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역사적 진실과 내가 소설을 통해 찾으려는 인간적 진실은 다르다. 역사와 진실, 인간과 진실이 다른 것처럼. - ‘작가의 말’ 중에서

  역사에 기록된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소설이라는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에서 굳이 실존 인물을 되살리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선택이겠으나 소설을 통해 독자가 나눌 대화의 단초는 이미 역사적 사실속에 내재해 있다. 영웅의 이야기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선망과 외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채동구같은 인물의 삶이 훨씬 더 흥미롭다.

  이름 없는 역사속의 선비. 초야에 묻혀 일생을 보냈으나 자신의 굳은 신념을 끝까지 지켜 나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존경 때문이다. 고령 지방의 ‘인간’ 채동구의 삶은 희극적이지도 비극적이도 않다. 작가의 외가, 먼 조상중 하나인 채동구의 고유제를 통해 그의 행적을 돌아보는 형식의 소설은 액자의 형식에 담아내고 있다. 현재와 과거의 진지한 대화가 역사의 소임이라고 믿는듯 한 작가의 태도는 객관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소설을 통해 찾으려는 인간적 진실은 역사적 진실과 분명히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을 것이므로. 400여 년 전, 병자호란(1636년)을 정점으로 네 번의 출도를 가출로 묘사한 작가의 시선부터 확인해야 한다.

  우리 역사의 가장 치욕스런 순간으로 기억하는 삼전도의 치욕 ‘삼배구고두례’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김상헌 같은 척화파가 명에 대한 의리와 국가에 대한 고매한 충절로 평가되고 최명길 같은 주화파가 욕먹을 짓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리와 국가의 안위를 담보로 자신들의 좁은 소견과 명분만을 내세운 위정자들의 분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고개를 돌리고 싶어진다. 당시에 태어나 받았던 교육과 세계관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고결하고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비판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미련스런 고집과 명에 대한 사대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런 상황에서 채동구와 같은 인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머릴 내가 이고 내 뜻을 내가 지킨다.(吾守吾志 吾載吾頭)”는 묘비명은 채동구의 삶과 인간적 진실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는 것처럼 희극적으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 다를 것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은 그 너머에 있을 것은 분명하다. 과연 소설속에서 인간적 진실은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이지만 채동구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진실은 ‘인간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잘것없지만 한 인간의 삶의 흔적들이 보여주는 신념과 고집 속에 함유된 맑고 깨끗한 정신 말이다. 역사를 뒤바꿀만한 힘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인물들과 다른 평범한 양반의 대의명분 뒤에 숨어 꿈틀거리는 개인적 욕망과 가문의 영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작가는 수많은 기록과 후손들이 기록한 그의 행장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채동구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꿔지는데 그 상상력이 바로 성석제가 말하는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적 진실의 핵심이다. 몇 줄로 기록된 한 인간의 행적들로 우리가 알수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고민과 논의는 진지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가공의 인물이든 역사속의 실존인물이든 한 ‘인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보편성의 문제에 관심이 간다. 400여년 전의 인물 채동구를 통해 현대인의 숨은 욕망과 인간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산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녹록치 않은 것이라면 주어진 환경과 시간 속에서 자신이 가진 신념과 일관된 대의명분을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혹은 그 과정에서 겪게되는 인간으로서의 갈등과 이기적 욕망들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확인하는 일은 즐겁고도 고통스런 일이다.

  주인공 채동구와의 비판적 거리두기, 가독성 높은 문체와 해학은 작가 특유의 개성을 다시 한번 발휘한다. 장편으로는 처음 만나는 성석제의 <인간의 힘>은 커다란 문학적 성과와는 거리가 멀게 보이지만 소설의 영원한 주제가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데 동의한다면 작가가 안내하는대로 진지함을 벗어던지고 채동구를 바라보라. 그러면 네 번의 가출을 통해 인간 채동구가 ?변모해가는지 확인할 수 있고 그곳에 ‘인간의 힘’이 숨어 있다는 거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가출하고 싶어진다. 가출이 안된다면 외출이라도……


  가출은 인간에 의한, 인간만의,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따르는 의지의 표상이다. - 서. 전생


060106-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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