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지만 평택에 다녀왔던 것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하지 않고 넘어가는 삶은 잊혀지기 쉽다. 머리 속 깊숙히 내려앉을만큼 감정의 뿌리가 깊어지려면 자신의 문제가 되어야 하고 실랄하게 통증을 느껴야 한다. 모두들 피하고 싶어하는 고통속, 그 자리에 서서 견뎌낼 자신이 없다면 차선책으로 필기구를 들어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하고 다시 되새기는 것는 것도 한 방법이란 생각에.
1. 첫만남..
용산역에서 평택으로 향하기 전에 돌바람님께 전화가 왔다. 목소리의 맛..부드러움속에 숨겨진, 질긴 무엇이 느껴졌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지만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였다. 엇갈림 속에 잠시 주저하다가 용산역에서 평택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탔다. 차비 4000원. 편하게 창밖을 내다보며 기차의 경쾌한 달음박질을 만끽했다. 구름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햇살에 노곤해져 졸기도 하고...그렇게 하다보니 56분만에 평택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택역 맞은 편 2번째 골목"이라고 자상하게 평택극장의 위치를 가르쳐 주시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평택극장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돌바람님께 전화를 했고 지하철로 오시는 중이라 했다. 곧 도착한다..는 말씀을 듣고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나름 비장한 각오로 평택에 들어섰건만 평택극장앞의 여고생들의 웃음 소리와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여느 토요일 오후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다른 마음새로 같은 장소에 서 있다는 것은 들키지 않으려면 내 안의 초조함과 이질감을 극복해야 했다. 빨리 오셨으면 좋으련만....
돌바람님이 도착하셔서 전화를 해주셨다. 평택극장 앞에서의 조우.. 돌바람님은 눈이 무척이나 예쁘고 키 큰 청년과 함께셨다. 알라딘의 '푸하'라는 아이디의 청년... 간단히 인사를 했고 돌바람님은 큰 눈에 부드러운 모습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이나 밤새고 오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분의 열정이 느껴지는 듯 했다. 돌바람님께서 문.망.에서도 몇 분이 더 오시기로 했다고 하면서 바쁘게 전화를 하셨고 곧 우리들은 구두 한 켤레님과 구두 한 켤레님의 사모님도 만나뵐 수 있었다.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신 구두 한 켤레님, 그 사모님의 사람을 극도로 편안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위기에 이끌려 '좋은 분이구나..'란 생각을 절로 가지게 되었다.
평택극장 주변 음식점에서 간단히 부대찌게로 밥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각의 나이를 이야기하며 20,30,40대가 한 자리에 모여 같은 주제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밥을 먹은 후, 돌바람님은 나중에 오시기로 하신 분들을 기다리신다며 평택극장 앞에서 기다리시기로 하고 나머지 4사람은 구두한켤레님의 차로 먼저 평택의 대추리로 가기로 했다.
2. 대추리...철조망과 깃발의 고장..
대추리를 찾아가는 길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너른 평야였다. 논갈이가 한창인 너른 평야들의 적막함과 고요함, 아무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란 섣부른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의 들녘은 대추리 마을 입구의 거대한 대나무 장승과 "미군기지 반대한다." "올해도 농사짓자." 라는 문구가 새겨진 노란 깃발들의 힘찬 펄럭임 속에서 깨어지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대문에 달려있는 깃발들은 대추리 마을 분들의 위기의식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깃발들의 행렬 속을 비집고 달려 대추리 초등학교로 향했다. 대추리 초등학교의 정문은 트랙터가 3중으로 결계를 치고 있었고 대문은 쇠사슬로 굳게 닫혀 있었다. 미군기지 확장을 위한 본부로 대추리초등학교를 사용하고자 하는 국방부의 계획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대추리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향하는 샛길로 향하며 마을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구경했다. '미군들아 조심해라. 우리아빠 화났다.' '황형사 개X끼, 빨갱이는 정부이다.' 란 낙서를 보며 동시에 웃음을 지었던 우리들..웃음을 지으면서도 씁쓸했던 것은 마을의 벽에다 익명의 저항낙서를 해야 했던 상황들이 이 마을에서 벌어졌음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운동장에 내려갔더니 수십명의 대학생들과 마을 농민 분들이 불을 피우고 천막을 치고 있었다. 우리들도 불 피우는 것들을 도와드리고 천막 앞에 플랭카드 붙이는 것을 도와드렸다. 마을의 천막교회라고 하셨다. 운동장에서 불을 쬐며 대학생들에게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동국대 학생들인데 농활을 오게 되었다고 하면서 모판준비랑 모판 흙담기를 했다고 했다. 시간을 조금 보내고 있으려니 돌바람님이 문.망.의 초여름님, 민들레님, 그리고, 알라딘의 잉크냄새님과 함께 도착하셨다. 모두 처음뵙는 분들이었지만 서로 인사를 하고 학교 건물구경을 하기로 했다. 농활을 오거나 사회단체에서 오신 분들을 위한 숙소가 2층 교실에 마련되어 있었고 잠자리로 썼는지 박스와 스티로폼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들은 학교 안에서 기념사진을 2장 찍고 밖으로 나가서 불을 피우고 계신 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미군기지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철조망이 길게 쳐져 있었다. 민주노동당 경기지부 당원분이 거기에 마침 계셔서 함께 불을 쬐며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다. 