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의 시를 읽는다. 그리고, 시집 뒤에 붙어 있는 잘 생긴 청년의 모습을 본다. 시를 읽는다.
임화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김훈 때문이었지 싶다. 카프 동인으로 활약을 하고 월북을 했던 이 시인을 제도권 교과서나 시집 등에선 상대해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나에게는 '모르는 시인'일 뿐이었다. 그러다 김훈의 '임화를 추억하며..'였던가? 라는 짧은 단상을 접한 후 그의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내내 했었는데 며칠 전 헌책방 순례를 하다가 임화의 '다시 네거리에서'를 마주하게 되었다.
인연일까? 모르던 사람의 시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이것을 매혹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강가로 가자
얼음이 다 녹고 진달래 잎이 푸르러도,/ 강물은 그 모양은 커녕 숨소리도 안 들려준다.//
제법 어른답게 왜버들가지가 장마철을 가리키는데,/ 빗발은 오락가락 실없게만 구니 언제 대하를 만나 볼까?//
그러나 어느덧 창밖에 용구 해가 골창이 난 지 십여일,/함석 홈통이 병사 앞 좁은 마당에 뒹구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침대를 일어나 발돋움을 하고 들창을 열었다./답답워라, 고성 같은 자씨, 기념관만이 비워져서 묵묵하다.//
오늘도 파도를 이루고 거품을 내뿜으며 대동강은 흐르겠지?/ 일찍이 고무의 아이들이 낡은 것을 향하여 내닫던 그 때와 같이//
흐르는 강물이여! 나는 너를 부(富)보다 사랑한다./[우리들의 슬픔]을 싣고 대해로 달음질하는 네 위대한 람(濫)을!//
얼마나 나는 너를 보고 싶었고 그리웠는가!/ 그러나 오늘도 너는 모르는 척 뒤에 숨었었다. 누운 나를 비웃으며,//
정말 나는 다시 이곳에 일지를 못할 것인가?/무거운 생각과 깊은 병의 아픔이 너무나 무겁다.//
오오, 만일 내가 눈을 비비고 저 문을 박차지 않으면/정말 강물은 책속에 진리와 같이 영원히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인연 없이 흐를지도 모르리라.//
누구나 역사의 거센 물가로 다가서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의 방랑자로 죽어 버릴지 누가 알 것일가?/ 청년의 누가 과연 이것을 참겠는가? 두말 말고 강가로 가자//
넓고 자유로운 바다로 소리쳐 흘러가는 저 강가로!//
청년의 순수가 사라져 버리고 세상살이 처세술에 능한 (또는 그렇게 길들여져 버린) 어른들 속에서 제자리 찾기에 허둥거리는 때에 역사를 밀어올리고 범람시키는 힘, 청년이란 말에 어울리는 임화가 너무 그리운 밤! 임화의 시들이 더욱 비수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