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 2000년 제3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시나 소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너무 다양하여 선별하여 듣지 않거나 무비판적인 수용을 하게되면 그 피해 정도는 다른 것에 견줄 수가 없다. 특히 소설의 영원한 주제는 사람일 수밖에 없어 더욱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묻고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의 본령이라면 작가의 메시지는 독자의 의미망에 포착되기 전에 이미 공론의 장에 포함된다. 즉 문학은 개인적인 독서 행위를 넘어서는 사회적 몸짓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문의 소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김명인의 시 ‘의자’에서 제목을 빌려와 일련의 단편들인 ‘나무’ 시리즈를 하나로 묶고 있다. <관촌수필>과 <우리동네>의 작가로 잘 알려진 작가다. 2000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작가의 마지막 책이었다.

  다른 작품들에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이문구 소설의 특징은 충청도 사투리의 힘으로 요약할 수 있다. 행동이 아닌 말의 힘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우리 문학에서 색다른 모습은 아니다. 아름답고 정감있는 토속어로 한국인의 현재 모습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로 읽히지는 않는다. 실용성과 환금성이 없는 나무들을 내세워 현재 농촌의 모습과 중장년층의 농촌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그려냄으로서 사실적인 표현과 보여주기의 역할을 충실히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감동할 수 있는 독자는 많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도 찾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수상자 선정의 말에서 ‘어떤 경의를 표하더라도 충분치 않을 것’이라고 극찬하고 있으나 쉽게 동의할 수는 없다.

  물론 한국어가 지닌 아름다움을 사투리의 힘을 빌어 그 바닥까지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이문구의 소설은 탁월하다. 전통문학의 해학을 이만큼 되살린 작가가 드문것도 사실이다. 책장을 덮을 때까지 나는 계속 소리 죽여 킥킥대거나 미소를 지으며 읽었다. 풍성한 언어가 주는 말의 힘은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리만족이다. 그것 나름대로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소설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는 데는 동의한다.
 
  장평리 찔레나무, 장석리 화살나무, 장천리 소태나무, 장이리 개암나무, 장동리 싸리나무, 장척리 으름나무, 장곡리 고욤나무, 더더대를 찾아서 - 이렇게 8편의 단편으로 묶여 있는데 인물들과의 친연성으로 인해 마치 장편 소설을 읽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단편의 주인공들이나 주변인물들은 모두 과거의 농촌을 상기시키는 감상적 피상적 대상의 인물들이 아니다. 작가의 경험에서 배어나오는 90년대 농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에피소드 정도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도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농촌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작은 사건들이 모여 공동체적 삶의 모습들을 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문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강원도의 힘(?)을 보여준 작가 김유정을 떠올리게 하는 이문구의 소설은 소탈하고 깔끔한 맛으로 읽힌다.

  그러나 ‘동인문학상을 받으며’에서 보여준 작가로서의 의식이 아니라 사회와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단적인 문장에서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김동인 선생을 친일문인의 범주에 넣고 그 이름으로 된 상을 받을 수가 있느냐고 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애시당초 독립운동가의 자제가 아닐 뿐 아니라 일제 때 마키무라로 창씨개명했던 보통사람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뿐더러 “진정한 의미의 친일문인은 춘원 하나뿐”이라고 한 스승의 견해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팔모로 봐도 두드러지거나 유별난 구석을 가진 위인이 아니다. 오히려 천성이 늦되어서 무엇이나 뒤늦게 터득하고 뒤전에서 갈피없이 헤매기가 예사였다. 그렇지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는 태도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 땅의 문학 부흥을 위한 혁신적인 개혁’이라는 조선일보사의 취지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문인이 문학을 위하는 언론에 신뢰에 호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시대의 작가가 반드시 사회의식이 투철하거나 균형감각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방식대로 인간과 사회를 분석하고 반영하여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관점으로 이문구의 소설들을 바라본다면 적잖은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진정한 의미의 친일문인은 춘원 하나뿐”이라는 말을 어떻게 전적으로 믿을 수 있으며 순히 ‘문학을 위하는 언론’이라고 해서 ‘신뢰와 호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놀랄만한 발언이라는 생각은 개인적인 판단일까?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발언도 아니고 수상 소감에서 자연럽게 내비친 작가의 견해라서 더욱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나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오래된 금언을 좋아한다. 작가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 당연히 자신의 견해와 관점들을 밝힐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한 작가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작품과 더불어 작가의 의식과 삶에 대해 총체적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작품 외적 문제로 시비거리가 될 정도의 작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독자로서 느끼는 이문구에 대한 발언은 실망스럽다.


200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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