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제라르 르그랑 지음, 박혜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고전주의와 바로크에 이어지는 낭만주의까지 미술을 통해 살펴보는 역사는 인류의 고뇌와 삶의 양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근대와 함께 출발한 낭만주의 미술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극복(?)하면서 시작된다.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낭만주의와 충돌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이 양식들은 이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까지 숨가쁘게 넘어오고 있다. 1789년 회화가 논쟁의 중심에 있을 때 혁명은 시작되었다. 다비드는 혁명을 통해 그의 명성을 더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거둔 성공은 ‘마라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확한 구도와 과학적인 세부묘사, 은은한 채광과 단순한 색채의 조화, 마라의 표정은 실제 그림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게되는 1800년을 전후하여 전쟁과 혁명, 미술과의 관계가 예술가들의 갈등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는 사회적 배경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름의 방식대로 그림의 주제에 영향을 미치고 추방을 당하거나 살롱과 아카데미를 장악하는 정도의 변화가 이어졌다. 다비드에 이어 그로가 선두에 나서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등장한다. 앵그르, 제라르, 퓌슬리의 그림들은 전시대와 구별되는 나름의 색깔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개별 사건과 신화의 내용들을 주체적으로 변화시키며 예술가 나름의 해석을 더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외된 화가 고야처럼 악마와 뭉글어진 얼굴 형태의 그림들과 더불어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낼 수는 없을 듯하다.

  “그림과 감정은 같은 사물을 표현하는 두 개의 다른 단어이다”라고 말한 컨스터블의 말처럼 1817년 루이 18세가 완전히 파리로 돌아오자 공포정치의 희생양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달라진다. 체제의 변화는 그 안에 숨쉬는 예술가들의 사상과 활동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게 된다. 개선문에 새겨진 ‘라 마르세예즈’를 조각한 뤼드의 작품이나, 다비드 당제의 부조 작품들은 조각에서 또다른 생동감을 보여주고 있다. 군주제에 대립하는 경향의 대변자가 되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정치적 해석을 배제하고서라도 어두운 색조와 인물들의 동선과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실제 250명이 탄 메두사호가 침몰하고 150명 중에 겨우 15명만이 구조된 사건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보면 외젠 들라크루아의 명성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프랑스에서 출판된 원본을 볼 수 없으나 책의 가격과 화보의 수를 고려하면 생략된 화보가 있을 듯한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앵그르의 ‘앙젤리크를 구하는 로제’에서 보여주는 선명함은 여전히 사슬에 묶여있는 여성의 몸의 곡선에서 배어나오는 관능미를 감출 수 없어 보인다. 폴 위에의 ‘황혼의 트루빌 해변’은 강력한 빛으로 야생의 거친 면모를 보여준다. 데생을 무시했기 때문에 ‘성실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들라크루아를 비난한 앵그르는 대다수 아카데미 비평가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당했다. 그 이유는 ‘비극성’이 부족하고 절충주의를 권유한다는 것이었다. ‘해안으로 들어오는 배’를 통해 형태를 색채로 분산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윌리암 터너의 영국과 독일, 스페인에서 몇몇 화가들이 이 시기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단장하는 에스더’를 그린 사세리오, ‘붉은 옷을 입고 독서하는 소녀’를 그린 코로 ‘돈키호테’를 그린 도미에 등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들의 그림은 이제 서서히 근대의 폭넓은 개념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것은 슐레겔이 “낭만주의는 여전히 생성되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생성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그 본질이 있다”고 말한 것에서 찾을 수 있듯이 예술의 시대구분으로서의 협의의 개념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반영해 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나는 ‘내 예술과 인류에게 봉사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라느 칼스텐스의 말은 낭만주의 예술가의 강령으로 통할 수 있을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전후하여 1800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1817년 루이 18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우리나라의 그것처럼 민중들에게는 더없이 혼란스런 시기였고 신산스런 삶의 고통스런 현장이었으리라. 당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미술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매김되고 그 역할을 다했는가는 예술 외적 논의의 대상만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본격적으로 ‘소설’이라는 장르가 시작되는 시대, 그래서 ‘로망스(romance)’와 ‘노블(novel)’이 탄생하고 다양한 장르의 현대성이 잉태되었던 척諛?바로 여기쯤이 아닌가 싶다. 빅토르 위고의 ‘크롬웰’ 서문과 ‘에르나니’ 논쟁으로 서서히 근대의 문이 열리는 시대, 미술비평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며 시인의 명성도 얻은 보들레르의 이야기들은 미술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뭐라 특징 지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19세기의 미술과 근대, 현대 미술이 다가오고 있다. 맛있게 음미해 볼 일이다.


200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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