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책만 보는 바보를 꿈꿔 본다. 세상에 대한 도피와 일탈의 성격으로 쉽게 말한다. “아~, 시골에 내려가 책이나 보면서 지냈으면 좋겠다.”하는 소망을 드러낸다. 나도 그렇다.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하늘을 벗삼아 책만 보며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과 태도가 다 다르니 사람마다 소망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책 속에 묻혀 사는 즐거움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강렬한 유혹임에는 틀림없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책만 읽는 바보를 ‘간서치(看書痴)’라고 한다. 조선 후기 한 시대를 살았던 이덕무(1741-1793)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글을 남겼다. 스물 한 살에 쓴 ‘간서치전(看書痴傳)’이 그것이다. 이 책은 자서전 형식으로 이덕무 스스로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글공부를 하던 시절부터 늦은 나이에 연경에 다녀온 후 규장각 검서관으로 입궐하고 지방의 수령으로 내려가기도 한 그의 삶은 평범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글과 생각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어찌보면 역사속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특별한 공적이나 특징이 없어보이지만 그의 생각과 삶이 주는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이 있다. 한번 서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대대손손 서자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은 그 후손들이 짊어져야할 삶에 멍에에 대해 관대하지 못했다. 적자와 서자의 차이, 신분의 차이가 삶을 결정했던 시대를 들여다 보는 일은 슬프다. 이덕무는 서자의 집안 출신으로 관직에 나아갈 길도 막혀있고 그렇다고 농토가 풍부하거나 상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스스로 ‘책만 읽는 바보’라고 칭할만 하다. 만약 정조와 같은 왕을 만나지 못했다면 서자 출신의 이덕무는 평생 눈물과 회한으로 쓸모없는 자신을 자책하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중요한 일이다. 직업의 선택이나 생계의 유지 수단이 제한되어 있었던 이덕무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거나 즐겁지만은 않다. 다만 그의 젊은 시절 방안에 들어앉아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따라가며 책을 읽는 모습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책을 사랑했던 선비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평생 책과 함께 하며 그보다 더 좋은 친구들과 교우했던 이덕무의 삶은 평범했지만 그의 생각과 글은 맑은 수채화처럼 깨끗하다. 평생의 친구였던 유득공과 박제가 그리고 백동수와 이서구 등 친구들과의 이야기는 책보다 더 진한 감동을 준다.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그의 두 칸짜리 집 마당에 책을 읽을 수 있는 방 한 칸을 만들어 주는 일화는 형언하기 힘든 친구들의 우정과 그 관계를 말해준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생활은 편리해지고 복잡해지고 속도가 지배하게 됐지만 이덕무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는 시대를 넘어 18세기 후반의 어느 한 시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이덕무의 산문들을 자서전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가의 솜씨도 깔끔하다. 문장의 흐름과 내용에 군더더기가 없고 이덕무의 글을 그대로 옮겨 나가는 부분도 어색하지 않다. 한 선비의 이야기로 책을 좋아했던 사람의 일생과 평범하지 않았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전해주는 책이었다. 이덕무의 친구 유득공과 박제가도 서자였다. 가슴 아픈 현실과 가난을 곁에 두고 살았던 그의 삶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며 백탑(원각사지 10층석탑)아래를 거닐던 이덕무의 젊은 시절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건 나이 때문은 아닐 것이다. 평생을 함께 할 친구와 존경할 만한 스승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높은 벼슬도 많은 재산과도 거리가 멀었던 이덕무의 삶은 그렇게 평범한 듯 보이지만 시대를 벗어나고자 했던 올바른 생각과 태도가 아름다운 간서치였다. 현실적인 고통과 자책감 때문에 붙혀졌을 ‘책만 보는 바보’는 그 이면에 깔린 비애보다 현실에서 벗어나 글읽기를 좋아했던 한 선비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배어 있다. 하지만 책읽기의 행복과 모든 것을 나눌 만한 좋은 친구들과 함께한 그의 삶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차별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책을 가까이 했던 그의 삶이 전해주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은 수묵 담채화처럼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그의 맑은 영혼이 느껴진다. 책속에, 글속에 많은 것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고 진솔한 한 인간의 삶과 이야기가 영웅의 이야기를 넘어선 감동을 전해준다. 이 세상에는 책만 읽는 바보가 아니라 책도 안읽는 천치는 얼마나 많은가.2005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