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아찔한 소개팅>을 보며 80년대의 아이들을 생각하다.
<아찔한 소개팅>에 대해 마지막으로 쓴다. 그 이상의 글줄을 할애하는 것은 나에게도, 이 프로그램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도움 안 되는 짓이다.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 이 프로그램이 싫었던 이유는 지난번 글에 이미 썼고,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며 이마를 찡그리고 텔레비전을 봤던 나는 이후 <아찔한 소개팅>이 검색어 상위에 오르고 이 프로가 죽도록 먹는 바로 그 욕을 양분으로 삼아 승승장구하다가 심의로부터 중징계를 받는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문득 서글퍼졌는데, 그 서글픔으로 인해 스스로 깜짝 놀랐다. 도대체 내가 왜 저 리얼리티 쇼를 보다 말고 서글퍼진단 말인가? 그러나 가을이니까, 혹은 넌 원래 미쳤잖아, 하는 식으로 그냥 넘기기에는 그 서글픔은 무척 진하고 질겼다. 킹카가 싸가지 없네, 퀸카가 이상하네,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버스 안에 옹기종기 모여 웃고 분노하고 사진을 밟는 그 청춘남녀들을 보며 거의 처음으로, 나는 나의 세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염불보다 젯밥, 소개팅보다 TV 출연
<아찔한 소개팅>이 그토록 많은 분노를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막말이나 출연자들의 어이없는 만행 때문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이 분노를 사는 가장 큰 이유이자 인기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찔한 소개팅>이 겉으로는 소개팅 시켜 준다면서 사실은 싸움 붙이고 그걸 구경하는 프로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사랑의 스튜디오> 출연자들은 정말로 결혼하기도 했지만, <아찔한 소개팅>을 보면서 어떤 시청자도 본디 의도대로 ‘신세대의 솔직한 연애법’이나 ‘청춘남녀의 만남’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찔한 소개팅>의 재미요소는 바로 “이번 주에는 또 얼마나 미친 애가 나올까” 라는 것이다. 털 뜯기고, 물에 빠지고, 바보 취급 받는 꼴이 대한민국 온 천지에 중계되고 본방과 재방을 거듭하는데도 청춘 남녀들은 여전히 <아찔한 소개팅>에 출연하고 싶어한다. 모두가 이게 정말로 소개팅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이게 정말로 소개팅이라면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출연한다거나 내가 방금 돌려보낸 여자가 다른 후보에게 내 이야길 미주알고주알 다 할걸 알면서도 “수작이 개수작”이라느니 “다리털을 빗어도 되겠다”식의 폭언은 못하기 마련이다. 이 좁디좁은 싸이천국 대한민국에서, 세 다리만 건너면 온 국민이 서로 아는 마당에 어떻게 그런 사회적 자살을 한단 말인가?
이게 소개팅인 척 하는 건 오로지 프로그램의 제목뿐이다. 그렇다. 만드는 쪽도 보는 쪽도 다 알다시피 이 프로그램에 모여드는 건 ‘소개팅을 하고 싶은’ 청춘남녀가 아닌 ‘TV에 나오고 싶은’ 청춘남녀다. 자,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네- 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라난 세대는, 이렇게 하여 텔레비전에 등장한 것이다.
<아찔한 소개팅>에 드러난 우리의 진실, 영혼의 공동(空洞)
그러나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나는 퀴즈를 못 맞춘다고 물에 빠뜨리거나 에스테틱 샵에서 남의 털을 뽑는 그 사람들과 바로 같은 세대다. 0으로 시작되는 학번과, 80년대 이후로 시작되는 주민번호를 지녔으며, 휴대폰 문자와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쓰기 시작한 첫 세대다. 우리는 ‘왕따’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일 때에 학창시절을 보냈고, SM이니 DSP니 하는 곳에서 탄생한 아이돌 문화의 강력한 조력자이자 소비자였으며, 온라인 게임의 첫 고수들이었고 프로 게이머라는 생소한 직업군의 탄생에 일조하였으며, 스무살의 TTL이니 팅이니 알이니 N세대니 하는 “쿨하게 돈을 쓰라”는 미디어의 부추김 속에 성장하였고 ‘얼짱’이라는 단어가 생성되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보며 얼마든지 “얼굴 뜯어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뼛속까지 느낀 첫 세대다.
