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할 기운도 없고 입맛도 없고 자꾸만 쓰러질 것 같다고 하는 한 환자가 왔다.  이대 목동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는 증상들....이 쭉 적혀있는 환자 이력이 내 책상에 환자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자그마한 여자분이 딸의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로 들어왔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

딸은 엄마가 최근 힘이 들었는데 아버지와 의견 충돌이 있고 난 후 말도 못하신다며 영양제를 놔 달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라 불리는 여자는 슬픈 눈만 껌뻑거리고 있으니 영양제로 해결이 될까? 란 생각이 들어서 말을 붙였다.

" 힘드시죠? 어휴...이렇게 힘드셔서 어떻해요? "

이 한마디에 엄마라 불리는 여자는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눈물은 말보다 많은 것을 표현해주고 있었다. 제대로 내가 짚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이자 슬픔을 견디어 내던 방어선이 이젠 아슬아슬하니 도와달라는 표현이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죠?"

딸도 엄마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을 몰랐다며 놀라고 있었고, 엄마라 불리는 여자는 주책없이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를 입원시키고 좀 지켜보기로 했다. 머리 속을 꽉 채운 생각들이 그녀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그 생각이 뭔지, 그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또한 어떤 것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일단 그 문제들을 풀기 전에 그녀를 좀 잘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과 ventilation(마음 속의 감정를 밖으로 내놓을 수 있도록 이야기 하는 것)을 위해 그녀의 말벗이 되어주어야 겠다고 치료 계획을 세우고는 입원장에다 싸인을 했다.

병원에서 그녀는 2일간 주로 잠을 자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야 아침, 저녁 회진시간에 그녀를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오래 입원하고 있으면 의존하게 되니까 슬슬 퇴원도 생각하라는 말을 입원 3일째 저녁에 그녀와 그녀의 딸에게 했다.

그리고, 퇴원...  3일간의 입원으로 식욕은 없지만 이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기운이 없지만 걸을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기가 싫단다. '이 사람에게 집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러는 걸까?' 집이 그녀의 불면과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는 장소라는 것은 짐작이 되었으나 그녀를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그녀를 걱정하는 딸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외래날짜를 잡아주고 퇴원을 시켰다.

그녀가 오늘 외래로 왔다. 이젠 이야기는 잘하는데 식욕이 없단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겠냐?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피하고 싶은 집의 이미지 교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 가면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사사건건 참견하는 남편과 부딪히는 것이 싫고 지금 시댁에 며느리로서 해야할 일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데다 직장에서 과장직급인지라 해야할 일들과 프로젝트들이 목을 죄고 있고 이번주 토요일에는 방통대 기말시험이 있다는 이야기 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너무나도 술술 자신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며 그녀는 얼마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고 있었을 그녀, 그녀가 맡고 있는 삶의 무게로부터 도망가고 싶었을 그녀, 이해받고 싶었을 그녀의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측은하게만 여기면 그녀가 일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의 기억과 감정을 재구성하기로 마음 먹었다. 재구성이라고 하니 조작의 냄새가 폴폴 풍기기는 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생각에 다른 면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만 해도 그녀 스스로 자신의 생활과 삶을 재구성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어서 그녀에게 이야기를 했다.

"아퍼서 현재 휴가를 내고 있으니 지금 당장은 회사일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시댁문제도 대소사가 없으시면 일단은 좀 미뤄 두셔도 될 거 같구요. 그래도  방통대 기말시험이 코앞에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힘드시면  따님에게 집안일을 좀 분담시키고 공부에 매진해도 되는 껀수가 생긴 거잖아요. 그리고,  스스로를 재평가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거는 지금 본인의 여러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겁니다. "

"공부를 하려고 해도 머리속에 글이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아요. 머리 속이 터져버릴 것처럼 많은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아직 기력이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니니까 많이 힘드시면 누워 계시구 딸들에게 시험범위를 읽어달라고 하셔요.  사람의 목소리는 들을 당시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더라도 시험시간 같이 절박할 때 갑자기 생각이 나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이번 기말시험도 잘 통과하셔야 앞으로 졸업 후 하실 일들에 대한 다음 단계의 계획이 세워지니까 많은 생각을 한꺼번에 하시는 거 보다 바로 앞에 것부터 수습하시는 것이 필요할 거 같네요."

"그러게요. 걱정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어렵게 방통대 공부하고 있는데 밀리면 안되겠죠? 그래도 애들에게 미안해서 어떻해요."

"엄마가 아프면 참 곤란하죠. 그런데, 기댈때는 확실히 기대고 빨리 몸을 추스리는 것이 더 나아요. 오래 아프시면 가족들 전체가 엉망진창이 된다니까요. 확실히 기대고 빨리 일어나셔야 예쁜 딸에게도 필요한 이야기도 해주시고 감정도 보듬어 주실 수 있잖습니까?"

"그렇겠죠? 시험 공부하고 빨리 일어나고... 그래야 하는데.."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요. 도와줄 사람들이 많은데 뭐가 걱정이세요?"

"......."

 

엄마라 불리는 그녀가 이번에 심하게 넘어졌다. 어렸을 때야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주며 일으켜 세워주는 엄마라도 있지 다 큰 지금, 인생길에서 넘어지게 되니 일으켜 주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돌뿌리에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  넘어질 때의 아픔만 느끼던 내 몸이  쉴 기회도 함께 모색하게 되니 조금은 넘어지는 것이 덜 두렵지 알겠는가? 

뭐.."난 평생가도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나를 받혀줄 수 있는 버팀목은 있는지, 그것들은 얼마나 든든한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다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길에는 숨겨진 부비트랩이 너무나 많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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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6-11-23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어진 김에 쉬고 있는 저는 여기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편이구나 생각하고 위로 받고 갑니다. 넘어졌으니 쉴수 있겠다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환호를 불렀으니...

클레어 2006-11-24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쉬어간들 어떻겠습니까?
결국 다시 옷을 여미고 갈 길 갈테니 말이죠.

바람구두님/ 추천 감사합니다. 이런 상황들이 내가 있어야 하는 이유라면 받아들여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