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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빌려드립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하늘연못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케스는 문학과 현실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카리브해는 신대륙 발견 이전의 주요 신앙 속에 존재하던 본래 요소와 마술적 믿음이 그 이후에 도착한 여러 상이하고 광범위한 문화와 혼합되어 '마술적 혼합주의'라는 이름으로 성립된 곳이다. 그래서 이런 카리브해에 대한 예술적 관심과 예술은 고갈되지 않을 정도로 비옥하다 .아프리카 문화는 강제로 부과된 치욕적인 문화였지만 나름대로 적절한 것이었다. 이 아프리카 신앙은 세상의 막다른 골목에 처해있던 상황에서 끝없는 자유의 의미를 개척했으며, 하느님도 없고 법도 없는 현실을 만들면서 어떤 종류의 한계도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중략) 그래서, 나는 아마 현실보다 더 가공할 만한 것을 떠올릴 수도 없었고, 또 그런 현실을 뛰어넘는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멀리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시적 영감을 갖고 그런 현실을 문학작품 속에 이식한 것이다. (중략) 종합해서 말하자면, 중남미와 카리브해의 작가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현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의 영광이 될지도 모르는 우리의 운명은 겸손하게 그런 현실을 모방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런 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최고의 작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P210-213)
마르케스의 소설, <꿈을 빌려드립니다.>를 읽으면서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 구수한 이야기구나. '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나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여름철 모깃불을 피워놓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 '북두칠성이 된 7형제 이야기' ,' 못에 빠져 죽은 처녀 귀신 이야기' 등등 이 바로 이 소설과 쌍둥이 형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믿을 수 없어서 "에이~ 거짓말~~!!" 하면서도 할머니가 이야기를 꺼내시기만 하면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되는 환상적인 전설들과 이야기들.
그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이와 같은 맛은 '쓰나미'와 같은 거대한 자연의 변화가 빈번히 출몰하는 중남미의 자연과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믿음, 그리고, 그들의 삶을 '구어체'로 표현함으로써 할머니의 구수한 입담과 같은 느낌을 잘 살렸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마르케스는 동화와 같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중남미의 현실을 독특한 시각으로 담아낼 수 있었고 [소설의 죽음]을 예고하던 서구 문학계에 [소설의 소생]이라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꿈을 빌려드립니다.>에서는 9편의 중단편을 살펴 볼 수 있는데, 마르께스의 소설을 옮긴 송병선 씨에 따르면 <물에 빠져 죽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사랑도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한 죽음><잃어버린 시간의 바다><기적을 파는 착한 사람 블라카만>은 1960년대 쓰여진 작품이고, <포르베스 부인의 행복한 여름><눈 속에 흘린 피의 흔적><로마에서의 기적><난 전화를 걸려고 온 것뿐이예요.><꿈을 빌려드립니다.>는 1980년대 쓰여졌다고 한다. 1960년대에 쓰여진 글들은 중남미의 자연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이야기와 그 속을 살아가는 소박한 남미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면 1980년대 쓰여진 글들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로 남미의 기적과도 같은 믿음들이 유럽 속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는지, 유럽인들의 모습은 남미인들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지를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를 만나서는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지를 볼 수가 있는데, 눈으로 뻔히 보이는 썩지 않는 시체의 기적조차도(<로마에서의 기적>) 유럽인의 이성적인 원리, 원칙에 막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럽인의 모습이라던지, 진실을 아무리 말해도(<난 전화를 걸려고 온 것 뿐이예요.>)믿어주지 않고 그들의 편의대로 기도원겸 정신병원에 수용시켜버리는 모습들을 통해 마르케스는 중남미를 바라보는 현재 유럽의 시각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읽으면서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었던 단편은 오히려 1960년대쪽이었고, 그 중<잃어버린 시간의 바다>는 내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1월의 거친 바다, 쓰레기와 시체들이 출렁거리던 바다가 3월이 되면서 잠잠해지고 3월초순 갑자기 장미 향기를 뿜어내게 되는 카리브해의 정경. 꽃을 전혀 볼 수 없는 작은 어촌마을에 왠 난데없는 장미향??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죽은 자를 바다로 던지는 풍습이 있는 마을에서 꽃을 볼 수 있는 경우는 옆마을에서 꽃을 사와서 시체와 함께 꽃을 바다에 뿌리는 장례식 때 뿐이다. 그런데, 장미향을 뿜어대는 바다....