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지식을 나눕시다

우유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토요일자 한국일보를 사들고 왔다. 가장 눈길을 끈 기사/칼럼은 이광일 논설위원이 쓴 '지식을 나눕시다'('정보'가 아니라 '지식'이다). 세계 수위를 다투는 인터넷강국이지만 우리의 인터넷은 '지식의 바다'라고 하기엔 아직 쑥스러운 수준이다. 오늘 아침에도 '마샬 버만'과 '들뢰즈의 영화론'에 관한 자료들을 좀 찾아보려다가 뭔가 그럴 듯한 게 눈에 띄지 않아 혀를 차고 있던 참이었다(물론 영어로 구글에서 검색하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 명문대학들에서는 자신들의 강의를 무료로 공개한다고 하고(한국의 대학은 등록금 천만원시대를 감당할 만한 강의를 제공하고 있는가?), 구글에서는 수백만권의 책을 영인해서 인터넷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새로운 지식사회로 진입해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은데, 우리의 관심이나 대처는 너무 고답적이고 너무 한가해 보인다(내용도 없는 리포트/논문들이 몇 천원씩 '거래'되는 게 '한국적 지식'의 현주소인가?). 문제의식이 좀 확산될 필요가 있다.

한국일보(07. 02. 17) 지식을 나눕시다

가히 인터넷 세상이다. 하다 못해 자기 집 전화번호가 생각이 안 나도 인터넷에 들어가 “우리 집 번호는?”하고 칠 정도다. 모든 게 인터넷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한글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별 게 없다. 거의 잡담 수준의 정보가 올라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금 깊이 있는 정보가 있겠다 싶으면 예외 없이‘전문자료’라고 해서 돈을 내고 사야 한다. 심지어 30쪽짜리 논문 한 편이 7,000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 영어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온갖 지식의 세계가 펼쳐진다. 예를 들어 history(역사)를 쳐 보라. 한 두 사이트만 들어가면 세계사에 관한 개요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관심 분야에 따라 거기에 연결된 사이트를 찾아 들어가면 지역별, 시대별로 아주 전문적인 수준까지도 공부할 수 있다.

이처럼 한글 인터넷과 영어 인터넷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인터넷에 정보를 올리는 사람에 있다. 우선 지식 수준이 높아야 한다. 그 다음 그런 지식을 남에게 공짜로 제공할 만큼 헌신적이어야 한다(*위키피디아의 한국어판을 영어판과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한글 인터넷이 내용 면에서 별 매력이 없는 이유는 우선 매력적인 수준의 지식을 갖춘 사람이 적고, 그나마 그런 지식이라도 인터넷에 올리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은 더더구나 적기 때문이다. 미국의 어지간한 학회는 최근호를 제외하고는 학회지 내용을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그것도 디자인을 아주 멋지게 해서. 반면 우리나라 학회들 중에서 홈페이지에 제대로 정보를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니 한글을 사용하는 인터넷 사용자들의 지식 수준은 영어권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매력적인 지식을 갖춘 헌신적인 사람을 단기간에 많이 키울 수는 없다. 그나마 지금과 같은 여건에서 우리의 지식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돈을 내고 사게 돼 있는 각종 전문자료를 네티즌들이 무료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전문자료들은 대개 논문의 형태인데 한두 회사가 학술지를 내는 학회나 연구기관과 계약을 맺고 일반에 판매하는 방식이다. 그래 봐야 회사만 돈을 벌 뿐 학회나 연구기관은 다른 전문자료를 무료로 열람할 수 있는 권리 정도밖에는 돌아오는 것도 없다.

일반인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에 알량한 자료를 사거나 무슨 무슨 학회지에 실린 논문 한 편을 보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을 뒤져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 이런 번거로움이 없다. 교육인적자원부가 1999~2005년에 실시한 두뇌한국(BK)21 사업도 그렇다. 1조 5,700억원을 들여서 나온 수많은 논문들이 인터넷에는 올라 있지 않다. 그냥 책이나 논문의 형태로 출판됐을 뿐이다. 이것만 그냥 인터넷에 올려도 지식검색에서 볼 만한 내용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국민 세금을 엄청 쏟아부어 나온 결과물을 극소수의 사람만 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낭비 중에서도 터무니없는 낭비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교육부도 좋고, 문화부도 좋고, 학술진흥재단도 좋으니 정부가 나서서 서고에서 잠자고 있는 연구물들을 인터넷으로 끌어냈으면 한다. 저자에게 최소한의 지적재산권 사용료만 지급하고 모든 국민이 볼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다. 논문 한 편에서 영화나 소설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고, 제품 개발의 소재를 얻을 수도 있고, 전문지식을 키울 수도 있다. 이제 공부는 학생만 하는 시대가 아니다. 지식은 누구에게 들어가느냐에 따라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구글에서는 지금 미국 주요 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1900년 이전 발행 도서를 영인해 인터넷에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종수만 해도 수백 만 권에 달한다. 그 방대한 자료가 다양한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갈 때 어떻게 활용될지는 예측을 불허한다.(이광일 논설위원)

