에다 분실이나 압수에 대비한 여벌 1개씩 도합 2백여 개의 수도꼭지가 필요하다는 계산입니다. 8개의 수도꼭지에 비하여 무려 2, 30배의 수도꼭지가 필요한 셈입니다.

이처럼 많은 양이 있더라도 물의 사용은 일단은 불법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실제로 담당교도관에게 적발되어 수도꼭지를 압수당하고 경을 친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대개는 담당교도관에서 밉게 보인 사람이거나 만만하게 보인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재수 없어’걸렸다고 했습니다. 어쨌건 원천을 봉쇄하여 물을 통제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8개의 수도꼭지를 모두 열어놓는 것보다 더 많은 물이 누수 되고 있었습니다. 스패너로 단단히 묶어 둔 6개의 먹통 수도꼭지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맨손인 사람에게만 철벽일 뿐 수도꼭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수청기생처럼 쉽게 몸을 풀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수도꼭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물은 여전히 부족하였고 불편하였습니다. 물의 필요는 수도꼭지에 대한 욕심으로 바뀌어 남들의 비난을 받았고 스스로도 부끄러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징역살이의 이야기이고 교도소에나 있는‘물 본 기러기’들의 물 욕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서울의 도처에서 문득문득 그 씁쓸한 수도꼭지의 기억을 상기하게 됩니다.

수많은 자동차들로 체증을 이룬 도로의 한복판에서 걷는 것보다 더 느리게 꿈틀거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예의 그 수도꼭지를 생각합니다. 분양아파트의 모델하우스에 붐비는 인파 속에서 나는 먹통 수도꼭지 앞에서 마른 침을 삼키던 예의 그 갈증을 생각합니다. 8개의 수도꼭지로 될 일이 20개 30개의 수도꼭지로도 안 되는 일은 교도소가 아닌 바깥세상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아파트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대학입시도 그렇고 화려한 백화점의 수많은 상품들도 그렇습니다.

나는 낯선 서울거리를 걸으며 버릇처럼 수도꼭지를 상기합니다. 맨손으로 수도꼭지를 비틀다가 하얗게 핏기가 가신 엄지와 검지의 통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잘못된 소유(所有), 잘못된 사유(私有)가 한편으로 얼마나 엄청난 낭비를 가져오며,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심한 궁핍을 가져오는가를 생각합니다. 망망대해 위를 날고 있는 목마른 기러기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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