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고단한 노동의 시간을 보낸 후 금요일 저녁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날,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은 서울의 빈 집에서 멍청히 시간을 보내다 이젠 동네 이웃이 된 15년지기 친구를 불러서 삼겹살에 소주를 한 잔 하고는 친구네 하숙방으로 기어들어가 라디오랑 음악을 한참 들으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날에는 치렁치렁 길기만 한 무명초(無名草)를 쳐냈습니다. 염색이니 퍼머니 하면서 괴롭혔던 머리칼은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생명력이 없는 물건처럼 내 머리에서 스러져내리는 머리칼은 말 그대로 이름없고, 의미없는 물건이 되어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주변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엄니, 아부지가 서울집에 갑자기 오셨습니다. 정리 되지 않은 집의 어수선함은 부모님께 거슬림으로 다가오셨던 모양입니다. 혼나고 변명하고.......(이 지긋지긋한 반복은 어떻게 해야 해결되려나? -_-a)

어제 아침에 부모님이 떠나가신 후, 커피를 마시고 마트에 가서 블라인드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창밖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모두 막을 수는 없겠지만 쓸데없이 날아오는 시선들은 가릴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직접 벽에다 드라이버를 들어 구멍을 내고 블라인드를 고정시키고는 블라인드를 내렸습니다.

아. 지. 트.

밀폐통조림 같은 아지트에서 나는 라디오를 오랫동안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에야 인터넷이 연결되었습니다.  밤늦게 내려놓았던 블라인드를 올리고 통조림에다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놓듯 인터넷에다 기지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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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1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보입니다.
친구랑 라디오 듣고 싶은 봄 눈 내리는 날입니다.
님을 만나기 위해 신촌으로 뜨고 싶은 날입니다.

클레어 2006-03-1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요일, 춥지만 새로움이 묻어나는 날입니다. 활기있고 즐겁게 보내셔요.
좀 더 따스해지면 여우님이랑 만나고 싶네요.
여우님, 그동안 건강하셔야 해요..
그리고, 봄바람 먼저 나기 없기..

딸기 2006-03-13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 되지 않은 집의 어수선함은 부모님께 거슬림으로 다가오셨던 모양입니다."
청소 안하고 있다가 혼났단 얘기를 이렇게 우아하게 하다니.
메롱.

딸기 2006-03-13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는 여우님만 만나고 싶고 이 언니는 안 만나고 싶으냐!

클레어 2006-03-14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언니/ 여우님은 더 멀리 떨어져 계시잖아요. 그리움은 거리에 비례하는 법! 언니도 마이 보고 싶어요. 거리가 그래도 가까워졌으니깐 언제든 볼 수 있다는 것이 좋네요..언니도 환절기에다 황사 날리는 계절이니 목감기 조심하시구요 조만간 뵈어요.^^



클레어 2006-03-14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착한 딸기언니꺼정 충동질해서 가련하고 연약한 에오스에게 응징을 한다고 하시다뉘... 흥~ 못땠어 정말....

딸기 2006-03-16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이싸람들이...
 

요즘 일복이 터졌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직장 구하기 전, 느긋한 백수(하얗고 게으른 손..은 얼마나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던가? 거기다 길고 크기까지 하다면...)의 삶을 누리고 싶었으나 .....

인천에서 서울로의 이사로 거의 2주를 보내고 집정리가 끝나자 마자 제대한 막내동생이 있을 집 청소랑 인터넷설비랑 가전제품구입 등등을 위해 부산에 내려와 왔거든요. 부산에 내려와 있는 일주일동안 부산바다가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경도 못한 채 일만 죽어라 하고 있다보니 나의 로망 '느긋한 백수'라는 말은 주변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ㅜㅡ

그래도 날씨가 많이 풀렸네요. 이것저것 물품 구입이다 뭐다 해서 돌아다니는 길거리의 바람이 차지 않은 것을 보니 말입니다. 부산보다 윗쪽에서도 봄빛을 느끼고 계시겠죠?

얼음장 밑으로 고요히 흐르던 물이 봄기운에 못이겨 힘찬 소리를 내며 생동하듯 에오스도 잘 지내고 있단 인사를 하고 싶어 간만에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  봄....역시 좋은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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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09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계절인건 확실하군요
님의 글을 백만년만에 읽습니다.^^

딸기 2006-03-1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얏 에오스 서울로 이사왔니? 말 좀 해주지...