한겨레(07. 02. 17) 미 명문대 온라인 공짜강좌 ‘펑펑’

카리브해 연안 세인트루시아에 살고 있는 캐나다 출신 기업가 로버트 크로건은 요즘 미 아이비리그 명문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무료 강의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이 대학 몇몇 강좌의 강의노트가 자신이 추진중인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업무와 폭넓게 관련된 ‘세계 개발’과 ‘기업금융’ 등의 강의도 공부하고 있다. 크로건은 “(MIT 강좌가) 내가 사회에서 배운 실무지식과 제도교육의 용어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했다.

미군 소위인 로니 매튜도 노트르담 대학의 ‘신학의 기초’ 온라인 강좌에 빠져 있다. 그는 담당 교수인 게리 앤더슨의 강의 계획과 내용, 과제에 따라 하루에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있다고 <원스트리트저널>이 15일 전했다.

미국에서 강의 내용을 온라인에 무료 공개하는 대학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문턱이 높은 대학 강의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해, 이른바 ‘교육의 민주화’를 추구하겠다는 게 강좌를 공개하는 대학들의 공식적인 설명이다. 이 외에도 △대학 지원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동문 기부금을 확충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신문은 분석했다.

강좌 공개에 가장 적극적인 대학은 MIT다. 현재 1500개 강좌의 강의 노트와 교육과정을 온라인에 올려 놓고 있다. 오는 11월까지 1800개로 확대해 사실상 대학의 모든 강좌 내용을 공개할 계획이다. 노트르담대도 지난 가을부터 ‘철학개론’ 등 8개 강좌의 강의노트와 필독서 목록, 과제물 등을 온라인에 올려 놓고 있으며, 2년 안에 30강좌로 확대하기로 했다. 아이비리그의 또다른 명문 예일대도 오는 가을 학기에 ‘구약개론’과 ‘물리학의 기초’ 등 7개 학부 강좌를 영상 녹화해 공개할 계획이다.

아이팟과 같은 엠피3 플레이어와 컴퓨터로 음성 파일을 내려받는 방식인 ‘팟캐스팅(Podcasting)’을 통해 강좌를 공개하는 대학도 늘고 있다. 미 서부 최고 명문 스탠퍼드 대학은 지난 가을학기부터 ‘위기의 문학’, ‘역사 인물로서 예수’ 등 3강좌를 애플의 아이튠 유 사이트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올해 말까지 공개 강좌수를 12개로 늘릴 계획이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도 강의 공개를 위해 일부 강좌를 음성과 영상 파일로 제작하고 있다.

이런 강의 공개에는 재단 지원금도 활용되고 있다. 교육자료 공개 촉진 운동을 벌이고 있는 ‘윌리엄 플로라 휼릿 재단’은 지금까지 각 대학과 비영리 재단에 6800만달러 이상을 기증했다. 이 재단의 교육 프로그램 간부인 캐서린 캐설리는 “지식은 공공재다. 공공재는 자유롭게 공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 쪽에선 잠재적인 지원자를 늘리겠다는 목적이 크다. MIT의 공개강의 이용자 조사를 보면, 대학 입학 전 이 강의 사이트를 알고 있었던 신입생의 3분의 1은 강의 내용이 대학 선택과 등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대학들은 강의내용 공개가 지원자를 줄일 것이라고 걱정하지는 않는다고 신문은 전했다.(강성만 기자)

07. 0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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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TV] ‘악플’보다 ‘무플’이 두려운 세대의 아찔한 생존법
[매거진t 2006-12-07 10:32]    

김현진, <아찔한 소개팅>을 보며 80년대의 아이들을 생각하다.

<아찔한 소개팅>에 대해 마지막으로 쓴다. 그 이상의 글줄을 할애하는 것은 나에게도, 이 프로그램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도움 안 되는 짓이다.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 이 프로그램이 싫었던 이유는 지난번 글에 이미 썼고,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며 이마를 찡그리고 텔레비전을 봤던 나는 이후 <아찔한 소개팅>이 검색어 상위에 오르고 이 프로가 죽도록 먹는 바로 그 욕을 양분으로 삼아 승승장구하다가 심의로부터 중징계를 받는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문득 서글퍼졌는데, 그 서글픔으로 인해 스스로 깜짝 놀랐다. 도대체 내가 왜 저 리얼리티 쇼를 보다 말고 서글퍼진단 말인가? 그러나 가을이니까, 혹은 넌 원래 미쳤잖아, 하는 식으로 그냥 넘기기에는 그 서글픔은 무척 진하고 질겼다. 킹카가 싸가지 없네, 퀸카가 이상하네,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버스 안에 옹기종기 모여 웃고 분노하고 사진을 밟는 그 청춘남녀들을 보며 거의 처음으로, 나는 나의 세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염불보다 젯밥, 소개팅보다 TV 출연

