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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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단단한 것은 때로 크고 거대한 것이 감당하지 못한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물건 앞에 무력하게 쓰려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몸이다. 대하소설이나 장편 소설이 보여줄 수 없는 작고 단단한 결정을 보여주는 것이 단편의 미덕이라면 천운영의 첫 번째 소설집 <바늘>은 높은 성과를 이루고 있다. 신인들의 첫 단편은 의욕과잉이거나 인위적 서사구조가 거스를 때가 많다. 그래서 첫 작품집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우연이지만 2001년에 나온 그녀의 첫 소설집 <바늘>은 천운영을 가늠해 볼만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최근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 최근작을 읽어보지 못해 쉽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잠깐 쓰다 말 작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늘>은 비일상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단편 곳곳에 숨어있는 환각과 혼돈은 의도된 장치겠지만 어렵지도 혼란스럽지도 않다. 표제작 <바늘>에서 보여준 사물에 대한 관찰과 결말에서 보여주는 극적 반전은 읽는 재미를 극대화 시켜준다. 보여주기 소설로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소설집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는 여성성과 욕망이다. 90년대식 여성성이 아니라 2000년식 여성성이다. 무엇이 다른가? 90년식은 여성의 해방을 넘어서 일탈로 나아가고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남성과 여성을 넘어서 한 개인으로서 사회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면 2000년식은 어떤가? 아직 알 수 없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천운영은 분명 다른 형태로 그것들을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은 전통적인 지위가 뒤바뀌어 있다. 폭력과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여성의 몫이다. 매맞는 남편과 살인을 저지르는 여성이 등장하고 그 욕망의 극한은 식욕과 성욕으로 대체된다.

  역겨울 만큼 육식에 대한 탐욕을 보여주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일관되게 욕망과 억압사이에서 갈등한다. 지워지지 않는 내면의 갈등은 본능으로 바뀌어 가장 본질적인 식욕과 성욕으로 치환된다. ‘바늘, 숨, 월경, 등뼈, 행복한 고물상’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모습들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눈보라콘, 유령의 집, 포옹’ 등에서 작가는 유년의 기억들과 인간 내면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로테스크하다. 이제 우리 소설에서 여류소설가라는 말은 사라졌으나 그들이 보여주는 색깔은 남성과 구별되어야 한다. 관심의 분야와 폭에서 서로 변별점을 가지고 있으며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법이 없고 언어의 표현과 기교가 극대화된다. 감각적 문체와 자유로운 말의 향연으로 특징지울 수는 없지만 감성에 대한 접근 방식과 표현하려는 내면의 결들이 훨씬 더 섬세하다.

  <바늘>은 우울한 욕망과 탐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여성 화자들의 담담한 어법을 통해 일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부분들을 표현한다. 차라리 눈감고 싶거나 확인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기분을 언짢게 한다. 작가에게 새로움은 미덕이다. 그 새로움은 내용이든 형식이든 표현방식이든 자기만의 색깔을 가져가기가 쉽지 않다. 그 색깔 속에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천운영의 소설을 몇 권 더 읽어봐야 확인되겠지만 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다만, 묘사와 표현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취재 경험과 자료 수집의 과잉이 드러나는 부분들이 눈에 띄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단편 속에 녹여낼 수 있는 역량의 한계는 감춤과 절제의 미학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숨>에서 보여주는 마장동의 모습은 생생하고 낯설다. 하지만 부분적인 묘사가 지나쳐 흐름을 놓치거나 필요없는 부분으로 긴장을 풀어내는 방식들이 그것이다. 탄탄한 소설 수업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같아 씁쓸하기도 했지만 엉성하고 어설픈 문장보다는 단단해 보인다.

  표제작 ‘바늘’이 보여주는 상징과 여성성에 대한 탐구가 그녀의 소설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지가 흥미롭고 궁금하다. 단편의 힘을 넘어 장편을 통해 보여줄 방법들이 지루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200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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