클레어 2006-03-11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오늘도 따스한 하루였습니다. 올해 첫 황사가 중국에서 불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마스크 하시고 목을 따스하게 하는 차 드시는 것 잊지 마시길.. ^^
백만년만에 말을 걸어도 화답하는 이 있으니 기쁘기 그지 없네요.
흐~ 넘 좋당~~~ (파란여우님께 부비부비~~)

딸기언니/ 신촌으로 이사왔어요. 친구 왕고가 있는 곳에서 10분 남짓한 곳으로 ...
이제 언니, 자주 볼 수 있겠넹...호호호~~ ^^

딸기 2006-03-11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그랬구나!
직장도 옮겼겠구나.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
 

예년보다 따뜻한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고 뉴스에서는 떠들어 대고 있다. 

'객관적인 사실이야..받아들여..'  라고 강요하는 날씨 뉴스를 보면서 '훗~'하고 웃었다.

작동하지 않은 냉동저장고 갇혀 얼어죽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면서, '객관'과 '주관' 중 어떤 것이 한 사람의 삶에 더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빨리 봄이 왔으면..

겨울잠이 쏟아지는 것을 보니 아직 나의 주관적인 일기예보는 '겨울,, 그리고 추움' 이라니깐..

기냥 봄이 올 때까지 더 자야하려나?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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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1-31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봄...봄봄봄..봄아..봄봄아~~~

딸기 2006-02-0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오스야... 봄이 되면 우리 꼭 만나자 ㅠ.ㅠ
 
고슴도치 아이 그림이 있는 책방 1
카타지나 코토프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보림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텔레비젼 드라마 중에 '이 죽일 놈의 사랑'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비'라는 한류열풍의 주인공을 내세워 만든 드라마였는데 '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드라마는 시청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목을 사로잡았다. 물론 '비'가 문제였다. 그가 나오는 드라마는 그의 전작인 '풀하우스'나 '상두야, 학교가자~'등에서 이미 어느정도 연기력을 인정받았기에 그의 또다른 변신이 기대된 것이 사실이었다.

이 드라마속에서 '비'는 '강복구'라는 결손가정의 양아치 3류인생을 연기한다. 제 식구 건사 못하고 술에 절어 폭력만 일삼는 남편을 두고 마누라는 도망가고 딸려있는 아들 형제에게 세상의 분노를 퍼붓고 싸움질을 거는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습관화된 폭력'을 받는 그의 아들들. 보통 이론서 속에서는 '학습된 가정폭력'에 대한 통계를 들먹이며 그들의 미래또한 또다른 가정폭력의 씨앗을 품고 있는 시한폭탄처럼 이야기를 하되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사회제도의 필요를 이제서야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아동학대에 대한 전화고발 시스템 '1391' 이 등장하고 가정내 폭력문제가 사회계급의 이분화와 관계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미흡하기 짝이 없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세계화에 발맞추어 급격하게 해체되는 가정과 사회계급이 상류와 하류로 이분되는 한국내에 수많은 결손가정과 소년, 소녀 가장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들의 삶을 바라보며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디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푼돈이나마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의 손길도 알게 모르게 늘어가고 있으나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모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자란다. 서로의 작은 어깨를 맞대어 온기를 얻고 서로를 어루만지며 자란다. 그러나, 그들을 살펴봐주는 큰 손의 따스함을, 큰 어깨의 든든함을 느껴보지 못한 아이들은 추위에 오그라든 작은 손처럼 펴지지 않는 그들의 속내를 내보이는 대신 세상의 규칙에 눈을 뜨게 된다. 먹거나 먹히거나.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자면, '강복구'는 그나마 자신을 잡아주던 좁고 따스한 어깨인 형,'강민구'가 최고의 여배우인 '차은석'의 결혼발표와 함께 식물인간이 되는 일을 겪게 된다. 이미 세상의 밑바닥을 굴렀으니 더이상의 밑바닥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 '아버지 같이는 되지 말라'고 충고하던 귀찮은 형이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별 영향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드라마 내내 슬플 때 울지 못하는, 울고 싶을 때 사탕을 빨고 있거나 오히려 웃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강복구'의 분열된 정신세계는 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 울어도 달래줄 사람이 없어 울음을 잃어버린 아이의 모습 그대로 껑충 커버린 소년의 모습이다. 이 소년은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세상에 대한 분노를 폭력으로, 다른 이의 멸망으로 앙갚음을 하려 한다. 이 소년에게 세상이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해준 사람들이 좀 더 일찍 있었다면, 그리고, 주변에 가까이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상처가 상처를 알아보듯,  '강민구'라는 따스한 기억을 찾아 모여든 '강복구'와 '차은석'(부연설명을 좀 하자면 어려운 환경을 거쳐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되 가족들은 그녀의 자리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치부에 그녀를 이용할 뿐 그녀의 정서적 안정을 주는 바탕이 되지는 못했다.)이라는 두 남녀의 사랑은 어쩌면 예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따스한 기억이 세상의 틈바구니 속에서 홀대받아 무너질 때 그들의 스러짐도 예정된 것처럼.

