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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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통해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가들이 많다. 헤겔에게서 사유와 방법론을 제공받고 자크 라캉의 분석틀과 개념 용어를 사용해서 마르크스로부터 실천적 영감을 제공받았다는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자이면서 실천적 문화 비평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진중권의 인문적, 미학적 사유는 비트겐슈타인의 인식틀과 벤야민에게 받은 영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밝히고 있다. 2002년쯤 내가 읽었던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첫 책은 철학자 김용석의 <깊이와 넓이 4막 16장>이었다. 김용석 또한 정확한 개념 정립과 논리적인 글쓰기로 문화 현상들을 꼼꼼하게 다룬 적이 있다.

  90년대 기억에 남는 몇 권의 책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를 꼽는다. 마그리트와 에셔를 통해서 그가 보여준 미학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돌하게 명민한 분석과 거침없는 목소리로 현실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진보 논객 ‘진중권’이 아니라 책 속에서 만나는 그의 목소리는 다소 진중하다. 하지만 여전히 재치있고 감각적인 문장은 여전히 독자를 흡수하는 힘을 갖는다.

  “상상은 정신의 놀이다. 상상을 할 때 정신은 노동을 하지 않고 놀이를 한다. 미래에는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예언은 맞았다. 비록 인류의 미래는 공산주의의 것이 아니었지만, 상상력이 생산력으로 진화하면서 노동은 점차 유희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윤리학은 미학이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도 실현되고 있다. 상상력은 미학의 영역이며, 이 영역은 진위와 선악의 피안에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 ‘상상력 혁명’중에서

  스스로 밝힌 위와 같은 서문의 내용이 이 책의 의미를 대변하고 있다. 점점 빠르게 진행되는 미디어 시대에 활자 매체인 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중권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의 문화 텍스트로는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비선형, 순환성, 파편성, 중의성, 동감각, 상형문자, 단자론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를 내세워 이것을 다시 일곱 개의 주제로 일별하고 있다.

  우연과 필연(red)-주사위/체스/광대, 빛과 그림자(orange)-카메라 옵스쿠라/라테르나 마기카/그림자놀이, 숨바꼭질(yellow)-아나몰포시스/인형풍경/물구나무, 수수께끼(green)-애너그램/아크로스틱/리버스, 사라짐의 미학(blue)-피크노렙시/마술, 순간에서 영원으로(navy blue)-불꽃놀이/만화경/미로, 다이달로스의 꿈(purple)-종이접기/오토마타/정리정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배열하고 묶는 방식으로 흥미진진한 텍스트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색인처럼 사용되는 색은 독특한 의미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다만 각 주제 아래 묶인 놀이들이 제각각 독립적이지 않고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평면적 테스트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이 책은 90도로 돌려 보고 뒤집어 보고 비스듬이 놓고 째려보고 별 짓을 다하며 읽어야하는 재밌는 놀잇감이다. 아무도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에셔나 김재홍의 그림 등 <미학 오딧세이>에 소개되었던 작품들이 많아 익숙함 속에서 그의 텍스트들 자체가 또 하나의 하이퍼 링크 기능을 갖게 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또 같은 문단과 문장들이 반복되는 장치를 통해 순환성과 중의성 등 앞서 제시한 일곱 개의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이 책의 재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어린 시절 익숙하게 보아왔던, 혹은 지금 여전히 즐기고 있는 놀이와 사물로부터 자연스럽게 상상력의 세계와 놀이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또 하나는 책의 구성과 치밀한 글쓰기 전략으로부터 오는 신선함과 흥미다. 대부분의 인문학 텍스트의 진지함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물론 내용과 소재 자체에 대한 즐거움은 기본이다.

  “창조적 인간이 되고 싶은가? 그럼 성숙의 지혜를 가지고 어린 시절의 천진함으로 돌아가라. 500년 전에 이미 기술적 상상력을 갖고 있었던 다빈치. 그는 호기심에 한계가 없고 상상력에 구속이 없는 ‘영원한 소년’이었다” - 영원한 소년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상상력 혁명’은 결국 ‘영원한 소년’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순환 고리를 에셔의 작품 ‘메타몰포시스’로 보여주면서 책을 끝내고 있다.

  맥루한의 미디어 시대에 대한 경고는 책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단언할 ?없겠다. 하지만 적어도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과 같은 신선하고 재밌고 즐거운 그러면서도 상상력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책들이 있는 한 활자 매체를 떠날 생각은 없다. 늘 새恝?수많은 없겠으나 진중권의 또 다른 책을 기다린다.

  하늘이 흐리다. 비가 올 것만 같다. 김광석의 ‘거리에서’가 가슴에 사무치는 날이다.


200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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