<아찔한 소개팅>이 그토록 많은 분노를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막말이나 출연자들의 어이없는 만행 때문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이 분노를 사는 가장 큰 이유이자 인기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찔한 소개팅>이 겉으로는 소개팅 시켜 준다면서 사실은 싸움 붙이고 그걸 구경하는 프로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사랑의 스튜디오> 출연자들은 정말로 결혼하기도 했지만, <아찔한 소개팅>을 보면서 어떤 시청자도 본디 의도대로 ‘신세대의 솔직한 연애법’이나 ‘청춘남녀의 만남’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찔한 소개팅>의 재미요소는 바로 “이번 주에는 또 얼마나 미친 애가 나올까” 라는 것이다. 털 뜯기고, 물에 빠지고, 바보 취급 받는 꼴이 대한민국 온 천지에 중계되고 본방과 재방을 거듭하는데도 청춘 남녀들은 여전히 <아찔한 소개팅>에 출연하고 싶어한다. 모두가 이게 정말로 소개팅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이게 정말로 소개팅이라면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출연한다거나 내가 방금 돌려보낸 여자가 다른 후보에게 내 이야길 미주알고주알 다 할걸 알면서도 “수작이 개수작”이라느니 “다리털을 빗어도 되겠다”식의 폭언은 못하기 마련이다. 이 좁디좁은 싸이천국 대한민국에서, 세 다리만 건너면 온 국민이 서로 아는 마당에 어떻게 그런 사회적 자살을 한단 말인가?

이게 소개팅인 척 하는 건 오로지 프로그램의 제목뿐이다. 그렇다. 만드는 쪽도 보는 쪽도 다 알다시피 이 프로그램에 모여드는 건 ‘소개팅을 하고 싶은’ 청춘남녀가 아닌 ‘TV에 나오고 싶은’ 청춘남녀다. 자,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네- 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라난 세대는, 이렇게 하여 텔레비전에 등장한 것이다.

<아찔한 소개팅>에 드러난 우리의 진실, 영혼의 공동(空洞)

그러나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나는 퀴즈를 못 맞춘다고 물에 빠뜨리거나 에스테틱 샵에서 남의 털을 뽑는 그 사람들과 바로 같은 세대다. 0으로 시작되는 학번과, 80년대 이후로 시작되는 주민번호를 지녔으며, 휴대폰 문자와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쓰기 시작한 첫 세대다. 우리는 ‘왕따’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일 때에 학창시절을 보냈고, SM이니 DSP니 하는 곳에서 탄생한 아이돌 문화의 강력한 조력자이자 소비자였으며, 온라인 게임의 첫 고수들이었고 프로 게이머라는 생소한 직업군의 탄생에 일조하였으며, 스무살의 TTL이니 팅이니 알이니 N세대니 하는 “쿨하게 돈을 쓰라”는 미디어의 부추김 속에 성장하였고 ‘얼짱’이라는 단어가 생성되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보며 얼마든지 “얼굴 뜯어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뼛속까지 느낀 첫 세대다.

우리는 아무런 구호도, 아무런 외침도 없이 자라났다. 전교조 교사들이 끌려가는 걸 본 적도 없고, 전교조 교사들이 복직되는 걸 본 적도 없다. 적어도 바로 그 전 선배들인 70년대 후반 태생들에게는 “그래도 돈이 전부는 아니”라던가 “사람의 외모만 봐선 안 된다”다는 식의 위선적 점잔이라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뭣도 없다. 돈만 있으면 뭐든 다 되는 것과 외모가 얼마든지 밥 먹여 주는 것을 지겹도록 보았다.

여기에서 <아찔한 소개팅>의 권력구조는 견고하게 생성된다. 못생긴 여자 도전자는 킹카가 주는 수모를 견뎌야 하고, 키 작거나 조건이 보잘것없는 남자 도전자는 퀸카의 핀잔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찔한 소개팅>이 일견 의미있는 리얼리티 쇼처럼 보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출연한 우리 세대의 군상들이 앞서 말한 성장과정을 통해 몸에 익힌 질서를 이렇게 사정없이 노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편적 진실은 <아찔한 소개팅>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자기도 모르게 노출해 버린 이 세대의 공동(空洞)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다.