미군의 후방 재배치 계획의 일환으로 정부가 강제로 땅을 매입하고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의 이주를 강제하고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평택의 미군기지를 위해 필요한 땅이 649만평정도 인데 거기에 미군은 추가로 100만평정도를 미군 공군비행사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골프장을 위해 더 매입해달라고 요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택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정부에서 평택시에 추진하고 있는 '국제평화도시계획'이라는 것에 대해 '미군기지의 배후 지원도시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라며 주민들의 동의도 없이 이런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 반대하는 고덕면 주민들과의 연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와중에도 철조망 바깥쪽 미군기지쪽에는 지프차 같은 것이 한 대 서서 계속 이쪽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분들도 그쪽을 바라보면서 교대로 저쪽 상황을 망을 보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하시는 분의 얼굴에서는 피곤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 싸움이 언론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벌써 6년째라고 한다. 그 지리한 시간 동안 마을주민들 중에서 이사를 가신 분들도 있고 아직 이곳에서 싸우고 계신 분들도 있다. 그렇지만, 외부에서 이 마을로 다시 들어오시는 젊은 분들-한 일본인 시인은 사람들의 삶을 억누르는 상황, 사회구조에 대해 관심이 많아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평택 이야기를 듣고 평택으로 들어와 산다고 한다.- 이 있어서 폐가를 손질하고 다른 용도로 쓰는 방향도 함께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다.
3. 비닐하우스 콘싸이트 - 평택을 밝히는 촛불, 촛불들.
7시가 되어 우리들은 모두 운동장에 세워진 비닐하우스에 모였다. 비닐 하우스에는 마을 분들과 대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계셨으며 모두들 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다. 함께 모여 촛불을 붙이고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이 촛불집회의 횟수만해도 벌써 564회째라고 하셨는데, 진행을 맡고 계신 민주노동당 분께서는 '비닐하우스 콘싸이트(콘서트)'가 벌써 564회째라고 하시며 분위기를 띄우셨다. 정태춘씨도 오셔서 노래를 해주시고, 영화인 대표로 임순례감독과 봉준호 감독, 양윤모(?) 영화평론가의 이야기, 민요패 아라리요의 노래를 들었다. 봄농활을 하기 위해 왔다는 한신대, 동국대의 대학생들의 이야기들, 평결사(평화결사대??)에서 여러 분이 오셨고, 한겨레 블로그에서도 3분이 오셔서 자신이 평택에 오게된 동기등을 이야기 해주셨다. 그들처럼 앞에 나가서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문.망. 과 알라딘에서도 왔었고(^^V), 길을 물어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평택이야기를 듣고 아기를 데리고 오신 가족단위의 방문객들도 있었다. 그리고, 15일 공권력 투입때 2명의 사회활동가와 2명의 대학생이 구속되었는데 2명의 대학생은 풀려났고 2명의 사회활동가는 계속 구속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비닐하우스 안의 촛불들은 그렇게 평택의 상황을 서로 알리며 밝히고 있었다.
1시간 20분정도의 촛불 집회를 마치고, 구두한켤레님께서 함께 모여서 정리집회를 우리끼리 가지자고 하셔서 돌바람님, 푸하님, 초여름님, 민들레님, 잉크냄새님, 구두한켤레님 사모님, 그리고, 나는 동그랗게 모여앉아서 오늘 받았던 느낌을 이야기 했다. 공중파에서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이 곳 이야기를 찾아내어 모인 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동, 미군부대이전을 통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마을 분들의 의지에 대해 죄스러움과 함께, 우리가 본 것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등등.
우리들의 정리집회를 마치고 비닐하우스를 나오며 바라본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었다. 잉크냄새님께서 별들을 보며 봄 별자리를 가르쳐 주셨고 푸하님은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나쁜 사람은 없다란 말을 해주셨다.
별...별까지 가는 길을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우리세대는 망상과 공상 속에서 그 길을 찾아 해메다가 끝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같이 촛불을 들고 있던 꼬마들에게는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별...우리들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 있었던 별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한다.
4. 집으로 ...
잉크냄새님께서 초여름님과 민들레님을 평택역까지 태워 주시기로 하고, 돌바람님과 나, 푸하님은 구두 한켤레님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잉크냄새님의 차를 따라 나가다가 평택역에서 내리시는 초여름님과 민들레님께 잠시 손을 흔들어 인사를 보내고 우리들은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피곤함에 그냥 잠들었는데 이렇게 오늘, 2시간 남짓 어제를 정리하다보니 빚진 기분이 든다. 내 머리속에서 흘러넘치는 이 감정의 물결과 평택을 보고 느낀 것이 어찌 내가 만들어 낸 것이랴! 평택 주민분들과 거기서 숙식을 하면서 주민들과 생활하고 계신 활동가 분들, 젊은 혈기로 못자리를 만들고 흙을 돋우면서도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던 농활대들, 그리고, 돌바람님과 어제 함께 해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미흡한 이 글로서나마 감사함을 표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