이들의 모습에서 난 고슴도치 아이의 미래를 보았다.  이 책은 '입양'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사회에서 그것이 제대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듯 보인다. 자녀에 대해 통념적인 혈연중시의 풍조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에게 들어갈 많은 시간과 돈에 대해서는 '입양'이라는 해결책 뒤에도 그 어려운 결정을 한 각각의 가정들에게 그 책임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에.

고슴도치 아이들을 안아줄 수많은 가슴들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예전 동네 분들이 동네 아이들을 키우듯 각 마을마다 사랑의 삼각끈처럼 아이들을 책임지고 품어줄 수 있는 시스템 계발은 진정 어려운 것일까? 예전에는 가능했는데 지금은 할 수 없다면 지금은 예전보다 더 좋은 세상일까?

글을 쓰다 흥분했다.  책 내용은 배가 아닌 가슴이 아파 서로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맺게 되고 부모로서, 자녀로서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이다. 부모가 되고 싶으나 부모가 될 수 없는 사람들, 누군가의 자녀가 되어 사랑받고 싶으나 그럴 기회가 없는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인연은 그들의 마음속 결핍으로 무채색으로만 느껴졌던 세상에서 다른 색채와 맛을 찾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중요한 기회이다.

그러나, 그런 인연맺음이 계속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해체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또한 중요한 일은 아닌지...

정부가 최근 세째자녀들에 대한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내세웠다.  지금 존재하고 있는 아이들이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정책은? 하고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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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1-0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늘 텔레비전 뉴스 화면 앞에 대고 외치는 소립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만들란 말이야!"
메아리입니다만, 근데요. 남의 아이 께름직해서 어떻게 키우냐는 부모,
이외로 많답니다. 이게 우리들 자화상이죠.
여하튼, 에오스님! 알라딘이 '일반 수준'이라도 이곳에서 님을 쭈욱 만나고 싶어요.
제 마음 알죠?^^

클레어 2006-01-13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왔더니 좋아하는 파란여우님이 도배를 해주셨군요. 님의 따스한 손길이 여기저기 묻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 제가 요즘 여력 부족으로 서재 관리에 소홀했음에도 찾아와 주시고 안부 물어주시다니...여우님을 봐서라도 힘을 좀 내야겠군요. 불끈~ ^^
 

1. 엘레베이터를 탔다.  같은 엘레베이터에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어색한 모습으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의 숫자를 보고 있었다.  같은 층의 도착점을 찾아 내려가는 것에 대해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으되 서로의 존재는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듯 계속 뚝뚝 내려가는 숫자들만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 여자는 남자의 몸차림을 쳐다보았다. 반팔에 반바지 차림. 검은 티셔츠에 노란 반바지 차림의 그를 흘깃 살펴보고는 '땡벌같구만..'이란 생각을 하며 훗~하고 웃었다. 물론 그 웃음 소리가 들키지 않을 정도의  교양은 있는지라 도착점 편의점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의 사이는 여전히 그 자리였다.

2. 남자는 먼저 편의점안의 주류코너에 붙어 있었다. 여자는 잠을 쫓기 위한 커피를 고를 예정이었지만 주류코너에 붙어 있는 그의 몸짓에 잠시 고민을 했다. '하나 살까?"하고.. 그러나, 냉장고에 남아있는 참이슬이 생각났다. 이슬은 선인의 선식..이라는 대학선배의 말대로 하나 비치해 놓았던 것이 생각났기에 더이상 고민없이 커피코너에 갈 수 있었다.

그의 선택은 좀 더 빨랐다. 여자가  맥심 믹스 커피를 고르고 계산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계산대의 편의점 알바의 냉험한  판결을 따라 참이슬 가격을 치르고 있었다.  그 다음에 여자는 계산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엘레베이터 앞에 섰을 때 그도 서 있었다. 땡벌 한 마리가 어느 꿀벌에게서 착취한 꿀통처럼 그는 참이슬을 야무지게 쥐고 서 있었다. 여자도 별반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나 오늘, 오늘 밤이 무서워요."라고 했던 눈이 날서있던 한 여인의 노래처럼 그녀또한 두려운 밤을 쫓기 위해 커피를 들고 서 있는 폼새는 그렇게 당당한 것이 아니었기에.