맞서 싸울 대상이 없는 세대의 외로움

우리는 영혼에 거대한 공동(空洞)을 지닌 첫 세대다. 쿨하지 못하면 당장 나가 죽어야 할 것처럼 창피해하고, 가볍고 경쾌하다 못해 그만 양 조절을 못하고 천박해져 버린 세대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행운이자 불운은 맞서 싸울 그 어떤 대상도 딱히 없었다는 것이다. 맞서 싸울 대상이 없었기에 몸은 편안했으나 영혼에는 큰 공동이 생겼다. 맞서 싸울 대상이 없었던 건 정말로 싸울 대상이 없었던 게 아니라, 모든 것과 다 싸워야 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는 번번이 졌다.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부자 아빠가 되라고 등을 떠밀고, 외모보다 마음이라면서도 성형 한두 군데는 칼 댄 것도 아니라며 성형외과 가라고 눈 부라리고, 너의 모든 것은 20대에 결정되는데 지금 잠이 오냐며 청년실업, 영어공부, 얼짱몸짱, 끊임없이 들쑤신다.

그렇다, 우리는 쭉정이다. 우리가 가져 본 구호의 양은 어찌나 초라한지 “독도는 우리땅!” “오노 개새끼!” “대~ 한민국!” 정도면 끝나버린다. 세상이 우리보고 쿨하다고 하니까 정말 우리가 쿨한 줄 알았는데 사실 그건 쿨하게 돈 쓰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멋지고 도도하게, 세상 그 무엇도 저스트 텐 미닛, 단 10분 만에 내 밑에 쓰러뜨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실은 거대한 공동(空洞)이 안에서 텅텅 울려서 불안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렇게까지 모르는 첫 세대이기 때문에 이 공동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그저 잊혀지지 않기를 원한다. 이 공동은 끊임없이 우리를 들쑤시며 일촌평 써달라고 절규하고 메신저에게 누가 나 차단했는지 알아보고 연애나 해보려다 그냥 낚시로 끝나며 밤낮 지름신의 사제가 되게 한다.

유일한 두려움은 잊혀지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찔한 소개팅>의 출연자들은 공동(空洞)을 안은 세대의 미덕을 전력으로 구현한다. 그 미덕은 있는 대로 욕을 먹고 내 홈피에 악플이 창궐할지언정 잊혀지는 것보다 어떻게든 기억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유일하게 잊혀지는 것이 두려우며, 우리가 그것을 그 정도로까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도 싸워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잊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찔한 건, 소개팅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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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08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플을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어떤 날은 고즈넉한게 좋던데 큭^^
그래도 에오스님에겐 내가 찐드기처럼 안 떨어지고 있잖아요^^

클레어 2006-12-23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런 찐드기가 너무 좋습니다. ^^
 

[말들의 풍경] <19>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가시내… 서리서리… 내 영혼 적시는 울림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은 세대와 계급에 따라, 더 나아가서 개인에 따라 다르다. 각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꼽아보자.

김수영 시인

누구에게나 모국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그 심판관의 편견에 깊숙이 연루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선 먼저 깊이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라서 외국어로 배운 언어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그 아름다움에는 문화적 허영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기 쉽다. 프랑스 바깥에서 프랑스 문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제 몸뚱어리에도 이물감을 주는 프랑스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꼽는 것 따위가 그 예다. 마흔일곱 해 동안 한국어를 써온 한 남자에게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낱말 열 개를 벌여놓는다.

하나, 가시내. 컴퓨터 모니터 속 활자 ‘가시내’에는 붉은 밑금이 그어져 있다. 그것은 이 낱말이 규범 한국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한국어 사전에 올라있지 않다. 그것이 표준어 ‘계집애’의 서남 방언이기 때문이다. ‘가시내’라는 말에 깊은 울림을 입힌 이로 서남 출신의 시인 서정주가 있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입마춤’)이나, “눈물이 나서 눈물이 나서/ 머리깜어 느리여도 능금만 먹?杵底? 어쩌나… 하늬바람 울타리한 달밤에/ 한 집웅 박아지꽃 허이여케 피었네”(‘가시내’) 같은 시행에서, 가시내는 순애와 애욕을 동시에 체현하고 있다. 사랑과 관련된 정서적 소구력의 크기에서, 표준어 ‘계집애’는 도저히 ‘가시내’에 다다를 수 없다.

둘, 서리서리. 부사 ‘서리서리’는 동사 ‘서리다’에서 나왔다. 서린다는 것은 (국수나 새끼 따위를) 헝클어지지 않게 빙빙 둘러서 포개 감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서리서리’는 포개어 감기는 모양과 관련 있는 부사다. 국수 뭉치를 세는 단위 ‘사리’가 ‘서리서리’와 동원어(同源語)임은 물론이다. ‘서리서리’는 사랑의 부사다. 이 낱말을 사랑의 부사로 만든 사람은 황진이라는 여자다. 이 여자의 유명한 시조 한 수는 이렇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애인과 떨어져 있는 황진이에게 겨울 밤은 한없이 길다. 그런데 그 밤은 애인과 함께라면 너무나 빨리 새버릴 밤이다. 시간의 빠르기는 각자의 심리 상태에 달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시인은 이 밤을 여투어두기로 한다. 그녀는 밤을 한 토막 잘라내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놓기로 한다. 애인이 온 날 밤에 굽이굽이 펴기 위해서. 황진이의 놀라운 상상력은 시간을 공간으로, 물질로 바꿔놓고 있다.