우리는 아무런 구호도, 아무런 외침도 없이 자라났다. 전교조 교사들이 끌려가는 걸 본 적도 없고, 전교조 교사들이 복직되는 걸 본 적도 없다. 적어도 바로 그 전 선배들인 70년대 후반 태생들에게는 “그래도 돈이 전부는 아니”라던가 “사람의 외모만 봐선 안 된다”다는 식의 위선적 점잔이라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뭣도 없다. 돈만 있으면 뭐든 다 되는 것과 외모가 얼마든지 밥 먹여 주는 것을 지겹도록 보았다.
여기에서 <아찔한 소개팅>의 권력구조는 견고하게 생성된다. 못생긴 여자 도전자는 킹카가 주는 수모를 견뎌야 하고, 키 작거나 조건이 보잘것없는 남자 도전자는 퀸카의 핀잔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찔한 소개팅>이 일견 의미있는 리얼리티 쇼처럼 보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출연한 우리 세대의 군상들이 앞서 말한 성장과정을 통해 몸에 익힌 질서를 이렇게 사정없이 노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편적 진실은 <아찔한 소개팅>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자기도 모르게 노출해 버린 이 세대의 공동(空洞)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다.
맞서 싸울 대상이 없는 세대의 외로움
우리는 영혼에 거대한 공동(空洞)을 지닌 첫 세대다. 쿨하지 못하면 당장 나가 죽어야 할 것처럼 창피해하고, 가볍고 경쾌하다 못해 그만 양 조절을 못하고 천박해져 버린 세대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행운이자 불운은 맞서 싸울 그 어떤 대상도 딱히 없었다는 것이다. 맞서 싸울 대상이 없었기에 몸은 편안했으나 영혼에는 큰 공동이 생겼다. 맞서 싸울 대상이 없었던 건 정말로 싸울 대상이 없었던 게 아니라, 모든 것과 다 싸워야 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는 번번이 졌다.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부자 아빠가 되라고 등을 떠밀고, 외모보다 마음이라면서도 성형 한두 군데는 칼 댄 것도 아니라며 성형외과 가라고 눈 부라리고, 너의 모든 것은 20대에 결정되는데 지금 잠이 오냐며 청년실업, 영어공부, 얼짱몸짱, 끊임없이 들쑤신다.
그렇다, 우리는 쭉정이다. 우리가 가져 본 구호의 양은 어찌나 초라한지 “독도는 우리땅!” “오노 개새끼!” “대~ 한민국!” 정도면 끝나버린다. 세상이 우리보고 쿨하다고 하니까 정말 우리가 쿨한 줄 알았는데 사실 그건 쿨하게 돈 쓰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멋지고 도도하게, 세상 그 무엇도 저스트 텐 미닛, 단 10분 만에 내 밑에 쓰러뜨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실은 거대한 공동(空洞)이 안에서 텅텅 울려서 불안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렇게까지 모르는 첫 세대이기 때문에 이 공동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그저 잊혀지지 않기를 원한다. 이 공동은 끊임없이 우리를 들쑤시며 일촌평 써달라고 절규하고 메신저에게 누가 나 차단했는지 알아보고 연애나 해보려다 그냥 낚시로 끝나며 밤낮 지름신의 사제가 되게 한다.
유일한 두려움은 잊혀지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찔한 소개팅>의 출연자들은 공동(空洞)을 안은 세대의 미덕을 전력으로 구현한다. 그 미덕은 있는 대로 욕을 먹고 내 홈피에 악플이 창궐할지언정 잊혀지는 것보다 어떻게든 기억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유일하게 잊혀지는 것이 두려우며, 우리가 그것을 그 정도로까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도 싸워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잊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찔한 건, 소개팅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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