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여관
임철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을 다른 짐승하는 구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교한 언어와 불의 사용, 혹은 웃음의 能否에 따라서 구별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특징은 생존과 무관하게 동족을 살해하는 행위가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해본다.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는 그 치욕스런 인간의 魔性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일 것이다.

  임철우의 장편소설 <백년여관>은 인간이 아닌 악마들에게 상처받은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제목을 보고 문득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떠올랐으나 연결되지 않고 여름 호러물로 제작되어도 좋을 만큼 참혹하다. 이 소설은 북망산자락 해가 들지 않는 습지의 축축하고 끈적한 이끼처럼 온몸을 휘감는다. 이틀동안 온 몸이 근질거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질만큼 가슴이 시렸다. 2003년 이청준의 <신화를 삼킨 섬>이 보여준 에둘러 말하기 방식으로는 같은 사건에 대한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제목에서 암시하는 백년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 100년을 의미할 것이다. 제주도 4․3, 6․25와, 베트남 참전, 5․18로 이어지는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아픈 기억들을 토해낸다. “섬이 하나 있다. 그림자의 섬. 영도(影島).”의 백년여관에 시애틀에 사는 재미교포 김요안이 찾아오고 소설가 이진우가 우연한 동행이 되어 찾아든다. 이 여관을 중심으로 복수와 미자, 문태, 신지, 금주, 함흥댁, 순옥, 은희, 조천댁 등의 인물들이 견뎌낸 시간들이 우리들 삶의 일부이며 현재의 기억이다. 살아 남은 이들 모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죽은 영혼들 또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도는 죽은 영혼들보다 지독한 트라우마(trauma).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外傷後-障碍,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 충격 후 스트레스장애·외상성 스트레스장애라고도 한다. 전쟁, 천재지변, 화재, 신체적 폭행, 강간, 자동차·비행기·기차 등에 의한 사고에 의해 발생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전신적 질병이다.
  증세는 개인에 따라 충격 후에 나타나거나 수일에서 수년이 지난 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 급성의 경우 비교적 예후가 좋지만 만성의 경우 후유증이 심해서 환자의 30% 정도만 회복되고, 40% 정도는 가벼운 증세, 나머지는 중등도의 증세와 함께 사회적 복귀가 어려운 상태가 된다.
  증세는 크게 과민반응, 충격의 재경험, 감정회피 또는 마비로 나눌 수 있다. 과민반응의 환자는 늘 불안스러워 하고, 주위를 경계하며,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증세를 보인다. 충격을 다시 경험하는 환자의 경우에는 사건 당시와 같은 강도로 느끼는 기억, 꿈, 환각이 재연될 수 있다. 감정회피 또는 마비를 나타내는 환자는 충격이 일어났을 때의 감정·생각·상황 등의 기억을 피하려고 노력하며, 정상적인 감정반응은 소실된다.

  임철우의 소설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심리학적 기제에 대한 설명이다. 김소진의 소설 <자전거 도둑>에서 볼 수 있는 개인의 정신적 외상이 아닌 우리 민족의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임철우는 독자들에게 집요하게 되묻고 있다. 외면하고 싶거나 잊고 싶었던 기억의 촉수들이 살아나 더할 수 없는 가학적 쾌감을 느끼도록 할 목적이 아니라면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 후기에서 “한 인간 존재의 죽음은 육신의 호흡이 멎음으로써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지상의 맨 마지막 인간이 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인권과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부정은 인간 존재에 대한 부정이며 야만적 행위의 본질이다. 인류가 저질렀던 세계사의 만행들을 새삼 뒤적거릴 필요도 없다. 현재형이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우리의 문제에 대해 작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다. 당신이 말하는 해묵은 역사나 지나간 사건 따위를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난 단지 사람을,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죽은 자와 아직 살아 있는 자. 그들의 이름 없는 숱한 시간들을, 사랑과 슬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나는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작가 후기



200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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