셋, 그리움. 그리움은 결핍의 정서적 효과다. 프랑스어 화자들은 “나는 네가 그리워”를 “너는 내게 결핍돼 있어”(Tu me manques)라고 표현한다. 모든 사랑의 시는 그리움의 시다. 사랑은 결핍과 부재의 상태에서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김영랑의 ‘내 마음을 아실 이’)나 “‘그립다’ 생각하면/ ‘그립다’ 생각하는 아지랑이”(서정주의 ‘아지랑이’) 같은 시행에서 그리움은 사사로운 감정이지만,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이성부의 ‘벼’)이나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김정환의 ‘지울 수 없는 노래’) 같은 시행에서 그리움은 정치적 사랑과 이어져 있다.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둘 다 빈 데를 채우려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 마음의 움직임을 좀더 객관적으로는 ‘기다림’이라 부른다.

넷, 저절로. ‘저절로’는 인텔리전트빌딩이나 하이테크파크의 작동 원리다. 그것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또는 노동에서 배제하는 새로운 사회의 부사다. 다시 말해 ‘저절로’의 공간은 ‘인간이 거세된 인공’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자연의 공간이기도 하다.

16세기 문신 김인후(金麟厚)는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라 노래한 바 있다. ‘저절로’는 애씀이나 집착을 넘어선, 마음과 몸의 가장 높은 단계이기도 하다. 인위와 자연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 ‘저절로’의 매력 또는 마력이다.

다섯, 설레다. 설렘은 마음의 나풀거림이다. 그것은 정서적 정신적 미숙의 증상일 수도 있다. 부동심(不動心)은 동서고금의 많은 현인들이 다다르려 애쓴 이상적 마음상태였다. 그러나 설렘이 없다면 생은 얼마나 권태로울 것인가. 소풍 전날의, 정인(情人)을 기다리는 찻집에서의, 설날 해돋이 직전의 설렘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생의 정당한 사치다. 그것은 생의 밋밋함을 눅이는 와사비다.

여섯, 짠하다. 내가 늘 펼치는 한국어 사전에는 ‘짠하다’가 “지난 일이 뉘우쳐져 못내 마음이 언짢고 아프다”로 풀이돼 있다. 내가 굳이 사전을 펼쳐본 것은 컴퓨터 모니터 속 활자 ‘짠하다’에 붉은 밑금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밑금이 그어지리라 지레짐작했다. 이 말을 서남 방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의 설명이 표준어 ‘짠하다’의 올바른 정의일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짠하다’는 사전의 정의와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그 뉘앙스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어 화자 가운데서도 서남 지방 사람들일 것이다. 서남 사람들이 잘 쓰는 ‘짠하다’는 표준어 ‘안쓰럽다’와 뜻이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겹치지는 않는 것 같다. ‘짠하다’에는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버무려져 있다. ‘짠하다’는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의 형용사다.

일곱, 아내. ‘아내’라는 말이 내게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일 테다. 요즘엔 젊은 세대고 나이든 세대고 할 것 없이 ‘아내’ 대신 ‘와이프’라는 말을 즐겨 쓰는 듯하다. 힘센 언어에서 차용된 외래어는 그 비릿한 사용 맥락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들리게 마련이지만, 이 ‘와이프’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국어 속에 끼여든 ‘와이프’는 그 본적지에서와 달리 천박하게 들린다. 나만 그런가?

여덟, 가을. 지방에 따라 ‘가을’이라는 말이 ‘가을걷이’ 곧 ‘추수’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는 걸 보면 한국인들의 상상 속에서 가을은 무엇보다도 결실의 계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을은 또 조락(凋落)의 계절이기도 하다. 미국 사람들의 ‘가을’(fall)에는 그 조락의 상상력이 또렷하다. 성함의 끝과 쇠함의 시작이 맞닿아 있는 때가 가을이다.

아홉, 넋. 넋에 대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것은 공식 통계와 상관없이 인류의 종교적 심성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뜻일 테다. 넋이 과학의 까탈스러운 눈 앞에 제 모습을 번듯하게 드러내지 못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넋이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얼마나 납작할 것인가.