3. 엘레베이터에 한 여자와 한 남자는 또다시 같이 올랐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야 할 엘레베이터는 오히려 하강직선운동을 하고 있었다. 둘은 말하지 않았으나 똑같이 머리 속으로 '젠장'을 외치고 있었다. 꺼꾸로 가는 인생길에 오케이라고 흔쾌히 외칠 이도 없겠지만 분명히 올라간다고 했던 엘레베이터가 꺼꾸로 내려가고 있다니... 말없이 엘레베이터는 지하 2층에 머물러 한 남자를 태웠다. 한 남자도 종이 봉투에다 물건을 가득 싣고는 올라탔다. 여자는 종이 봉투 바깥에 붙어있는 분홍색 리본을 흘깃 보았다. 아마도 그 남자에게 어떤 여인이 준 선물이 아닐까? 라는 상상으로 엘레베이터는 러브러브 분홍빛으로 물드는 듯 했다. 어흠~ 헛기침을 하며 올라탄 남자는 따로 자신의 집으로 가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침묵 속에 어디로 가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여인의 층인 4층이거나 남자의 층인 7층이거나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 하나에 낯선 러브러브 분홍빛 후광 속 남자의 집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4.엘레베이터가 상승운동을 했다. 숫자들이 하나둘 바뀌면서 빛나고 그 순간에도 그들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엘레베이터에는 살아있는 생명체는 없는 듯 했다. 오직 살아있음을 숫자로 표현하고 있는 엘레베이터 외에는. 어쩌면 엘레베이터가 그들을 모두 소화해버리고 없는지도 모르겠다. 부재의 순간이 4층 불이 켜지고 엘레베이터가 배출의 신호를 낼 때까지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팅~'하는 배출의 소리와 함께 여자는 커피믹스를 들고 자신의 삶 속으로 배출되었다.

5. 땡벌과 분홍빛 리본또한 7층에 배출되어야 하는 각각의 물건처럼 아무런 이야기없이 조용히 상승기류를 탄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랐다. 땡벌의 손에 든 '참이슬'과 분홍빛 리본의 손에 든 '분홍리본의 종이봉투'이외에 그들을 표지할 수 있는 것들은 없었고 그들은 또한 '팅~'하는 소리와 함께 7층에 배출되었고 각각의 방으로 분리배출 되었다.

6. 7층의 위에는 옥상이 있었다. 그 오피스텔에 유일하게 유리창 너머로가 아니라 날 것으로 보이는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우주인들의 통신을 받는 둥근 안테나들처럼 스카이 라이프 안테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하늘의 전파를 받는 곳인데 가끔 진짜 바람이랑 눈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분리배출된 물건들이 각자의 포장상자를 찾아가고 남은 여백같은 옥상에 달도 가끔 조명처럼 떠오르기도 하고 구름에 가리워져 나타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바람은 찼고, 눈은 포근하게 다가왔다.

7. 4층 여자는 대학선배의 말대로 '선인들의 선식'이라 불리던 이슬을 깠다. 땡벌이었던 7층 남자도 여자친구의 사진이 박힌 사진을 바라보았고 또다른 7층남자, 분홍리본은 컴퓨터를 켜고 맛있는 커피를 끓이고는 따스한 차에다 손을 대고 몇십분 전에 슬며시 잡았던 그녀의 손과 입술을 기억하고 있었다.

8. 종합선물세트처럼 그렇게, 빼곡한 삶들이 새해 첫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이후 어떻게 될런지는 지켜봐야 알 일....하늘에 감시하는 누런 눈깔이 없는 날에는 상상력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거짓말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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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1-0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엘리베이터 무서워서 안타거든요.
따스한 찻잔에 손을 대며 그녀의 입술을 기억해내는 남자라...
캬아~ 내 과거의 남자들은 너무 멋없어 보여요.
근데 이 글 꼭 소설속의 문장들처럼 콕콕 찝어주는 맛이 있걸랑요.
님의 정체를 밝히셔야겠소이다!^^

클레어 2006-01-1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정체는 '양파'입니다...벗겨도 벗겨도...헉~ 부끄~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