이는 그 향기를 맡은 누군가는 결국 죽는다는 의미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장미향이 바다에서 나게 되면 누가 죽을까? 마을은 숙연해지는데 토비아스라는 마을의 한 젊은이는 며칠동안 밤잠을 안자고 바다를 감시한다. 그리고는 장미향을 처음 맡게된 새벽, 온 마을 사람들을 깨워 장미향을 맡게 한 후, 골아 떨어지게 된다. 덕분에 마을사람 전체가 싸그리 죽을리는 없지 않은가? 란 생각을 사람들은 하게 되고, '죽음'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장미향이 나는 바다로 달려나와 1년중 한 때뿐인 그 향기를 맡기 위해 축음기를 켜놓고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고, 사랑을 나누며 '신의 축복'이라 이야기를 한다. ('죽음'의 의미가 한순간에 '축제'로 돌변하는 이 곳, 카리브해는 이상한 곳이긴 하다. 마치 징벌처럼 한 개인에게 다가오는 죽음.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죽을 운명에 놓여 있음을 이처럼 극적으로 자각하게 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르께스는 '사는 동안 그들의 삶은 축제가 될거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날, 장미향으로 진동하는 어촌마을로 카톨릭의 신부도 들어오고 외지의 미국인 부자도 들어온다. 그러나, 신부가 말하는 교리(축제금지, 해변가에서 자는 것 금지 등)는 들은척 만척 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지을 성금마련이 어렵자, 신부는 공중부양까지 선보이는데도 그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축복의 땅'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신부는 다시는 장미향이 나지 않을 거라며 악담을 퍼붓고는 그곳을 떠난다. 한편,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고 축제를 언제나 열 수 있는 건물을 짓겠다고 찾아온 미국인 부자도 마을사람들에게 가장 잘하는 일이 뭔지를 평가해서 돈을 주었지만, 자연 속에서 먹을 것을 구하되 필요한 만큼만 구하는 그들에게 미국인이 준 돈은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돈 벌게 해준다더니 마을 영감의 체스내기에서 판판이 이겨서는 영감의 집을 차지하고 오랜 잠을 자는 미국인. 수개월을 자고 난 후, 먹을 것이 떨어진 마을에서 배고프다며 토비아스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거북을 잡아먹자고 제안을 한 것도 미국인이었다.( 종교와 자본주의의 모습이 신부와 미국인으로 변화하여 그들 속으로 들어온다. 종교의 안락과 천국에 대한 약속,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면 행복할 거라는 자본주의의 물질만능의 꿈들이 이곳에서는 영 맥을 못추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는 교리로 작용하거나 각기 다른 사람들을 물질적인 돈으로 환산해서 평가하거나 심지어는 재산을 빼앗는 모습을 보여준다. )
바다거북을 잡기 위해 뛰어든 바다.. 수많은 시체들이 떠도는 바다였지만, 모든 죽은 자들은 젊어지고 아름다워져 있었고 세계를 여행한 듯 온몸에 각종 꽃들을 가득 안은 채 카리브해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었다. 즉, 3월의 카리브해 바다에서 나는 장미향은 죽은 자들이 몰아온 꽃향기였던 것이다. (이 환상적인 장면은 죽었으나 여전히 향기높은 문화를 건네주고 있는 남미인들의 조상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장면이며 그들의 문화가 전세계를 떠돌며 더욱 젊어지고 생명력을 가진 채 후세에 의해 다시 재해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이를 본 토비아스와 미국인은 바다 속에서 나와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미국인은 자신이 본 것을 못 본 걸로 하겠으며 다른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돈을 쓰기 위해 떠날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도 다시는 이 고장에서 꽃향기가 나지 않을 거라고 악담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토비아스는 돌아와 그 아름다운 바다속 정경을 아내에게 속삭이며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꽃을 모아 오는 수고를 해주고 있기에 언제나 기적과도 같은 장미향이 나는 바다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죽음', '축제', '신의 축복','사랑', '죽은 자들이 더욱 젊어지고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장미꽃향기마져 전해주는 바다' 가 함께 섞여 만들어내는 이 아름다운 곳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환상과도 같은 현실을 믿는 소박한 남미인들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마르께스의 자부심은 이 글을 읽는 내내 날 부럽게 만들었다.
'꿈을 빌려드립니다.'
온 인류가 꿈꾸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세계가 남미 속에 있다. 그러므로 남미의 현실을 문학이란 형태로 옮겨 당신들의 잃어버린 꿈을 빌려주겠다는 마르께스의 생각이 너무나도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그가 남미 속에서 꾸는 꿈을 발판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는 남미를 보고 있노라면 문학은 미래를 이야기 하는 예언적이고도 환상적인 인간의 의지의 결과물이 아닐까? 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들의 꿈은 어떤것인가?' 란 대답없는 질문을 해본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는 날, 우리 스스로도 '꿈을 빌려드립니다.'라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대답이 쉽게 우리들에게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알면서도 기다리는 어리석음. 그러나, 우직하고 어리석은 이들이 세상을 바꿔 갔었다는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