열, 술. 이 말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인지 이 말이 가리키는 물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섞갈릴 때가 있다. 아무튼 ‘술’이라는 말만큼 술처럼 들리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술’의 마지막 소리인 설측음 /ㄹ/은 술의 물리적 성질을, 다시 말해 액체로서의 유동성을, 그 흐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한편 그 첫 소리인 치마찰음 /ㅅ/은 술이 예컨대 증류수 같은 무미 무취 무색의 액체가 아니라 빛깔과 향기와 맛을 지닌 매력적인 액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두 자음을 이어주는 원순 후설모음 /ㅜ/는, 내게, 술은 내뱉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또 마시되 예컨대 모음 /ㅏ/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폭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느릿느릿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술은 뇌세포에 상처를 낼 정도로, 또는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청각이 흐릿해져 서로 악다구니를 써대거나, 과장된, 또는 가장된 애상의 몸짓이 펄럭일 정도로 마실 일이 아니다. 이 말을 해 놓고 보니 쑥스럽긴 하다. 나 자신 ‘음주인’의 직업윤리를 잘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시인 김수영이 꼽은 말은?
마수걸이·에누리·은근짜·총채… 상인집안 내력에 장사 용어 많아

시인 김수영(金洙暎ㆍ1921~1968)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꼽은 바 있다. 시인 자신이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은 아무래도 내가 어렸을 때에 들은 말들이다. 우리 아버지는 상인이라 나는 어려서 서울 아래대의 장사꾼 말들을 자연히 많이 배웠다”고도 고백하고 있거니와, 이 말들 가운데는 ‘시장 언어’가 꽤 있다. 장사꾼의 공간이라는 ‘아래대’란 동대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그 맞은편의 서울 서북 지역은 ‘우대’라 불렀다.

젊은 독자들 귀에 설지도 모를 말들을 설명하자면 ‘마수걸이’는 하루나 한 해 중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일을 뜻하고, ‘은근짜’는 몸을 파는 여자를 뜻하며, ‘서산대’는 옛날 글방에서 학동들이 책의 글자를 짚는 데 사용하던 막대기다. 먼지떨이라는 뜻의 ‘총채’도 요즘은 많이 쓰지 않는 듯하다.

김수영이 꼽은 이 말들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이 세대(와 출신지역과 계급)에 따라, 더 나아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젊은 세대라면, 설령 이 말들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단계로 건너가기 위해 포착해야 할 뉘앙스를 도무지 잡아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의 뉘앙스)이 변하는 것은, 그래서 아름다운 말의 기준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수영은 이 수필에서 자신이 ‘매우 엉거주춤한 입장’에 있다며 “‘얄밉다’ ‘야속하다’ ‘섭섭하다’ ‘방정맞다’ 정도의 낱말이 퇴색한 말로 생각되고 선뜻 쓰여지지 않는 반면에, ‘쉼표’ ‘숨표’ ‘마침표’ ‘다슬기’ ‘망초’ ‘메꽃’ 같은 말들을 실감 있게 쓸 수 없는 어중간한 비극적 세대가 우리의 세대”라고 푸념하고 있다. 그렇지만 김수영 세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는 언어의 생태학 속에서 ‘매우 엉거주춤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중간한 비극적 세대’일 수밖에 없다. KBS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 ‘상상플러스’의 ‘세대 공감 OLD & NEW’라는 코너는 한 세대의 말이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각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꼽아보자.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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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소통·공유·행복 ‘인터넷 나르시시즘’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숲으로 사냥을 하러 갔는데 옹달샘에 비친 자신의 몸에 반해 먹지도 않고 자기 얼굴만 보다 말라 죽은 후 한 떨기 수선화가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는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차용해서 리비도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심리상태를 ‘나르시시즘’으로 명명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말이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기 과시에 몰입하는 네티즌들의 원형 서사 같아 보인다. 나르키소스의 옹달샘이 자기도취의 거울이었다면 네티즌들에게 그것은 바로 ‘블로그’ 혹은 ‘미니홈피’쯤 될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멋진 자신의 얼굴을 옹달샘에 비추듯,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만든 멋진 콘텐츠를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린다.

자신이 만든 특이하고 맛깔난 음식 정보를 블로그에 올리는 ‘가정주부들’. 디지털 카메라로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직접 찍어 미니 홈피에 올려놓은 ‘셀카족들’. 취미가 유사한 익명의 네티즌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정보를 제공하며 즐거워하는 네티즌들. 이들이 우리 시대 인터넷 나르시시즘의 주인공들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익명의 네티즌들과 공유하길 원하는 이들은 자생적인 공간에서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생비자들’(prosumers)이다.

