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는 일이

  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 시는 정호승의 <새벽편지>에 수록되어 있는 ‘첫눈’이라는 시의 일부다. 1987년 민음사에서 출판된 이 시집을 읽고 나는 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어쩌면 먼 미래의 삶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치할만큼 사랑에 관한 짤막한 구절일 뿐이었지만, 감수성 예민한 고등학생에겐 오래 잊혀지지 않는 구절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란……?’는 질문을 받는다면 지구위에 60억명이 제각기 다른 대답을 하게 된다.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다. 아니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감염되는 바이러스처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장 진부하면서 가장 흥미진진한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사랑을 한 철학자가 고민하고 있다.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그렇게 3년의 간격을 두고 나에게 찾아왔다.


  2002년 여름에 출판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원제가 ‘Essays in love’였고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95년에 번역되었지만 주목을 끌지 못했었다고 번역자는 전한다. 재번역판은 제목만으로도 주목 받을만하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내용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친절하게도 제목위에 ‘소설’이라고 장르를 지정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은 작가의 대단히 사적인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진행된다. 작가가 사랑했던 여인 ‘클로이’를 5840.82분의 1의 확률로 만나 사랑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헤어지는 장면을 설명한다. 헤어진 후의 감정까지도 상세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과정속에서 들려주는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는 보통을 넘어선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주관적 감정을 객관적으로 확대 시키는 능력이다. 또한 사적인 영역의 상황들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반적 상황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는 잠언과 같은 말하기 방식이다. 


  이 소설은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누구나 믿고 싶은 내 사랑의 숙명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확률적으로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한다고 해서 우연이 필연을 가장할 수 있는지.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는 간단한 진술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대목들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투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지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분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작가는 나름대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사소한 대화와 상황을 통해 그것을 시도한다. 여기에 많은 철학자가 동원되고 여러사람의 금언들이 인용된다. 그런 장치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객관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읽는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상황에 적용하거나 공감하는데는 분명히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렇게 한 여자를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속에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역사, 종교, 마르크스까지 총동원하며 사랑의 딜레마를 풀어내려는 시도가 신선했다.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녹아들 수 있는 것은 작가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진지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두 책에서 얘기하는 섹스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를 살펴보면,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섹스는 육체의 산물이다. 무분별하며, 디오니소스적이며, 직접적이며, 이성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며, 희명을 동반한 육체적 욕망의 해소이다.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섹스가 친밀함의 상징이기는 하다. 그러나 섹스 자체가 두 사람이 친밀해지는 것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섹스가 상징하고 있는 이상적인 조건을 깨뜨릴 수도 있다. -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좀더 험난한 과정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누군가와 섹스를 나누는 것은, 마치 책을 사두고 그것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분명 시간이 흘렀고 사람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관점이 변화했음을 느낄 수 있는 다른 표현들이다. 앞의 책에 비해 ‘Kiss & Tell’(유명한 인물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이라는 원제를 가진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형식의 새로움’이 가장 큰 매력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주는 상업성은 정말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파란 하늘에 흰구름을 배경으로 한 표지만 한동안 바라보았다. 책은 내용 이전에 손으로 만져보고 쓰다듬고 냄새맡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오감으로 다가오는 책의 즐거움은 내용을 넘어선 감동을 준다. 이 제목과 표지를 보면 누구나 사고 싶어지는 책이다.


  하지만 내용이 주는 감동은 전만 못하다. ‘클로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뤘던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이사벨’을 주인공으로 마치 한 사람의 전기를 쓰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독특함이 있다. 책 중간에 이사벨이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어린 시절의 사진과 가족, 친구들의 사진은 잠시 이 책의 의미를 착각하게 만든다. 작가의 의도이든 아니든 나는 한 개인의 연애 보고서 이외의 다른 의미로 읽지는 못했다.


  키스에 대한 느낌은 오히려 앞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었다.


  가장 달콤한 키스, 키스라면 이래야 한다고 꿈꾸어오던 키스였다. 가볍게 스치다가 머뭇머뭇 살며시 밀고 나가자, 우리 살갗에서는 독특한 맛이 풍겨나왔다.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키스에 대한 환상과 작가의 느낌을 설명해 줄거라는 기대는 끝까지 버리지 못했지만 결국 한 줄도 언급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결국 이사벨과도 헤어지고 만다. 그러고 보면 두 책의 공통점은 비극이다. 실패한 연애 이야기다. 만약 연애의 성공이 결혼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책의 화두는 ‘감정이입’이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능력이다.”라고 선언하며 작가는 이사벨을 만나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헤어지는 순간부터 제시해서 독자들의 들뜬 마음을 일단 진정시키고 출발한다. 사랑을 하는 과정을 한 여자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특별한 내용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소소한 과정과 대화들, 한 개인에 대한 철저한 관심과 기억들이 빚어내는 놀라운 효과는 행간의 의미로 다가온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의 머리, 혹은 가슴속에 그려질 ‘이사벨’을 그려본다면 그 효과는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누구나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버리면 더 이상 자기를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 뒤에는 누군가가 우리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놓여있다. 그것이 비밀 누설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주범이다.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라는 작가의 발언은 주목할만하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무언가를 바닥까지 뒤집어 보여주려는 의도를 짚어내는 것으로 이 책의 의미는 드러난다. 거울처럼 투명하게 독자들에게 되비쳐 주려는 것이 작가가 노린 효과는 아니었을런지 모른다. 특별한 형식과 독특한 방식으로 또 하나의 연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앞의 책에서 보여준 감동과 공감의 울림이 부족하다. 앞으로도 가볍고 친숙하게 그의 책들이 쏟아지겠지만 골라 읽기가 또 하나의 숙제로 남는다.


  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알고자 하는 의지는 줄어든다는 역설을. -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200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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