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민음사 / 1989년 1월
평점 :
절판


2004년 12월 31일. 나는 아주 재미있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시인에 존경 표하려, 집단 누드 퍼포먼스 팝뉴스 [세계]  2004.12.31 (금) 오후 1:32

'하하~ 시인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집단으로 누드 퍼포먼스를 했다구?? 그 시인, 정말 행복하겠군.' 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뒤에도 자신을 위해 존경한다며 과감히 옷을 벗어주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흐믓한 미소와 함께 아쉬운 입맛을 다셔야 했을 그 시인... 그는 바로 칠레가 낳은 걸출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그건 건드리더군. //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풀리고 /열린 /하늘을, /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파블로 네루다는 참 재미있는 시인이다. 시인이면서 외교관이기도 했고 정치가이기도 했던 그의 화려한 경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시 자체가 주는 엄청난 이미지들의 물결과 거대한 에너지만으로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증이 절로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 그게 나에겐 어떤 의미였던가? 다시 반추해본다. 학생 때는 시 자체를 읽고 소화시키기 보다는 그 속에 시인들이 숨겨놓은 의미를 찾아내어야 하는 고역스러운 것이었고, 교과서와 참고서를 번갈아가며 밑줄에 연필칠까지 하면서 찾아 써놓은 의미가 시험출제자의 의견과 맞는가? 가 중요할 뿐이었다. 거기다 어떤 선생님은 기나긴 시를 외우라고 하기까지 했는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시를 외우다가 틀려서 창피당하는 것이 두려워 외워야했던 시....그건 나에게 시가 아니라 고문의 도구였었다. (고문의 종류에 어떤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도 고문이라 나는 생각한다.-_-)

그러던 시가  다시 내 가슴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은 첫사랑에 실패한 후였고, '실연 후에는 모든 유행가의 이별노래가 자신의 이야기같더라..'라는 이야기처럼 이별시, 쓸쓸한 시, 고독을 읊은 시, 사랑의 고통을 이야기 하는 시들은 모두 나의 이야기로 가슴에 박혔다. 현재의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 시는 나의 고통을 글로 표현해 주고 있었다. ( 인간의 고통을 풀어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 마음속에 맺힌 말들을 언어로 표현해 내놓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소위 이와 같은 감정표현방법을 의학용어로 'ventilation(환기 또는 풀이)'이라고도 부르는데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의 '화병' 을 살펴보면 무식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시어머니등 윗사람들이 무서워서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억누름으로써  ventilation(환기 또는 풀이)이  되지 못해 생긴 병이다.)

그렇게 시가 다가왔다. 나의 숨겨진 마음 속의 말들이 언어의 옷을 입고 나타났던 시!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의 서재를 방문한 분들은 뜬금없는 '지안의 개인사의 나열'에 질려서 '우~ 이젠 그만해라!'라고 돌 던질 준비를 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참아주시라. 이제부터 이야기 하려고 하니깐..-_-;;;

 

파블로 네루다는  '속이 비치는 깜짝상자'를 생각나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가 시를 창작하는 모습, 과정이 그대로 녹아 있는 그의 시 "詩"를 보면 그가 바라보는 '세상(또는 대상)'은 그의 속으로 들어가 실체를 알 수 없는 꿈틀거리는 에너지로 변화한다. 시인조차도 그게 뭔지 어리둥절해 한다. 그러나, 그가 언어로서 그 알 수 없는 것을 쓰기 시작했을 때 언어로 쓰여져 있을 망정 시각적, 촉각적, 후각적, 미각적인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와 -마치 깜짝상자에서 거대한 삐에로 인형의 머리가 튀어나오는 것 같이- 느낌이 생생한 새로운 우주와 세상이 태어나는 것 같으며 자신또한 그 속에 동화되어 '심장'마져도 풀려버리는 것 같다고 파블로 네루다는 고백하고 있다. 그의 시집인 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 있는 시들은 모두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도 그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다. 이 시집의 분류를 쫓아 가다보면 시인의 변화를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 시집의 큰 장점에 속한다 할 수 있겠다. 

젋은 시절 그가 썼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서는 '이별, 사랑 ,여인'등이 주로 등장하고, 버마,타일랜드, 일본, 중국 등의 극동주재영사 및 남미(멕시코, 스페인, 아르헨티나)영사를 거치며 썼던 '지상에서 살기 I,II'라는 작품에서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떠도는 외로움,고통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 후 그가 스페인 영사로 있는 동안  스페인에서는 내란이 일어났을 때 영사의 월권으로 '칠레는 인민전선 편'임을 선언하고 난 후 썼던 '지상에서 살기III'에서는 드디어 네루다의 정치의식이 반영된 시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익 곤잘레스 비델라라는 독재자를 피해 망명길에 올랐을 때의 작품 '온갖 노래'에서는 남미의 자연과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던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말년에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라는 산티아고 근처의 작은 섬에서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를 썼는데 그 속에는 일상 속 작은 것들 속에 숨겨진 의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가 가득하다.

 

1973년 칠레에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칠레 대통령 아옌테가 암살당한다.그리고, 그도 그를 감시하는 군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해 9월 23일 산티아고의 작은 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 세상에다 또다른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했던 네루다.

이 시집 한권으로 그의 모든 시와 그가 만들어낸 세상의 이미지들과 우주의 모습을 엿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지만(그의 시가 35편 밖에 소개되어 있지 않다.그 때문에 별 하나를 깎을 수 밖에 없었다-_-) 파블로 네루다와 로버트 블라이의 대담과 이 시를 번역하신 정현종 시인의 해설을 통해 네루다의 삶과 그의 시의 뿌리에 해당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아는데는 충분한 시집이란 생각을 한다.

 

네루다.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누드 퍼포먼스로 표현했던 남미의 여인네들의 정열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주었을 때, 다른 이들은 더 멋진 것을 나에게 건네주었다.'라는 그의 믿음처럼 세상에다 멋진 시를 남긴 그를 기리기 위한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은 그가 죽은 후에도 '존경'이란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03-12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레어 2005-03-1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옙~ 말씀대로 해보겠습니다.(시 때문에 지나치게 길어진 리뷰땜시 저도 고민을 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좋은 말씀,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