디지털 시대 콘텐츠 생비자들은 근대적, 물리적 공간에서의 자기도취자들과는 다른 욕망을 꿈꾼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사모님들’이나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며 주말에 고급 사교파티를 즐기는 ‘문화귀족들’의 자기과시는 오로지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다. 일반 서민들이 이들을 재수 없게 보는 것도 타인과의 소통과 공유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소통과 공유를 원칙으로 한다. 맛있는 해물 떡볶이, 내가 만든 가구, 알콩달콩한 우리가족 이야기, 이 모든 정보는 내가 잘났다는 과시이기에 앞서, 익명의 네티즌들과 소통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콘텐츠라 해도, 타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이른바 ‘댓글의 행복’이 없으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터넷에서 자기과시는 하나의 게임이다. 마치 고대 원시 부족사회에서 행해졌던 ‘포틀래취’(potlach) 선물 게임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도전과 응수를 위한 반복적인 게임이다. 내가 맛있는 ‘해물 떡볶이’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 누군가가 더 맛있어 보이는 ‘치즈 떡볶이’로 응수하고, 다시 나는 최고로 맛있어 보이는 ‘카레 떡볶이’로 도전하는 게임 말이다. 게임의 장에 참여한 유저들의 도전과 응수는 배타적, 폐쇄적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개방적, 다방향적 나르시시즘이다. 오로지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다른 유저들과 소통하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내하는 것은 블로그가 주는 일상의 행복과 천상의 기쁨 때문이다.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한 ‘해피해피 라이프’라는 네티즌 참여 코너의 사례처럼, 아기자기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탈권위적이면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

물론 유저들이 만든 콘텐츠가 모두 사심 없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특정 연예인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한다거나 아니면 스스로 연예인이 되고 싶어 댓글 자작극을 벌이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인터넷 자기과시 행동이 지나칠 경우 오직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 인터넷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어떤 정치인들은 애초부터 진정한 정보 소통에는 관심이 없고, 의정활동을 위한 홍보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적인 정보들이나 미니홈피의 ‘디카놀이’ ‘일촌 놀이’들이 사이버 커뮤니티를 지극히 개인화하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려는 정치적 불감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자신을 뽐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하고 열정적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자생적 콘텐츠는 무기력증에 빠진 가정주부들에게 생활의 활력소를 준다. 이제 부엌과 거실은 가사노동의 현장에서 풋풋하고 따근따근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스튜디오로 전환된다. 인터넷 나르시시즘이 가정주부들에게는 가사의 불평등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자기 최면술일 수도 있지만, 가사의 반란을 꿈꾸는 쾌락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소비 자본주의 시대 상품화된 나르시시즘은 결핍에 대한 편집 증세를 보인다. ‘명품중독’과 같은 상품 나르시시즘의 욕구는 끝이 없다. 소통과 공유를 위한 인터넷 유저들의 대중 나르시시즘은 비록 폭력과 집착의 위험성을 갖고 있지만, 타인에 대한 에로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자신이 만든 정보를 미치도록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은 에로스적 욕망,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인터넷 나르시시즘은 행복하다.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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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타인의 시선을 갈망한다, ‘UCC시대’
[경향신문 2006-11-09 10:36]    
(위) 다음 카페에 기타연주 장면을 올린 뒤 광고까지 출연한 조래은양. (아래) 가요 립싱크 동영상으로 화제를 모은 정호성씨.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자기 과시와 노출을 즐기는 시대, ‘UCC(User Created Contents)’는 그 중심에 있다. UCC는 말뜻 그대로 사용자가 손수 제작한 콘텐츠를 말하지만, 최근 주목받고 있는 UCC는 주로 동영상이다. 휴대전화와 디지털 카메라, 편집 프로그램의 보급으로 누구나 쉽게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할 수 있게 되면서, 블로그와 미니홈피 등의 ‘1인미디어들’은 텍스트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인터넷 업계는 물론 공중파 방송국, 심지어 정치권까지 동영상 UCC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UCC에서는 나도 스타

‘UCC 세상’에선 버릴 것이 없다. 갈고 닦은 연주실력도 자랑할 수 있고, 나만 아는 다이어트 비법, 요리법을 소개할 수도 있다. 길거리와 노래방, 교실, 심지어 야근 중인 사무실에서 맘껏 노는 모습이라도 사람들의 공감만 얻을 수 있다면 ‘좋은 콘텐츠’ 대접을 받는다. 다음의 UCC 사이트 ‘TV팟’에는 ‘어깨 길이의 머리를 예쁘게 묶는 세 가지 방법’이 인기동영상으로 올라와 있다. 제목 그대로 머리를 묶는 방법을 알려준다. 글로 설명하긴 애매하고 공중파 TV에서 보여주기도 어려운 소재지만 인터넷에는 꽤 유용한 정보로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 UCC 전문 사이트 ‘판도라 TV’에는 고3 남학생 3명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고3의 발악’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인기다. 화면도 흔들리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까지 그대로 들리는 등 질은 다소 떨어지지만 고3을 보내고 있거나 경험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유명 가요를 코믹하게 립싱크한 정호성씨(23)의 동영상도 후속작을 탄생시킬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UCC를 통해 이미 스타도 탄생했다. 11살 때부터 기타를 연습해 온 조래은양(16)은 기타 관련 카페에 자신의 기타연주 동영상을 올렸다가 화제가 됐다. 조양은 ‘다음커뮤니케이션’의 동영상 UCC 광고에도 모델로 출연했다. 왕의 남자, 괴물 등 영화 OST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한 양승구군(18) 역시 ‘OST치는 남자’로 유명해졌다. 미국 동영상 UCC 사이트 ‘유투브’에 기타연주 동영상을 올린 임정현씨(23)는 뉴욕타임스의 극찬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고, 그가 연주한 캐논변주곡은 기아자동차의 광고 배경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UCC 사용자들은 프로와는 다른 시각과 참신한 소재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며 기발한 아마추어리즘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UCC를 잡아라

