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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사람
우치다테 마키코 지음, 박승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길고 지루한 소설을 읽었다. 마치 미드 《브레이킹 배드》를 1, 2회를 볼 때의 느낌이다. 느리고 더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끝난 사람(?)이라니 ‘끝’은 졸업일수도, 마무리일수도, 완성일수도 있다.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나 ‘끝난 사람’을 긍정적으로 읽는 사람은 없을 터. 소설의 주인공 다시로 소스케의 정년 퇴임식 날 소설이 시작된다. 우치다테 마키코는 이렇게 길고 지루한 소설을 통해 그리 특별하지 않게, 멀고도 험한 길을 끝까지 견딘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을까.
한 번도 성공, 승진에 관심이 없었던 내게 주인공 다시로는 낯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세속적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많다. 다시로가 대통령이나 재벌이 되려고 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출세의 길을 걷는다. 고향을 떠나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일본 최고 은행 임원 직전까지 실패를 모르고 승진을 거듭했던 다시로가 자회사로 좌천됐을 때 이미 그는 끝난 사람이었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방법을 고민한 적이 없었던 노동 기계. 그것은 박정희 시대 새마을 운동과 한강의 기적으로 미화되는 베이붐 세대(1955~1964년 사이에 태어난 900만명)의 삶이며, 일본 단카이 세대(1946년~)의 활력과 희망을 상징한다. 가족을 위한 희생, 국가와 민족을 앞세운 사명감으로 무장했지만 개인의 삶은 무시되고 조직이 우선했던 세대다. 다시로의 속내는 그대로 우리 사회에도 적용된다. 퇴직의 시기와 방법이 다를 뿐 모든 직장인에게 닥칠 일이다.
나는 ‘평화롭고 즐거운 여생’을 즐길 수 없는 타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여생’이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 산 사람에게 어찌 ‘남은 인생’이 있을 수 있나.
여든이건 아흔이건 혹 병이 들었건 살아 있는 한 그냥 ‘인생’이지 ‘남은 인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 228쪽
평균 수명이 80세에 이른다. 노인의 기준과 개념도 달라졌다. 퇴직은 은퇴와 다른 개념이다. 스스로 은퇴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퇴직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여생’도 다른 개념이다. 물론 주인공 다시로 소스케는 그 ‘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작은 회사에 고문으로 일하다가 사장을 맡고 회사가 도산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는 반전도 임팩트도 없다. 로맨스그레이가 잠시 등장하지만 이 책은 지나치게 점잖고 노년의 사적 욕망과 세속적 욕심을 정밀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동양 문화권에서 우리 아버지 세대가 걸어온 길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지금 ‘청춘’이 느끼는 것과 다르듯이. 여생은 없다. 그냥 인생일 뿐. 누구나 소중한 인생지만 타의에 의해 여생이 될 수 있음에 주의하라는 경고일까.
작가는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퇴직한 남자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더 일하고 싶은, 오로지 일밖에 몰랐던 평범한 직장인의 욕망일 테지만 그것은 치열한 생존 경쟁 시대를 견딘 남자의 수고로움과 거리가 멀다. 여전히 현역으로 일하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 인정 욕구가 하늘을 찌르고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우치다테 마키코는 『끝난 사람』에서 정년퇴직을 ‘생전 장례식’이라고 명명한다. 욜로와 워라밸이 트렌드가 된 시대에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겠지만, 일찍부터 게으를 수 있는 권리(폴 라파르그)를 주장했던 사람에겐 불쌍한 일중독자로 보이겠지만 주인공 다시로에게는 일이 곧 인생이었다. 성취감을 맛보고 삶의 보람을 일에서 찾았던 남자에게 퇴직 후의 ‘여유’는 고통이다. 연금과 저축으로 생계에 지장이 없는 주인공은 노년의 빈곤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치에 불과한 이야기다. 먹고 살 걱정이 없으니 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구박받을 이야기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하루 세끼 밥만 먹고 잠잘 곳이 있으면 다 같은 인생인가.
예순 셋.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정년을 맞은 주인공의 문제는 ‘끝낸 사람’이 아니라 ‘끝난 사람’이라는 데 있다. 주체적으로 자기 일을 그만두고 정리했다면 갈등이 없다. 그러나 다시로 소스케는 끝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끝내지 못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쓸쓸함과 공허함을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다. 고통이든 고독이든 결국 추론에 의한 것일 뿐 공감은 불가능하다. 다시로 소스케와 유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그와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 각자 가진 스스로에 대한 연민, 일과 휴식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남은 시간을 알 수 없다. 나에게 혹은 바로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평균 수명을 계산하지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자문해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로에게 여든아홉의 어머니가 ‘한창때’라고 하지 않는가.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간다. 누구나 겪게 될 혹은 곧 현실이 될 노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소스케, 너 올해 몇이나 됐냐?”
“예순여섯.”
어머니는 감탄하듯이 말했다.
“예순여섯? 아이고 한창때로구나.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나이로세.” - 4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