동영상 UCC가 높은 관심을 끌면서 국내외 기업들도 UCC를 잡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구글은 ‘유투브’를 16억5천만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유투브를 ‘올해의 발명품’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국내 포털 사이트들도 검색 기능에 동영상 검색기능을 추가하고 ‘TV 팟(다음)’, ‘네이버 플레이(네이버)’, ‘야미(야후)’ 등 동영상 UCC 사이트를 열었다. 싸이월드도 동영상 업로드 기능을 추가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정지은 팀장은 “95년 인터넷 초창기에는 메일과 카페, 2000년대 초반에는 미니홈피와 블로그가 인터넷의 대세였다면 지금은 UCC가 업계의 메가 트렌드”라며 “모든 사이트들이 동영상 UCC 이용자들과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SBSi는 지난달 27일 자사 사이트내에 동영상 UCC 채널인 ‘핫콘(Hot Con)’을 열었다. 핫콘에는 촬영장 스케치, 화제의 장면, 가상 결말, 패러디 영상 등 SBS에서 방영되는 다양한 프로그램 관련 동영상을 올릴 수 있다. SBSi는 이를 위해 7월부터 50여명의 활동인단(Icon)을 모집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SBSi 김민정 과장은 “방송국이 대중들의 빠른 트렌드에 부응하기는 힘든 점이 있다”며 “동영상 UCC의 활용을 통해 더욱 풍부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BS는 드라마 ‘서동요’ 방영때 누리꾼이 올린 ‘서동생활백서’로 인기를 끌었듯, 동영상 UCC 활용을 위해 시청률 상승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사이트 오픈 2년 만에 일평균 방문자수 85만명, 1천8백만건의 페이지뷰를 기록하고 있는 동영상 UCC 전문 사이트 ‘판도라 TV’는 다음달 ‘월드와이드’ 버전을 출시할 계획이다. 외국의 사용자들도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도록 해당국 언어를 지원한다. 김경익 사장은 “무한대의 동시접속이 가능하도록 기술적인 부분을 해결했다”고 밝히고, “동영상 콘텐츠만큼은 대한민국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동영상 UCC의 활용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는 판도라 TV에 ‘희망채널’을 열어 청와대의 활동상황을 전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포털 사이트의 한 관계자는 “몇몇 국회의원들도 동영상 UCC 이용문제를 협의해 오고 있다”고 전했다. ‘인터넷 선거전’으로 불렸던 2002년 대선에 이어 2007년 대선에서는 동영상 UCC가 새로운 변수로 주목된다.

◇수익은 누가 어떻게, 저작권 책임도 문제

동영상 UCC는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수익모델 개발 속도는 아직 더디다. 현재 동영상 UCC를 통한 수익은 동영상 앞뒤로 붙는 광고와 사이트 광고로 인한 수익 정도다. 기업들은 수익의 일부를 사용자와 함께 나누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싸이월드는 미니홈피에 광고를 연계하고 이를 통해 도토리를 얻을 수 있는 ‘해피클릭’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고, 판도라 TV도 동영상 클릭수가 늘어날 때마다 마일리지인 ‘큐피’를 적립해 쌓이면 무료 영화를 볼 수 있고 쇼핑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판도라 TV 김경익 사장은 “웹 2.0시대에는 콘텐츠와 수익을 사용자와 함께 나누는 문제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 문제 해결은 더 어렵다. 지난달에는 공중파 방송 3사가 동영상 UCC 사이트에 대해 방송사의 프로그램 게시를 자제해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사이트들은 각자 필터링을 통해 저작권에 위배되는 동영상을 걸러내고 있지만, 사실상 완벽한 제재는 불가능하다. 미국, 일본 등의 인기 드라마들은 자막서비스까지 된 동영상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도다. 프로그램 전체를 방영하는 것은 막을 수 있지만, 일부 장면을 캡처하거나 편집하는 것은 제재하기가 쉽지 않다.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웹서비스기획자 박모씨(27)는 “저작권은 아직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지만, 만일 문제가 불거지면 UCC로 돈을 버는 사이트들은 빠지고, 책임은 사용자들만 지게 된다”며 “아직까지 사이트와 사용자들 간의 약관은 노예계약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장은교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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